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어디서나 기도할 자유
미국은 기독교 정신으로 출발한 나라이다. 물론 오늘날의 미국은 세계 열방에서 미국 안으로 흘려 들어간 다양한 종교 배경을 가진 이들이 뒤섞여 살아간다. 그러나 미국을 떠받치고 있는 힘은 역시 기독교 신앙에서 나온다. 미국은 1962년 이후 공립학교에서의 기도 활동을 금지해 왔다. 그 후 우여곡절이 계속되어왔다. 그러던 중에 2020년 1월 16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종교 자유의 날’을 맞아 공립학교 안에서 기도의 자유를 보호하고 보장할 것을 약속하는 새로운 지침을 발표하였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기도할 권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자신의 의사도 밝혔다.
미국과 기독교의 역사를 알려면 청교도의 뿌리를 거슬러 관찰해보아야 한다.‘청교도’(淸敎徒, Puritan)란 영국의 종교개혁자들과 그의 후예들을 말한다. 저들은 도덕적인 순수성을 추구하여 낭비와 사치를 배격하고 근면을 강조하며 영국의 중산층을 형성하였다. 또한 신학적으로는 인위적 권위와 전통을 인정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성경 말씀을 철저히 믿고 따르는 전통 복음주의 입장을 취하여 왔다. 청교도들은 영국종교개혁 완성의 주역들이었다. 영국의 종교개혁은 1534년, 헨리 8세(Henry VIII, 1491-1547, 재위 1509-1547)가 개인적이며 정치적인 이유로 영국 교회의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결별을 선언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534년의‘수장령’(首長令, Acts of Supremacy)에 따라 영국은 국왕을 최고 우두머리로 하는 독립교회가 되었다. 이것이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이다. 영국에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으나 국교회 내에는 여전히 천주교의 교리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만족을 얻지 못하고 철저하고 완전한 종교개혁을 이루기 위하여 등장한 이들이 청교도들이다.
청교도 교회 개혁은 더욱 발전하여 엘리자베스(Elizabeth I, 1533-1603) 여왕이 다스리던 1560년대에는 조직화 되었다. 영국 국교회 내에서의 청교도운동은 1662년대 추방령으로 종식되었다. 그 후 1688년에 명예혁명이 일어나자 청교도들에게 설교하고 독립교회를 세울 수 있는 권리가 다시 주어졌다. 이처럼 청교도는 한 세기 반가량 영국에서 진행된 개신교 종교개혁운동의 중심세력이었다. 청교도 운동은 그들의 정신과 사상을 이어받은 그의 후예들에 의해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청교도라는 말이 최초로 사용된 시기는 1564년으로 추정된다. 이 이름은 처음에 영국 국교회에 비타협적인 개신교도들을 내리깎는 경멸조의 적개심이 가득한 호칭이었다. “까탈스러운 사람들, 비판적이고 고집불통인 사람들, 국교에 반대하는 비판적이고 기만적이고 위선적인 작당들이라”는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이 처음에는 경멸조의 이름이었지만 나중에는 점점 영광스러운 표현이 되었듯이 청교도들이라는 표현도 얼마 후에 일반적인 용어로 사용되었고 그 이후의 세대에게는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이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캐나다 리전트 신학교 역사 신학 교수이며 성공회 사제인 제임스 패커(J. I. Packer, 1926-)는 청교도들에 대한 특징을 다음의 일곱까지로 정리하였다.
그들은 성숙한 기독교인의 모델이다.
그들은 신학적 통합성을 추구한다.
그들은 영적 표현의 질이 뛰어나다.
그들은 효율적 행위에의 열정을 가진다.
그들은 가정생활의 안정을 도모한다.
그들은 인간의 가치에 대한 지각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교회 갱신의 이상을 추구한다.
이처럼 우리가 청교도들을 알게 되면 참된 성도의 삶을 배우게 될 것이다.
청교도들은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의 고정된 기도서를 거절하고 스스로 기도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주일은 물론 일주일 내내 개인 기도와 가족기도 생활을 원했다. 청교도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낙스(John Knox, 1513-1572)가 기도의 사람이었듯이 청교도들은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특히 청교도들은“경건한 생활을 위해서 많은 시간을 기도로 보내야 하며 기도의 의무 실천을 계속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가르쳐 왔다. 이러한 그들의 기도에 대한 의무는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엄숙한 이해와 우리 자신의 무가치함과 필요한 것들과 죄에 대한 깊은 의식과 통회하며 감사하는 열띤 마음을 가지고 이해, 믿음, 성실, 사랑과 인내로써 하나님을 바라며, 그의 뜻에 겸손히 복종함으로 기도해야 할 것이다.” 이는 제 185문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나”에 대한 대답이며 가르침이다. 제186문의 질문은“하나님께서는 기도의 의무에 관한 우리의 지침으로 어떠한 규칙을 주셨는가”이며 그 대답은 “하나님의 말씀 전체가 기도의 의무에 관한 지침으로 사용되지만, 특별한 기도 법칙은 우리 구주 그리스도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의 양식인데 곧 주기도문이다.”이다.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1620년 9월 16일에 메이플라워호에 올라 영국 플리머스를 떠났다. 배에 탄 102명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첫 항해를 시작했다. 그들은 66일간의 어렵고 위험한 항해 끝에 1620년 11월 21일에 보스턴 남부의 프로빈스 항구에 도착하게 됐다. 그러나 인디언의 반대와 방해로 상륙이 지연되면서 추위와 배고픔과 괴혈병으로 그들의 절반이 죽었다. 그 고생스러웠던 첫해 겨울 초대 총독 존 카버(John Carver)도 사망했다. 그의 후계자 윌리엄 브래드퍼드(William Bradford, 1590-1657)는 외교관 출신인데 총독을 계승하여 30년 동안 일했다. 윌리엄 브래드퍼드는 그 당시의 심경을 "우리는 이곳에 우리를 오게 하시고 아름다운 항구와 평화로운 땅에 정착하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 무릎을 끓고 기도했다.”청교도들은 영국에서 가져간 여러 가지 씨앗들을 심었고 콩과 옥수수의 씨앗은 인디언들로부터 구하여 심었다. 그들은 첫 수확을 거둔 그해 가을에 인디언을 초청해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것이 곧 추수감사절의 시초가 됐다.
그 후 청교도들은 매년 이주자들이 늘었고 1630년에는 1,000여 명의 청교도 이민자들이 도착하게 되었다. 그들이 오늘의 보스턴을 건설했고 존 하버드(John Harvard, 1607- 1638) 목사의 이름을 딴 하버드 대학도 그 당시에 문을 열었다. 그는 영국에서 출생하여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신학 학사와 석사 과정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다. 젊은 시절에 영국에서 교장을 지낸 후 미국으로 건너가 찰스턴에 있는 교회의 부목사로 섬겼다. 그러나 그가 31살에 죽은 후 그의 뜻을 받들어서 장서와 재산의 반을 뉴타운의 신설 대학에 기부하였다. 그 후 이 대학은 그의 이름을 따서 ‘하버드 대학교’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그즈음에 10년 동안 18,000명 이상이 이주하는 대 이민의 역사가 진행되었다. 저들은 청교도 헌장을 통해서 청교도 이주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선을 위함이다.”라고 정의하였다.
오늘날의 미국을 대신할 만한 나라는 없다. 물론 미국은 총기 소지, 살인, 마약, 동성애, 인종 차별 등의 골칫거리가 여전히 많은 나라이지만 세계 속에 미국의 영향력을 대신할 수 있는 나라는 없다. 그 깊숙한 저변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기도의 사람들이 자리 잡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33장 3절에서
이렇게 약속해 주셨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