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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惡)과 선(善) 3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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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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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3-03-09 22:05 조회 14,625 댓글 0
 
인간의 마음속에는 두 가지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한다. 그 하나는 ‘악’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선’이다. 이 악과 선은 하나님의 창조 동산인 에덴의 첫 인간인 아담과 그의 아내였던 하와의 마음속에도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악과 선을 분별하여 악을 금하고 선을 행하는 것은 인간에게 허락하신 자유의지의 영역이다. 물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며 매 순간을 살아 왔다면 악이 틈타고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올 수 있는 빈 방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뱀으로 묘사된 사탄은 에덴동산의 하와와 그의 남편 아담의 이 같은 약점을 공격하여 무너트렸다. 인간 속에 있는 악과 선에 대한 기호는 ‘하라’고 명하신 것은 하지 않고 ‘하지 말라'고 금하신 것을 하려고 하는 불순종과 타락으로 이어졌다. 완전한 축복의 동산 에덴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 에덴의 모든 환경을 아담과 하와의 삶의 거처로 제공해 주셨다. 단지 금기사항이 있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6-17)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못하고 어긴 하와와 그녀의 남편 아담은 에덴에서 추방되고 말았다. 악에게 선이 패배하고 만 것이다.

21세기의 현대인들은 지성과 문명과 지위와 권력과 명예와 힘의 옷으로 자기 자신의 악을 가리고 숨기며 살아가려고 하지만 악을 영원히 가리고 숨길 수 있는 방편이란 없는 법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어둠을 어둠으로 밝혀내고 악을 악으로 증거 하는 빛으로 오신 메시아이시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고 하였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와 악을 치료하는 유일한 선이시며 유일무이한 빛의 원천이시다. 과학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더 나은 빛을 찾아 사용해가고 있다. 전기의 발명이 그러한 것처럼 오늘 날은 빛의 세계에서 전자기파 영역에서 마이크로웨이브와 적외선, 가시광선, 자외선, 엑스선, 감마선 등을 발견하여 공학과 의학의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워 나가고 있다. 유대의 율법학자였던 사울은 교회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무지와 오해로 인하여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딤전1:13)행세를 하며 초대 교회의 성도들을 몹시 핍박하는 일에 앞장섰었다. 그러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체험한 후에 초대 교회의 복음을 만방에 전파하는 이방 선교의 선봉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변화를 체험한 그에게도 마음 깊은 곳에는 항상 악과 선의 싸움이 심각하였다. 로마서 7장 20절은 그런 그의 심경을 진솔하게 고백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그렇다. 믿음으로 살고, 복음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살아가던 사도 바울에게 언제나 선을 행하고자 하는 신앙의지가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속에 악이 여전히 자리 잡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고뇌하였다. 인간에게 있어서 악의 문제는 마치도 육체의 그림자와도 같은 것이다.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지성 중의 한 사람으로 손 꼽혔던 영국의 C. S. 루이스(C. S. Lewis,1898-1963)의 책과 글들을 추적한 제라드 리드는 <C. S. 루이스의 일곱 가지 악과 선>이란 책에서 제목이 밝히는 대로 인간의 일곱 가지 악과 선에 대한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어찌 이 세상에 악이 일곱 가지만 되겠는가.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9-1948)는 ‘일곱 가지 사회악’에 대하여 언급한 바가 있다. 그 일곱 가지란 “원리 없는 정치”(Politics without principle), “노동 없는 부”(Wealth without work), “양심 없는 쾌락”(Pleasure without conscience), “인격 없는 지식”(Knowledge without character), “도덕성 없는 상업”(Commerce without morality), “인간성 없는 과학”(Science without humanity), “희생 없는 종교”(Worship without sacrifice)를 말한다. 그 악의 뿌리는 악 자체가 아니라 ‘죄’이다. 곰팡이가 생기는 환경으로부터 곰팡이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환경과 여건을 쾌적하게 바꾸면 곰팡이가 사라지는 것처럼 죄의 문제를 해결하여야 악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로마서 7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영적인 갈등과 고민을 진솔하게 고백하고 있다. 율법은 거룩한 것이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이라는 사실을 바울은 깨달았다. 계명은 언제나 죄가 죄인 것을 확연하게 드러나게 하는 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알거나 계명을 깨우친 것 가지고 자기 자신을 죄로부터 구원할 아무런 힘과 능력이 없다는 점을 발견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롬7:14)고 참담한 자신의 형편을 고백하였다.

바울은 자기 자신조차 자기에 대하여 미워하는 것을 여전히 행하고 있는 실망스러운 모습에 대하여 깨달음과 인간의 한계를 솔직하게 드러내었다.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7:17) 그리고 또 선언하였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악을 행하는 도다.”(롬7:19) 자, 그러면 그 죄로부터 인간은 어떤 악에 빠져 들게 되는가. C. S. 루이스는 ‘일곱 가지 악’이란, “교만, 시기, 분노, 호색, 탐식, 게으름, 탐욕”으로 분류하였다. 물론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만 묵상해 보아도 하나님이 모세 시대에 규정해 주신 인간의 악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다. 하나님께 대한 악과 인간에 대한 악의 뿌리를 구별하여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교훈해 주신 계명의 말씀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평화로운 삶을 축복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울타리를 쳐 주신 내용들이니 말이다. ‘교만’(驕慢)이란 나를 지으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배역하는 가장 악한 악의 쓴 뿌리이다. 그 같은 교만은 천사라도 악마로 타락하게 만들고 말았다. ‘시기’(猜忌)는 가장 혐오스러운 악덕이다. 우리말에도 “시기심은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리게 한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가 아닌가. ‘분노’(憤怒)는 마음과 감정과 생각과 판단과 의식과 이성을 마비시키는 마취제와 같은 무서운 악이다. 분노는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애매하게 주변 사람들조차 불행하게 만드는 매우 파괴력이 큰 악이다. 분노는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이라도 죽이고 말았다.

‘호색’(好色)이란 인간에게 부여한 성의 본능이 병들고 절제력을 잃어버린 불행한 상태를 말한다. 동서고금에 이 ‘호색’으로 무너졌거나 무너진 적이 있는 위인들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많다. ‘탐식’(貪食)은 인간으로 하여금 위장 즉 ‘배’(腹)를 신으로 섬기게 만들어 버렸다. ‘게으름’ 즉 ‘나태’(懶怠)는 인간을 행복한 삶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게 하는 무서운 악이다. 잠언에 보면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잠12:24)고 하였다.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를 받아서 땅 속에 묻어 두었다가 되가지고 나온 종을 책망할 때에 “악하고 게으른 종아”(마25:26)라고 책망하셨다. 사도 바울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1)고 분부하였다. 또한 사도 베드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벧후1:8)라고 주님을 믿고 깨달아 알아가는 생활에도 부지런하라고 권면하였다. 마지막 또 하나는 ‘탐욕’(貪慾)이다. 탐욕은 모든 악의 뿌리다. 인간의 탐욕은 바닷물이라도 모두 다 마시고 싶어 한다. 가령 돈을 사랑하는 탐욕은 인간의 마음을 미혹 받게 하며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 자신을 찌르게 한다.(딤전6:10) 나단 선지자가 범죄 한 임금 다윗을 책망하였듯이 양 백 마리를 가진 주인의 탐욕은 양 한 마리 가진 가난한 이웃의 작은 소유조차도 탐내는 악에 뿌리하고 있다. 그러므로 악을 이길 수 있는 무기는 “분별, 정의, 용기, 절제, 믿음, 소망, 사랑” 같은 ‘선’(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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