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
봄은 심고 가꾸는 계절이다. 사계절이 분명한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나라의 자연은 참으로 아름답다. 지구상에는 사철의 구분이 별로 없이 늘 춥기만 하거나 늘 덥기만 한 나라도 많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봄에 심고 여름과 가을을 거치면서 수확하고 추수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어렸을 적에 어른들이 농사하는 것을 늘 지켜보았다. 보리나 마늘은 늦가을에 심고 겨울을 지내고 난 봄과 초여름에 수확한다. 눈이 덮이고 꽁꽁 언 땅에서 겨울을 난 후에 봄에 이삭을 거두고 열매를 거두는 것이 신비하게 여겨졌다.
강화도의 산자락 아래서 살던 우리 집의 어른들은 집 주변의 텃밭에다가 별의 별 채소와 식물들을 심고 가꾸었다. 감자, 고구마, 고추, 오이, 가지, 상추, 근대, 우엉, 토란, 미나리, 쑥갓, 토마토, 서리 태, 강낭콩, 완두콩, 무, 배추, 호박 등등 온 갓 먹을거리들이 넘쳐 났다. 들판에는 보리와 밀과 콩 농사, 논에는 벼농사를 하느라 허리 펼 날이 없었다. ‘여섯시 내 고향’같은 TV 프로그램에 보면 농촌의 할머니들의 허리가 몹시 꼬부라진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곱고 젊은 새댁이 농촌에 시집가서 평생을 논과 밭과 산허리에 엎드려 일만 하다 보니 허리 펴고 살날이 별로 없었다. 그러하다 보니 아예 허리가 굽은 채로 굳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농사해서 아들딸 서울로 보내 공부 가르치고 뒷바라지해서 오늘 날의 대한민국을 건설한 것이다.
지금이야 썰렁한 공간이 되었지만 우리 형제들이 자라나던 때의 시골집은 대가족이었다. 증조할머니와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엄마 아빠와 고모 삼촌 등 밥상을 다섯씩이나 차렸었다. 짐승들도 넘쳐 났다. 소와 돼지와 개와 염소와 닭과 토끼와 오리, 거위 까지 더불어 살아가는 동물 농장이었다. 어렸을 적에는 그런 안채와 바깥채의 시골집이 왜 그렇게 크고 넓게 느껴졌었던지.
지금은 그 시골 마을을 노인들만 남아서 지켜 가고 있다. 젊은이들이 별로 없다. 그 동안 적지 않은 후손들이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시골을 떠나 도시로 향했다. 그러나 요즘은 귀농하고 귀촌하는 이들이 한 가정씩 늘어나면서 우리가 어렸을 적의 시골마을보다 오히려 가구 수가 더 늘어나고 있다. 우리 형제가 자라나던 시골 집 주변에도 최근 몇 해 만에 어려 채의 새 집들이 들어섰다. 예전에 농사하던 텃밭이 집터로 바뀌어 가고 있다. 1907년에 데이밍 선교사와 스크랜턴 선교사에 의해서 시작된 고향교회에 오히려 요즘 교인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도시에서 신앙 생활하던 이들이 그 마을에 자리 잡고 살면서 시골 교회의 한 식구가 되어 가고 있다.
도시 생활은 편리한 혜택이 많지만 시골이 좋다. 공기도 맑고 심신에 안정을 준다. 심고 가꾸기만 하면 무공해의 먹을거리도 넘쳐 난다. 올해 이웃 교회의 텃밭 한 이랑에 채소를 심었다. 상추, 쑥갓, 고추, 오이, 가지 등이 자라나는 것을 보면 사도 바울의 교훈이 생각난다.
몇 주 전에 몇몇 교우들이 나서서 심는 수고를 하였다. 한 동안 가물고 비가 내리지 않아서 염려도 되었다. 그러나 때를 따라서 적당한 비가 내리고 또 내리면서 물을 주어야 하는 염려가 사라졌다. 요즘은 하루가 다르게 얼마나 쑥쑥 잘 자라고 있는지 모른다. 그 첫 열매를 성도들이 함께 식탁에 올릴 것을 생각하니 흐뭇하기 그지없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는 첫 편지에서 심고 물주며 가꾸는 식물의 원리를 언급한 바 있다. 그 당시 베드로와 사도 바울이 위대하였지만 아볼로의 영향력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베드로 파, 바울 파, 아볼로 파 등으로 나뉜 고린도 교회 안에 갈등이 적지 않았다. 그런 정황을 안타깝게 여긴 바울은 이런 편지를 썼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3:6-7)
맞다. 심고 물주는 이의 수고를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사람의 지혜나 힘으로는 그 어떤 식물도 자라나게 할 수 없다. 작은 씨앗이 심겨지고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는 맺는 과정이 모두 다 그 분의 손길 안에 있다.
여호수아 때에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입성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풍성한 혜택과 열매를 먹고 누릴 수 있었다. 사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와 감람나무의 그 엄청난 열매들은 하나님이 저들에게 내려 주신 복이며 은혜였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40살 미만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낳고 자라났다. 그 같은 세월 동안에 가나안 땅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와 감람나무들이 누군가의 손길에 의해서 어딘가에 심기어 지고 자라나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 열매들을 광야에서 요단 강 건너 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족한 열매로 먹도록 공급하셨다.
제주도의 감귤이나 대구 주변의 사과 농사나 팔도에서 심고 가꾸어 온 감자나 고구마 농사도 그 언젠가는 누군가의 손길에 의해서 첫 수확을 하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이 땅에 목화 농사를 시작한 것이 문익점의 역할로 부터인 것처럼 말이다.
심고 물주다 보면 자라나게 되는 것이 식물 재배의 원리이다. 사도 바울은 이 원리를 신앙생활에 접목하고 있다. “심는 이와 물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의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3:8-9)
지난 6월 11일은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파한 감리교 최초의 선교사인 헨리 G.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가 이 세상을 떠난 지 117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1885년, 27살의 젊은 나이에 갓 결혼한 아내와 손을 잡고 제물포에 첫 발을 디딘 그는 44살에 배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인천을 출발하여 목포를 향하던 일본상선 구마가와마루 호에 타고 있었고 1902년 6월 11일 밤 10시경 두 배가 충돌하여 침몰하였다. 충남 서천 앞바다를 지나던 배가 다른 일본상선 기소가와마루호와 충돌하였다. 배의 선장은 세월 호 선장처럼 침몰 직전에 혼자 먼저 탈출해 버렸다. 고등학교 때 수영 선수였던 헨리 아펜젤러는 자신의 한국인 조사 조한규와 목포의 고향집으로 가던 안동여학교 학생을 구하려 하다가 배와 함께 침몰되고 말았다. 양화진 외국인 묘원에는 그의 시신을 못 찾은 빈 묘지에 묘비만이 세워져 있다.
헨리 아펜젤러. 그는 한국 선교 17년만인 44살의 한창 나이에 이 땅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그의 손길에 의해 세워진 인천 내리 교회와 서울 정동 제일교회의 선교 사역과 배재학당의 교육 사역은 오늘 날도 계속되고 있다. 계속하여 자라나는 겨자 나무처럼 무성한 가지가 되어 열방을 향하여 담을 넘어 서고 있다. 그가 이 땅에 도착하여 선교를 펼치던 이년 후인 1887년 4월 23일에 평양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그 날 일기에 이런 기도의 글을 남겼다.
“지금은 씨 뿌릴 시기,
좋은 씨가 싹이 나고 뒷날 풍성한 추수를 할 수 있도록 하옵소서.”
일찍이 아빠를 잃은 그의 큰 아들은 나중에 배재학당의 교장을 지냈고, 큰 딸은 이화 전문학교의 교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