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큰 두려움
이 세상에 두려움의 감정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두려운 일이 생기면 한 나라의 왕이나 백만 명의 군대를 거느린 장수라도 두렵기는 마찬가지다. 수억 명으로부터 인기를 누리는 연예계의 스타라도 두렵고, 세계적인 기업가라도 두려운 일 앞에서는 두렵게 마련이다. 두려움이란 기쁨이나 즐거움이나 슬픔이나 근심을 느끼고 표현하는 것처럼 또 다른 하나의 감정의 세계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칠정(七情)은 “기쁨, 노여움, 근심, 두려움, 사랑, 미움, 욕심”이다. 중국 사람들은 <예기>(禮記)의 ‘예운편’(禮運篇)에서 비롯하였다는 “기뻐하는 것(喜), 성내는 것(怒), 근심하는 것(憂), 생각하는 것(思), 슬퍼하는 것(悲), 놀라는 것(驚), 겁내는 것(恐)”을 일곱 가지 감정의 표현으로 구분하여왔다.
이와 같은 감정의 다양한 경험은 동서고금에 그 누구라도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경제 대 공황으로 어려움을 겪던 1930년대의 미국 대통령은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1945)였다. 그는 “우리가 두려워하여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이다. 막연하고 이유도 없고 정당하지 않은 두려움은 후퇴를 전진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을 마비시킨다.”라는 말을 남겼다.
루스벨트는 19세기 말에 미국 뉴욕에서 부유한 명문가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사라는 아들에게 큰 기대를 가지고 엄격하게 키우기 위해서 교육에 열정을 기울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거의 해마다 유럽을 드나들며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배우고, 승마, 사냥, 조정, 골프 등 상류사회의 어른들이 즐기는 각종 취미 생활을 혜택으로 누리며 컸다.
그는 사교육을 받으며 귀공자로 자라났다. 14살 때 입학한 그라턴 기숙학교에서 교장이며 목사였던 엔디코트 피바디에게 영향을 받아 기독교 박애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하버드대학을 거쳐서 컬럼비아 대학원의 법대에서 공부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그는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명망있는 법률회사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뉴욕주 상원의원에 당선되고 재선의 기회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이 제 28대 대통령이 되는데 일조한 공로가 인정되어 해군차관의 보직을 받고 7년간 근무하였다.
1921년, 39살이던 그에게 두렵고 힘겨운 불행이 찾아 왔다. 그해 여름에 캐나다의 휴양지인 캠포벨로 섬에서 휴가를 보내는 도중에 갑자기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 그에게 찾아온 것은 소아마비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말초신경계에 급성 다발성 신경증상을 일으키는 ‘길랑바레 증후군’(Guillan Barre syndrome)으로 인해서 걷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후대의 의학이 설명하고 있다. 그는 남다른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도 꾸준히 재활하는 의지를 보였다. 그는 그 이후로 평생 휠체어에 몸을 의존하여야 했지만 연약해진 자신의 불편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떳떳하게 정계에 진출하였다.
두 발로 일어나 걸을 수 없는 운명이 된 그는 그런 신체 여건으로 뉴욕 주지사 선거에 당선되었고 지지자들의 큰 후원 가운데 재선에도 성공하였다. 그는 미국 최고의 주지사라는 평가를 받으며 마침내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그의 나이 50살이던 1932년에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상대 후보였던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를 누르고 제 31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재선에도 성공한 그는 미국 경제를 살리고자 뉴딜(New Deal)정책을 시행하였다. 뉴딜 정책은 구제(Relief), 부흥(Recovery), 개혁(Reform)의 이른바 ‘3R 정책’을 강령으로 한 7개년 계획이었다. 그는 독일 히틀러의 등장, 제 2차 세계 대전, 1941년 12월 7일의 일본에 의한 미국 진주만 공격, 미국 안에 몰아친 경제 대공황 등의 난제들 가운데서도 감히 4선에 성공한 미국 역사상 유일한 대통령이었다.
그렇지 않나. 어른이든 어린아이이든 두려움이 없이 살아가는 이는 아무도 없다. 문제는 그 두려운 상황이나 사건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며 살아가느냐는 것은 개인의 선택의 문제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는 “역사란 도전에 대한 응전의 연속이라.”고 정의 하였다. 그렇다. 개인이든 국가이든 다 마찬가지이다. 천재지변의 우여곡절을 딛고 인간은 문명을 발전시켜 온 것이 사실이다.
광야 40년의 선봉에 섰던 지도자 모세가 죽자 백성들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광야 생활 내내 모세의 곁에서 그림자처럼 모세를 수종 들었던 여호수아를 모세의 대를 잇는 지도자로 선택하셨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씀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왜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가져야 할까. 기(杞)나라의 어떤 사람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까봐 걱정을 하다가 급기야는 식음을 전폐하고 드러누웠다는 얘기에서 유래한 말이 기우(杞憂)라고 하지 않나. 금방이라도 코로나 19에 감염되어 죽을 것같은 두려움과 공포와 염려와 불안에 휩싸여 예배 생활이 다 무너져 가는 이러한 때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모세나 여호수아와 갈렙, 기드온, 사무엘, 다윗 등은 두려움과 염려와 불안을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담대함으로 극복하며 살아간 신앙의 거장들이다.
온 나라와 열방이 코로나 19의 감염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여 있다. 사람 많은 곳을 피하려는 불안 심리는 다 같이 함께 교회에 모여서 예배드리던 예배 생활조차 마비시키고 있다. 바이러스의 감염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일상적인 삶을 결박하고 나라와 세계의 각 분야의 경제생활을 공황 상태로 몰아가고 있다.
이즈음에서 뇌리에 선명하게 정리되는 생각이 있다. 성경에 근거한 기독교 복음의 바탕은 영생과 영벌이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로 이 땅에 보내셨다. 예수를 생명의 구주로 영접하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영원한 심판이 따른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1:12)고 했다.
천국과 지옥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와서 계신 동안에 누누이 강조한 영적 실존의 세계이다. 예수는 그 곳에서 이 땅에 왔다가 부활 승천하여 다시 아버지의 곁으로 가신 것이다. 우리는 이천 년 전에 베들레헴에 탄생한 예수의 탄생만 믿고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나 부활과 승천을 믿지 못한다면 그건 건강한 믿음이 아니다.
예수의 비유 중에 소개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내용이 무엇인가. 예수는 그 비유에서 천국과 지옥을 너무나 선명하게 그림처럼 설명해 주셨다. 요즘 코로나 19의 감염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인 한국 교회와 성도들과 국민의 모습을 보면서 떠오르는 생각이 이것이다. 우리가 영생의 상급과 영벌의 심판을 믿는다면 예수를 생명의 구주로 영접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나 반드시 믿고 깨닫고 따라야만 하는 은혜의 부르심이 아닌가. 나중에 다메섹 체험을 통해서 이 진리를 깨달은 사도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고 권면하였다.
육체의 죽음만 두려워하지 말고 지옥의 영벌에 처해지는 심판을 더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온 열방의 각 민족들이 이 세상 목숨만 귀히 여기지 말고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나서 영생의 길을 걸어가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누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