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이여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의사였던 박 에스더(Esther Kim Park, 1877-1910)의 성은 김씨인데 결혼 후에 남편 성을 따라서 서양식으로 성을 바꾼 흔치 않은 주인공이다. 고종 14년이던 1877년에 서울 정동에서 태어난 그녀의 본명은 김점동(金點童)이다.
그녀의 아버지 김홍택은 한국에 복음을 전한 감리교 최초의 선교사인 헨리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의 집에서 일하였다. 그녀는 헨리 아펜젤러 선교사의 소개로 10살 때에 이화학당에 입학하였다. 14살 때에 미국 선교사 프랭클린 올링거(Franklin Ohlinger, 1845-1919)에게서 세례를 받고 에스더(Esther)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이화 학당을 졸업한 그녀는 영어에 능통하였고 그 당시 서양식 병원이던 보구여관(保救女館)에서 통역을 맡게 되었다. 이때 의사이자 이화학당의 교사였던 선교사 로제타 셔우드(Rosetta Sherwood, 1865-1961)의 통역을 맡게 되었다. 그녀는 언청이를 수술을 통해 회복시키는 것을 보며 감동을 받아 장차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로제타 셔우드는 훗날 캐나다 의료선교사 제임스 홀(Hall, William James, M.D, 1860-1894)과 서울에서 결혼 하였다. 박에스더는 제임스 홀 곁에서 그를 돕던 청년 박유산과 16살 때에 결혼 하였다. 결혼 후에 제임스 홀의 가족과 함께 평양으로 가서 조수로 일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서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그 때 그녀의 나이는 19살이었다.
그녀는 미국 기독교 선교 여의사들의 도움을 받으며 4년 만에 졸업하여 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한국 최초의 여의사가 되었다. 목동 이대 부속병원 본관 1층 로비에 들어서면 의사 박에스더의 흉상이 제막되어 있다. 볼티모어의 식당에서 일하며 그녀를 뒷바라지하던 남편은 박에스더가 의사가 되기 일주일 전에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그녀는 23살에 귀국하여 여성전용 병원 보구여관에서 의사로 재직하면서 10개월 동안에 돌아 본 환자의 수가 3,000명을 넘어섰다. 그 후 로제타 셔우드 홀이 평양에 건립한 홀기념병원으로 전근하였다.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의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진료하였다. 그녀는 건강증진을 위해 위생교육을 실시하고 장애자 교육을 위해 맹아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기도 하였다. 또한 제임스 홀 부부와 함께 한국의료 발전과 여성 의료 교육을 위하여 간호학교 설립을 주도하였다. 박에스더는 남편과 같은 병인 폐결핵으로 33살에 주님 품에 안겼다.
누구나 다 그렇지는 않지만 오늘 날 청년들의 어깨에서 패기(覇氣)가 사라지고 청년들의 가슴에서 젊음의 정열(情熱)이 식어져 버린 안타까움을 느낄 때가 없지 않다. 청년들의 취업난이 극심하고 장래에 대한 불확실한 나날로 인하여 청년기의 우울감이 심각한 이 때에 젊은이들을 생각하며 이 글을 쓴다.
앞으로 몇 년이 지나가면 우리나라 80여개 대학이 문을 닫아야 할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대학교 입학 정원의 수보다 고등학교 졸업생 수가 더 적어지는 날이 곧 다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대학 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고 경쟁률도 높았다. 그러나 요즘은 정원 미달인 학과들이 적지 않다. 그렇다고 대학만 졸업한다고 능사는 아니다.
장수 시대에 평생 직업, 평생 기술을 익히지 않으면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기 조차 어려운 시대를 맞고 있다. 그러면 그럴수록 청년들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경제적인 여건에만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실력을 키우고 경쟁력을 키워서 내일의 나를 준비해 나가야만 할 것이다.
오늘 날은 기계화, 산업화, 컴퓨터 화 시대를 뛰어 넘어서서 인공지능(人工知能)인 AI(Artificial Intelligence)의 비약적인 발전을 통해서 각계 각 분야마다 상상을 초월하는 시대를 살아갈 새로운 문이 열리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과학이 발전한다고 해도 인간은 인간이고 청년은 청년이고 인생은 인생이다. 과학의 발전 그 자체가 사람의 역할을 완전히 뛰어 넘는 시대를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역사에서 우리가 기억하는 이름들 중에 구한말의 인물들은 대개 청년들이었다. 서재필, 이승만, 김구, 조만식, 이승훈, 이상재, 안창호, 이준, 전덕기, 신홍식, 주기철, 손정도, 서상륜, 윤치호, 한상설, 지청천, 안중근, 윤봉길, 주시경, 지석영, 이동휘, 윤동주, 한경직 등 저들 모두 국가의 운명과 자신의 앞날을 고뇌하던 청년기가 있었다.
민족의 영원한 누나 유관순(1902-1920)은 청년기를 맞기 전인 18살에 대한민국의 독립을 갈망하며 그의 몸을 불살랐다. 청년기를 귀하게 보내기는 박인덕, 박마리아(1906-1960)도 마찬가지였다.
박마리아의 말년(末年)이야 평가와 해석이 분분하겠지만 그녀의 청년기는 남달랐다. 그녀는 22살에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의 교사로 재직하였다. 이화여자전문학교 시절부터 공창(公娼) 제도의 폐지와 금주와 금연 등의 사회운동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그 후 미국 유학을 거쳐 26살에 테네시주 스카릿대학을 졸업한 후에 피바디 사범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윤리학을 가르쳤다.
29살 때에 이기붕과 결혼하였고 기독교여자청년회(YWCA) 총무로 10년간 활동하였다. 광복 후 남편이 이승만 대통령의 비서로 정계에 진출하는 일을 도왔고 중국 항저우(杭州)에서 열린 세계 YWCA 대회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그밖에 대한걸스카우트연맹과 대한부인회 등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48살에 이화여자대학교 영문학과 과장을 거쳐 문리대학 학장 및 부총장을 맡기도 하였다. 그녀는 모교인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도 받았다.
성경 이야기를 좀 하자. 창세기의 요셉은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애굽의 노예 시장으로 팔려 갈 때의 나이가 17살이었다. 그는 13년의 노예 생활을 끝으로 30살에 바로 왕의 주목을 받는 애굽의 총리에 등극하였다. 청년 요셉은 하나님이 늘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여호수아는 노예 생활을 해야만 했던 청년의 때에 애굽에서 모세를 만났고 출애굽한 이후 사십년을 모세의 곁에서 그림자처럼 그를 따르며 광야에서 하나님을 섬기던 중에 가나안 입성의 선봉장이 되었다.
우리가 아는 다니엘도 청년이었고 바사 즉 페르시아의 최고의 왕 아하수에르의 왕비에 간택된 에스더는 일찍이 부모를 잃고 외롭게 성장한 십대의 소녀였다. 블레셋의 골리앗을 죽인 후에 사울 임금의 주목을 받을 때의 다윗은 십대 소년이었다. 솔로몬이 왕위에 오를 때의 나이는 20살이었다. 선지자 이사야도 청년의 때에 하나님의 성전에서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임재와 부르심을 받았다.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사도 바울도 청년의 때에 이미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유대교의 중심인물로 자리 잡았던 탁월한 바리새인이요 율법학자였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청년이여.....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그리하라.”(전11:9-12: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외치며 예수 그리스도의 오시는 길을 예비하던 세례 요한도 청년의 때에 목 베임을 받아 불의한 헤롯의 칼에 죽임을 당하였고 예수도 청년의 때에 십자가에 달려 대속(代贖)의 위업을 완성하였다.
청년이여. 청년의 때를 귀히 여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