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는 하되 잊지는 마라” 이 말은 이스라엘 야드바쉠 독립기념관 지하에 있는 꺼지지 않는 불 앞에 쓰여 있는 글귀로 유명하다. 이는 600만 명의 유대인의 목숨을 무참하게 앗아간 독일의 히틀러의 폭정에 대한 유대인들의 역사관에 기인한 표현이다. 인간에게는 기억력과 함께 망각하는 기능도 있다. 기억 상실이나 정도가 지나친 망각은 질병의 차원에서 다루어야 하지만 정상인에게 있어서 기억력이란 기능은 축복의 시작이다. 물론 잊고 살아야 하고, 잊고 싶은 기억이 있는데도 자꾸만 기억이 되 살아난다면 좋을 것은 없다. 그 기억이 마음에 상처로 남은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구태여 심리학적으로 좀 더 깊이 있는 예를 들지 않더라도 말이다.
한 해가 기울어 가고 있다. 올 한해를 지내 오면서 나의 기억 상자에는 어떤 기억들이 입력되어 있는가를 생각해 보라.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좋은 기억을 계속하기를 원하신다. 그 바탕은 언약에 근거한다. 하나님의 언약을 제대로 지키면 복이 되지만 그 언약을 어기면 화를 피할 수 없게 되고 만다. 그래서 하나님은 히브리서 9장 10절에서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과 마음에서 잊지 않고 기억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기대하신다. 그러나 인간의 죄와 악은 종종 하나님을 떠났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와 규례와 계명의 말씀을 통해서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히9:10)는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이미 죄를 범한 인간의 편에서 종종 그 언약을 어기고 벗어나고 말았다. 이것이 인간의 반복되는 죄의 역사이다.
성경에는 ‘기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이 적지 않다. 물론 그 반대로 하나님은 인간이 지은 죄를 용서하시되 기억조차 하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히브리서 8장 12절에 보면,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고 했다. 이사야 43장 25절의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에 근거한 것이다. 그렇다. 물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시다. 회개하는 인간의 죄와 악과 허물을 잊어 주시고 기억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잊어 주시는 성품 보다는 기억해 주시는 모습에 관한 긍정적인 언급이 훨씬 더 많다. 그 첫 말씀이 창세기 9장에 나오는 무지개 언약이다. “내가 나와 너희와 및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창9:15) 무지개는 하나님이 언약하신 영원한 증거다.(창9:16) 하나님도 인간과의 사이에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심으로 하나님 되심을 증거 하신다. 또한 인간의 편에서도 하나님이 인간의 선한 행실을 기억해 주시기를 바라는 소원이 있어 왔다.
애굽에 끌려가 노예로 살아가던 히브리 백성들의 탄식 소리를 들으신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세운 언약을 기억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보셨고 그들을 기억하셨다.(출2:24-25)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를 대적하고 훼방하던 아말렉을 쳐서 무찌르게 하신 후에 모세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하게 하리라.”(출17:14) 하나님은 언약을 기억하는 유대 백성들을 언약 공동체로 다듬어 가기 위하여 스스로 언약을 기억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민수기에 보면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준행하라는 강조가 반복된다.(민15:39-40) 신명기 전체의 분명한 바탕은 하나님이 지난 날 애굽과 광야에서 행하신 그 모든 행적들을 기억하라는 말씀으로 가득하다. 그래야 교만하거나 거만하고 어리석게 행동하지 않고 겸손한 민족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사사 시대의 불행은 무엇인가. 사사기 8장 34절에 그 대답이 있다. “이스라엘 자손이 주위의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 자기들을 건져내신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아니하며”라고 했다.
그렇다. 오늘 날 우리나라의 국가적인 문제, 사회적인 문제, 심지어는 기독교의 문제, 감리교단의 문제, 개 교회와 가정과 개인의 문제의 발단이 어디에서부터 기인하는가. ‘하나님을 기억하지 아니하는’ 죄를 반복하여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본디오 빌라도와 같은 권력자와 안나스와 가야바와 같은 역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그 당시의 장로들이 앞장서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아다가 처참하게 고문하고 예루살렘 영문 밖으로 끌고 나간 것이다. 그리고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나무 십자가의 두 강도 사이에다가 무죄하신 예수를 매어 달아 죽였다. 오늘 날 한국 교회가 무슨 연합회니 무슨 총회니 하는 기구의 조직을 빙자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처참하게 십자가에 매어 달아 죽이고 있다. 이미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과 성령의 역사를 깡그리 대적한 채로 재리(財利)에 눈이 먼 21세기 판 가롯 유다를 앞장세우고 “대 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마26:47)와서 불의한 연합을 계속하고 있다. 예수를 다시 팔고, 교회와 교권을 팔아먹는 이들이 군호를 짜서 예수께 입 맞추며 더럽고 비겁한 추행을 계속하고 있다. 저들은 본심을 위장한 묘한 미소를 지으며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마26:49)하고 인사를 건네며 각본대로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를 계속하고 있다. 오늘 날 자칭 베드로 행세를 하는 이들이 혈기를 부리며 칼을 뽑아 들고 한 사람 쯤의 귀를 잘라 내는 칼부림을 해 보지만 역사는 그것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이미 기울어 가는 역사의 한 장면을 예견하신 예수는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26:52)는 책망으로 지난 삼년간을 그림자처럼 예수의 곁에 머물던 베드로의 어리석은 행동을 꾸짖으셨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예수로부터 가장 인정받던 세 제자들 중의 하나였다. 그는 결국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하고 도망가고 말았다. 그 후에 예수는 붙잡혀 끌려갔고 옷 벗김을 당하고 가시관이 씌워졌고 무릎 꿇으며 희롱하는 군병들이 침을 뱉고 오른 손에 들렸던 갈대를 빼앗아 예수의 머리를 내리치며 온갖 조롱을 계속했다. 나중에는 입혔던 홍포를 다시 벗겨 내고 예수의 땀내 나는 제 옷을 다시 입혀서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갔다.
요즘 한국 교회와 지난 반세기를 풍미하던 기독교의 꽤나 유명했던 지도자들이 세상 언론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고 조롱을 당하고 있다. 예수 떠난 교회와 복음에서 멀어져서 종교화되고 교권화된 기독교와 교단의 지도자들이 온갖 수치와 부끄러움을 다 당하고 있다. 볼 기회도 없이 가을이 깊어 가고 있지만 ‘도가니’라는 영화를 통해서까지 기독교의 그늘진 면이 세상에 샅샅이 그 치부를 다 내 보이고 있다. 하나님은 신명기 32장 7절에서 “옛날을 기억하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 옛날이 언제인가. 탄식하고 고통하며 부르짖던 애굽의 노예생활 현장에서 저들을 광야로 인도하여 마실 물과 먹을 만나와 허기를 해결할 메추라기를 주신 분이 누구신가. 선교 초기의 순교자들이 흘린 피를 잊은 채로 일제의 식민지와 6. 25 전쟁을 겪으며 부끄러움을 당하던 때가 지나간 지 과연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흘렀단 말인가. 언제부터 한국 교회가 이렇게 배불러졌고 자칭 지도자라고 하는 이들이 자색(紫色) 옷에 혈안이 되어 있는가. 이제라도 옷을 찢듯 마음을 찢으며 재를 무릎 쓰고 주저앉아 신명기 32장의 모세의 노래를 묵상해야만 한다. 모세가 친히 이스라엘 총회에 끝까지 읽어 듣게 했던 그 노래 말이다. 모세는 “내가 죽은 후에 너희가 스스로 부패하여......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여......그를 격노하게 하므로 너희가 후일에 재앙을 당하리라.”(신31:29)고 경고했다. 그 땅과 백성을 속죄할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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