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 선교 126년의 새해가 밝아온 신년 주일 아침에 경악을 금치 못할 참담한 사건이 벌어졌다. 1977년 8월의 어느 수요일저녁 기도회에 모인 11명의 신도들과 더불어 시작된 소망교회는 교파를 초월한 한국교회의 상징적인 교회로 부흥했고 세계 교회사의 중심에 설만한 교회로 발전해 왔다. 장로인 현직 대통령께서 출석하는 교회로 알려지면서 세간에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오늘 날 재적 성도만도 7만여 명이라고 한다. 주일이면 다섯 번의 예배와 저녁 예배를 포함하여 여섯 번의 예배 시간마다 모여 드는 성도들로 넘쳐 나는 교회다. 그런 교회의 신년 첫 주일 아침 제 1부 예배를 마치고 다음 예배를 준비하던 담임 목사가 그의 곁에서 동역하였던 두 부 목사에 의하여 폭행을 당하고 말았다. 그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은 육십 대 초반의 여성 목사였다. 담임 목사는 눈 주위의 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현장에서 병원으로 실려 가고 말았다. 양쪽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물론 사연이야 있겠지만 어찌 이런 세상이 되어 가고 있을까 한탄스럽기 그지없다. 물론 목사도 사람이다. 목사도 죄인이다. 이 세상에 의인은 없다. 로마서 3장 10절에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했고, 23절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했다. 그러나 성도는 달라야 하고 목사는 달라야 하는 것이 아닌가. 죄와 악의 뿌리는 이미 아담에게서부터 있었고 그의 가정사에서부터 전개되었다. 하나님이 친히 창조하신 아담과 하와가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범죄와 타락이 들어 왔다. 아담이 낳은 첫 아들 가인은 동생 아벨과 함께 하나님께 제사 드린 후에 못마땅한 자기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동생 아벨을 쳐 죽였다. 창세기 4장에 나오는 이야기다. 가인은 농사꾼이었고 아벨은 양치기였다. 세월이 지난 후에 저들은 각기 자신이 농사한 것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드렸다. 어찌된 연고인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 이는 하나님과 가인과의 관계이건만 그 후유증은 동생인 아벨에게로 옮겨갔다. 제사 후에 가인은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해 있었다. 가인의 불안정한 심경의 변화를 아신 하나님이 가인에게 말을 건네셨다. “가인아!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됨이냐” 하나님은 가인에게 두 가지 점을 지적하셨다. 가인이 화를 내고 안색이 변했다는 것이다. 가인의 이 같은 불만과 분노와 질투심은 더 큰 범죄로 이어졌고 결국 동생 아벨을 쳐 죽이는 사건으로까지 이어졌다. 한 인간이 죄로 인하여 망하는 것은 회개의 기회가 없거나 하나님의 긍휼이 없으셔서가 아니다. 결국은 교만하고 강퍅하고 남을 무시하거나 깔보는 마음이 스스로 멸망과 화를 자초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심리적인 안정을 갖지 못하고 있던 가인을 향하여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고 권면해 주셨다. 그러나 그 같은 하나님의 설교 말씀을 듣고도 가인은 들판에서 만난 동생 아벨을 쳐 죽이고 말았다.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밤낮 예배드리고 밤낮 기도하고 밤낮 설교 듣고 밤낮 성경 공부하고 성경을 읽으며 살아도 자기 범죄에 빠지는 순간에 보면 도대체가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모습이란 찾아 볼 수가 없다. 하나님은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안색이 변하여 씩씩대고 있는 가인에게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구체적으로 권면해 주셨다. 그런데도 범죄하고 만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하나님께 제사 드린 후에 이런 사건이 일어났다. 창세기 4장에 나오는 말씀 중에 하나님이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라는 말씀은 “응시하다, 주목하다.”라는 뜻이다. 이를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의 문제로 해석해 놓았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히11:4)라고 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의 차이는 제물의 내용이 아니라 제사 드리는 자신의 믿음의 차이였다는 것이다. 아벨이 드린 제사는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과 자비와 도우심을 바라는 겸허한 심정으로 정성껏 제물을 골라 믿음으로 바친 것이다. 그러나 가인은 제사에 실패하고 말았다. 가인은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겸허한 믿음이 없이 제사하려 한 것이다.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예배학 책에 보면 “예배의 성공이 인생의 성공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 이는 진리다. 성경의 역사와 기독교 이천년 역사에 하나님께 존귀하게 쓰임 받은 주인공들은 한 결 같이 예배의 성공자들이다. 예배에 성공했다는 말이 무엇인가? 요즘처럼 “예배 보러가자”고 말하는 시대에 예배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러 가자. 예배를 드리자.”는 경건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그 두 부목사가 직업인으로서의 목사가 아니라 죄에서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주님의 몸 된 성전을 섬기고 성도들을 섬기는 사역자로서의 부르심과 소명이 분명했다면 그 같은 범죄에 연루되어 사탄마귀의 부림을 받는 악을 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목사 전도사 장로 권사 집사가 되기 전에 성도다운 성도가 되어야 한다. 거듭나야 한다는 말이다. 거듭나지도 못하고 직분을 받고 사역을 하니 깡패나 하는 짓을 하는 것이다. 제임스 케네디 목사는 <나는 왜 믿는가?>(Why I Believe)라는 그의 책에서 여러 가지의 기독교 기본 진리를 묵상하면서 ‘거듭남’에 대하여 강조한다. 그렇다. 목사에게 폭력이 웬 말인가! 성도다운 성도, 목사다운 목사여야 하지 않겠는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그럴 수는 없다. 하나님을 모르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의 복음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라면 언제라도 그럴 수 있다. 로마서 1장 28절 이하에 보면 거듭 나기 이전의 죄인의 모습을 언급한다.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 비방, 미움, 능욕, 교만, 자랑, 악한 의도, 부모거역, 우매, 배약, 무정, 무자비”등이 그것이다. 나 또한 그러한 교회 현장에서 싸우지 않고 다투지 않고 주를 섬겨 보려고 광야로 나선지 어언 두 해가 바뀌어 가고 있다. 이런 외로운 개척 수도자의 목회 길에 동참하려 하여 곁에 함께하는 성도들의 모습이 아름답고 새벽마다 지하 기도처에 몰려드는 어른과 어린이들의 모습이 가슴 찡하게 다가온다. 곤하게 잠이 든 어린 아이들을 안고 없고 어둡고 추운 새벽 기도처를 향하는 우리의 새벽 순례가 금향로에 담긴 기도가 되고 간구가 되기를 소원하는 마음 간절하다. 예수님은 헤롯 임금이 살던 화려한 왕궁에 오지 아니하시고 말의 배설물 냄새가 코를 찌르는 베들레헴의 마구간에 오셨다가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그리고 영원한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 놓으신 사랑의 주심이시다.
주여!
부끄럽고 민망한 마음으로 기도하오니
우리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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