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일 2부 예배가 끝난 후에 교회 학교의 어린 남학생이 내게 다가 와서 인사를 하면서 물었다. “목사님! 지옥은 땅 속에 있는 건가요.” 마침 예배 후에 교우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며 예배실을 나서는 시간이라 친교실에서 만나서 이야기 해 줄테니 내 곁으로 찾아오라고 약속하고 나중에 친교실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린이들이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궁금해 하는 것처럼 어른들도 사실은 마찬가지다. 지옥은 구원 받지 못한 이들이 심판 이후에 영원한 형벌의 처소로 머무는 곳이다. 지옥은 회개하지 않은 죄인이 죽음 후에 가는 곳이다. 예수님은 “형제에 대하여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2)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여기서 예수님이 인용하신 지옥이란 곳은 히브리어 ‘게힌놈’에서 온 말인데 이교도들이 자기의 어린 아이들을 불에 태워서 자신들이 믿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힌놈의 골짜기에서 비롯된 말이다.(왕하23:10, 대하 28:3) 한편 성경은 지옥을 영원한 불(마18:8-9), 꺼지지 않는 불(마3:12), 고난의 장소(계14:10), 바깥 어두운 곳(마8:12)등으로 설명해 주었다. 또한 지옥의 형벌은 항상 천국의 영생과 대조되는 내용으로 설명되고는 한다.(마25:46) 창세기에 보면 총애하고 편애하던 아들 요셉이 들판에서 맹수에게 뜯겨 죽음을 당했다는 비보를 들은 아버지 야곱이 탄식하며 한 말 중에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창37:35)고 통곡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야곱이 언급한 ‘스올’이란 곳이 지옥이다. 야곱이 말한 곳은 무덤이요 땅 밑이요 구멍이요 지옥의 상징과 같은 곳이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 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지옥에 대한 표현이 ‘음부’다. 예수님은 지옥에 떨어진 부자는 그 곳에서 고통을 당하며 죽지도 못하고 심판 가운데 살아남아 있는 모습을 설명해 주셨다. 그렇다. 지옥의 특징은 영원히 고통이 계속되는 곳이다. 뿐만 아니라 천국으로 갈 수도 없고 천국의 은총과 혜택을 공유할 수도 없는 끝없는 심판의 처소이다. 이처럼 천국과 지옥에 관한 내용은 성경의 매우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이다. 간단히 말하면 천국이 아닌 곳이 지옥이다. 그러면 천국은 어디이며 천국의 백성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마태복음 4장 17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선포하셨다. 예수님보다 앞서 온 세례 요한이 선포한 내용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였다. 마태복음 6장 9절의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가운데 보면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곳이 천국이다. 사도행전 1장 10절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그 곳이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이다. 마태복음 18장 10절과 26장 53절에 보면 수많은 천사들이 머무는 곳도 천국이다. 창세기 5장 24절의 에녹과 열왕기하 2장 11절의 엘리야와 마태복음 17장 3절의 모세가 영원히 살아가는 그 곳이 바로 천국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살다가 죽은 모든 사람들이 영생하는 곳이 천국이다. 그러면 지옥이란 어디인가. 교회학교 어린이의 질문처럼 지옥은 땅 속에 있는 것인가. 지옥은 천지만물의 창조자요 주관자요 섭리자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는 곳이다. 그 곳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 한 개인의 마음속일 수도 있고 그러한 민족이나 가정이나 부족(部族)일 수도 있다. 오늘 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 지금 우리 주변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죄와 사망에서 인생을 구원하는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는 그 사람의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 천국이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개인의 마음속이 지옥이다.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하셨다.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자들이 천국의 백성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 이들의 앞에 열려져 있는 문이 지옥의 문인 것이다. 요한 계시록 21장 8절에 보면 지옥을 향할 자들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또한 요한계시록 21장 10절에 보면, 미혹하는 마귀와 짐승과 거짓선지자들도 불과 유황 못에 던져져서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는 지옥의 심판에 대하여 경고해 주고 있다. 천국이 그러한 것처럼 지옥 또한 인간이 육체의 죽음 이후에 경험하게 될 미래의 세계이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자기 신앙이나 영적 경험을 쓴 책들이나 이야기들은 너무나도 많다. 그 중의 하나가 이마누엘 스베덴보리의 <천국과 지옥>이다. 그는 스웨덴을 대표하는 유명한 영성신학자중의 한 사람이었다. 천국이 실재하듯이 지옥도 실재하는 곳이다. 이런 믿음을 갖는 것이 신앙의 출발이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아휴우 지옥 같애.”하는 탄식을 하는 이들을 본다. 사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도 천국 같은 일상도 있고 지옥 같은 참담한 날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생의 체험일 뿐 영원한 천국의 축복이나 영원히 끝이 나지 않을 지옥의 심판과 비교할 것이 못된다. 천국이란 지금 현재로부터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영역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들어서는 삶을 일컫는 것이다. 반대로 지옥이란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를 인정하지 않고 제 고집과 제 멋대로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부터 이어지는 나중 심판이다. 이처럼 천국과 지옥은 단지 이념적이고 사색적이거나 윤리적이고 정신적인 세계 그 이상의 문제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천국은 부분적으로 실현되었다. 고난 후에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천국을 향한 궁극적인 완성이 될 것이다. 예수님이 갈릴리에 오신 것이 서서히 이루어져 가는 천국의 시작이라면 예수님의 재림의 때는 홀연히 임할 천국이 완성되는 때이다. 그러므로 천국과 지옥의 문제는 모든 종교에 넓게 문이 열려진 단순한 나중 혜택이나 심판의 처소가 아니다. 이는 상급과 심판을 다루시는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하나님의 고유 영역이다. 그러므로 천국을 타종교와의 너그러운 대화로 미화하거나 지옥을 인본적인 용서와 화해의 기준으로 희석시켜서도 안 된다. 현재 깨닫고 경험하는 천국 체험이 없이는 나중의 천국도 보증되지 않는다. 반면에 현재 천국을 부인한 상태의 삶에서 막연히 나중 천국을 소망하는 거짓이나 자기기만에 빠져서도 안 된다. 현제의 천국 없이는 나중의 천국도 없으며 지금의 지옥이 나중의 천국으로 변화될 수도 있다는 막연한 기대도 버려야 한다. 단테의 대표작 <신곡>의 지옥 편은 부활절 이틀 전인 성 금요일을 하루 앞둔 목요일 밤에 잠에서 깨어나 어두운 숲에서 길을 잃고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한 서른다섯 살의 단테 자신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세상의 온갖 악을 대면하고 두려움에 떨던 단테 앞에 그가 존경하던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나타나 영원의 세계로 안내할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을 약속한다. 그리고 금요일 저녁 그들은 마침내 지옥의 문 앞에 당도하고, 죽음 이후의 세계를 향한 일주일간의 순례가 시작된다. 그가 묘사하는 지옥의 문에는 “희망을 버리는 자 이 문으로 들어가라”고 쓰여 있다. 지옥의 입구는 천국을 심각하게 생각하게 하는 곳이다. “지옥은 땅 속에 있는 건가요.”라는 어린이의 질문처럼 스스로에게 물어 보자. “천국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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