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어진 성경
예배당 지하 2층 종려나무 홀 바닥에 성경책 한 페이지가 찢어져 꾸겨진 채로 나뒹구는 것을 발견하였다. 시편 123편에서부터 130편까지의 분량이었다. 어른들이 보는 큰 글씨 성경이 아닌 어린이들이 들고 다니는 손바닥크기의 작은 성경책이었다. 아마도 교회 학교 어린이들 중에서 누군가가 그런 것 같다. 요즘의 어린이들은 성경책을 예전처럼 귀하게 여기지 못하는 것 같아서 아쉽고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성경책이 귀하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가 어렸을 적만 해도 내 몫의 신구약 성경책을 갖는 것이 소원이었다. 어려서 자라나던 강화도 시골 고향 교회의 예배당 뒤편 테이블 위에는 하늘 색 비닐 겉장으로 되어 있는 기드온 보급의 신약 성경이 놓여 있었다. 종이 겉장으로 되어 있는 낱권 복음서들도 있었다. 중학교 때에 작은 크기의 신구약 성경을 아버지에게서 선물 받은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오늘날도 세계 처처에는 성경책이 귀한 나라가 한두 나라가 아니다. 태어나서 죽기 까지 성경책을 내 것으로 갖기는커녕 성경 말씀을 단 한구절도 접해 보지 못하고 죽어 가는 영혼들도 적지 않다.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나라도 그런 나라였다. 이 땅에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오기 전의 한반도는 무속신앙과 불교와 유교 등의 영향 아래 있었다.
구한말 조선에 선교사들의 출입이 어려워지자 한글 성경을 번역하는 일에 착수한 이들이 있었다. 최초의 한국어 성경은 1882년에 중국 심양에 있는 동관교회에서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로스(John Ross, 1842-1915)와 매킨타이어(J. Macintyre, 馬勤泰, 1837-1905)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동관교회는 저들에 의해 1876년에 시작된 교회이다. 오늘 날에는 주일마다 3만여 명의 예배자들이 모이는 곳이다.
존 로스 선교사는 한글 성경 번역을 위해서 한글 선생을 구하던 중에 1874년에 의주 출신의 약재상인 이응찬을 만나게 되었다. 그 당시 이응찬은 많은 량의 약제를 배에 싣고 압록강을 건너다가 풍랑을 만나서 배가 전복되는 바람에 모든 것을 잃고 자신만 겨우 살아남은 상태였다. 날마다 선교사 곁에서 생활하던 이응찬은 기독교에 대하여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는 다음 해에 의주 청년 서상륜,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등을 데려 왔다. 저들은 날마다 한문 성경을 정독하고 한글로 번역하는 일을 맡아 하였다. 그러는 중에 저들의 마음에 성령이 역사하여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다. 한글로 번역된 성경을 헬라어 원문과 대조하는 작업은 매킨타이어 선교사가 맡아서하였다. 드디어 1882년에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이 발간되었다. 이는 스코틀랜드성서공회의 보조로 이루어진 결과였다. 중국의 식자공들은 한글을 몰라서 식자 작업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서간도 출신의 식자공 김청송을 데려다가 그 일을 맡게 하였다. 김청송은 둔하고 느렸지만 매우 성실하고 꼼꼼한 성격이었다. 그는 한자 성경을 대하던 중에 예수를 영접하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드디어 1887년 <예수셩교전서>라는 제목으로 한글신약성경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동광교회의 역사관에는 그런 지난날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지난 2003년 여름에 중국 한족교회 봉헌 예배 차 갔다가 동관교회에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이 땅에 구교인 천주교 전파와 성경 번역의 역사는 그 뿌리가 훨씬 깊다. 우리말로 번역된 최초의 성경은 <성경직해광익>이다. <성경광익직해>라고도 불리는 이 성경은 역관 출신인 최창현(요한)이 1790년경 번역한 것이다. 그는 1801년의 신유박해 때에 순교 당하였다. <성경직해광익>는 포르투갈 출신 예수회 선교사 디아즈(E. Diaz, 1574-1659)신부가 1636년 북경에서 간행한 주일복음 해설서인 <성경직해>와 프랑스 출신 예수회 선교사 마이야(Mailla, 1669-1748) 신부가 1740년에 펴낸 주일복음 묵상서<성경광익>을 한글로 옮겨 하나로 합한 책이다. <성경직해광익>은 복음서 전체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우리 민족이 한글로 접한 최초의 하나님 말씀이란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북한 선교에 열의를 갖고 북한에 출입하는 미국인 신분을 가진 선교사들의 보고 자료에 의하면 북한에 5만여 곳 이상의 지하교회가 있다고 한다. 저들은 적은 수의 성도들이 모두가 북한 공안원의 눈길을 피해서 몰래 몰래 성경을 읽고 숨어서 작은 소리로 찬송하며 기도생활을 이어 오고 있다. 저들이 몰래 숨겨 가지고 돌려가며 읽는 성경은 대개가 손 글씨로 옮겨 쓴 것들이다. 물론 그들 중에는 해방 이전 혹은 6. 25 이전에 선조들의 손때 뭍은 성경을 물려받은 이들도 적지 않다.
미국에 살면서 북한 선교에 심혈을 기울이는 이반석 선교사의 책 <북한지하교회순교사>에는 1945년부터 2006년까지 처형된 북한의 기독교인의 수가 16,984명에 이른다는 자료가 있다. 그런 통계 자료가 어떻게 가능하냐는 질문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그의 풀러신학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내용 중의 일부 인 것을 보면 의심할 여지가 없다. 북한 선교 전문 기관인 모퉁이돌 선교회 총무이며 목사인 이반석은 조부와 선친 모두 6. 25 이전까지 북한에서 사역하던 목사였다. 그는 청소년 시절 어머니를 잃은 후 미국에 건너가서 대학을 졸업하고 사업하던 중에 어머니의 유언을 이루기 위해 북한 선교에 매진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다.(히4:12) 그 말씀이 받아들여지는 이들은 어떤 환경, 어떤 체제, 어떤 억압 가운데서 살아가든지 죽기를 각오하고 순교 신앙으로 자신을 붙드는 말씀의 힘을 의지하며 살아간다. 마치도 기독교 초기 역사에 긴긴 세월을 지하 카타콤베(catacombae)에서 믿음을 지켜 가던 신앙의 선조들처럼 말이다. 그 곳은 박해시대에는 피난소나 예배당으로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원래의 카타콤베는 순교 성인의 이름을 가진 역대의 교황이나 성직자나 기독교도의 묘소였다. 폴리도리에 의하면 “지하 묘지들의 총 연장길이는 대략 900㎞이고, 300년의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무려 6백만 명이 거기에 묻혔다”고 한다. 로마 주변에는 60여 곳의 카타콤베가 남아 있다.
오늘 날, 어른이든 아이든 점점 나태해져만 가는 신앙에서 벗어나서 각 사람의 마음에 살아 있고 운동력 있는 말씀으로 번져 가기를 소원하는 마음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