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던 제 19대 총선이 끝나고 국회에 입성할 300명의 명단이 확정되었다. 의회 정치는 민주주의의 꽃이다. 정당 정치는 민주 발전의 균형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다선 의원들도 많지만 초선 의원들도 적지 않다. 그 중의 한 사람이 경남 기업의 대표인 성완종(1951∼) 회장이다. 그는 충남 서산군 해미에서 초등학교를 4년 다니다 만 것이 학력의 전부이다. 물론 그 후에 계속하여 공부할 기회를 가지려 했다지만 그에게는 학교보다 세상의 땀 흘리는 현장이 더욱 더 가까웠다. 1963년 12월 어느 날 그는 엄마를 찾기 위해 무작정 서울 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12살이었다. 불성실한 아버지는 계모를 집안에 들였고 엄마와 그의 남매를 집 밖으로 내어 쫓았다. 서울에서 식모살이를 시작했다는 엄마를 찾기 위해 외삼촌이 손에 집어준 10원짜리 종이 돈 몇 장을 꼭 움켜쥐고 낯 설은 영등포역에 내린 시간은 추운 겨울 밤 11시가 다 된 때였다. 마침 김장배추를 나르던 삼륜용달차 운전수인 박씨 아저씨가 그를 기사들이 머무는 비좁은 방으로 안내해 주었고 아침에는 국밥도 한 그릇 사 주었다. 묻고 또 물어서 엄마를 찾아가 만났지만 식모살이하는 엄마 곁에 그의 누울 자리는 없었다. 달동네에서 개척교회를 하는 도병희 전도사를 만나서 그의 교회에서 잠을 자면서 새벽에는 신문 배달을 하고 낮에는 약국에서 잔심부름을 하면서 7년을 지냈다. 그 후에 어머니와 고향에 돌아간 그는 그동안 모은 돈 1,000원으로 화물 운송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몇 해 후, 20대 중반이던 1970년대에는 서산 토건의 지분을 인수하여 건설업에 뛰어 들었다. 그 후, 1991년 12월 15일에 어머니의 소원이자 자신의 인생관을 토대로 시작한 서산장학재단은 20년이 지난 오늘 날까지 256억 원의 기금을 형성했고 지금까지 18,600명에게 130여억 원의 장학금을 지급해 왔다.
그의 장학 사업은 해외에까지 관심을 보여 왔고 6.25 참전국 중의 한 나라인 에티오피아의 대학생 120여명에게 장학금을 지원해 왔다. 그의 선행은 끝이 없이 계속되고 있다. 2000년 섣달그믐날에 굴을 따러 나갔던 영세 어선이 전복되어 어부 9명이 모두 숨지는 사고 소식을 들은 그는 그 밤중에 지역에 달려가서 일일이 가가 호호 방문하고 희생자들의 유족을 위로하는 일에 앞 장 서기도 했다. 2003년 대구지하철 참사로 고아가 된 엄수미양 삼남매의 대학 졸업 때까지의 학비를 책임지기로 한 일화도 유명하다. 1996년에 돌아가신 그의 어머니는 26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기도 종을 치면서 지냈던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얘야 네가 어려서 남에게 도움을 받은 것 잊지 말고 나중에 남을 돕는 사람이 되거라.” 늘 그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해주던 말이었다. 새벽부터 하루 종일 이 곳 저곳에서 허드렛일을 돕고 밤에는 야학에서 공부하며 초등학교를 다니다만 한(恨)을 풀어 가던 성완종! 그는 오늘 날 매출 2조원의 경남 기업의 대표요 서산태안 지역의 국회의원에 당선된 주인공이다. 피나는 노력과 정직과 성실을 바탕으로 창의적인 도전 끝에 오늘에 이른 그는 지금도 1,000여명의 전화번호를 다 기억 할 정도의 놀라운 기억력을 자랑한다. 그의 자서전, <새벽빛>에서 밝히는 대로 그가 늘 중요하게 생각하는 바는‘창의력’이다. 빌 게이츠의 아버지 윌리엄 게이츠의 자녀교육관도‘창의력과 예지력과 겸손’이다. 기독교인인 성완종 회장의 강조는‘정직과 성실’이다. 그는“가장 곧은길이 가장 빠른 길이다.”라는 신념과 신앙을 갖고 있다. 그의 가훈 또한“정직하게 살자.”이다. 42.6%의 지지를 받고 제 19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그는“어렵게 성장해 가는 젊은이들에게 나와 같은 사람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쓴 책이 자서전이며 나의 삶이 청년들에게 도전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동서고금의 모든 역사는 이처럼 열정적인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성경도 마찬가지다. 하나님 안에서 살아 온 열정적인 언약의 사람들과 복음의 사람들의 이야기로 넘쳐난다. 모세가 그러한 인물이요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나 요셉이 다 그러한 주인공들 중의 한 사람이다. 창세기의 히브리 노예 출신 요셉이 명문학교에서 공부한 경력으로 인해서 애굽이 총리가 된 것이 아니지 않은가. 베들레헴의 목동 출신 다윗도 마찬가지다. 그가 많은 공부를 하고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어려운 국가고시에 합격했기에 40년간 왕으로 지낸 것이 아니다. 다윗에게 있어서는 곰과 사자의 발톱과 이빨로부터 아버지 이새의 양떼를 성실하게 지켜 냈던 어린 목동 시절이 그에게는 저력으로 작용했다. 그 들판의 야성을 가슴에 품고 블레셋의 골리앗 앞에 나갈 때에도“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는 신앙의 고백이 그를 역사적인 소년 다윗으로 승승장구하게 했다. 그러나 사울 임금의 불붙는 시기와 증오심으로 인해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긴긴 세월을 십 광야와 마온 들판과 엔게디의 요새와 동굴에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하심을 의지하며 지내야만 했다. 하나님은 사울 임금 편이 아니라 다윗의 편이셨다. 사무엘하에 보면 그런 말씀들이 가득하다.“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3:1),“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5:10),“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8:6),“다윗이...명성을 떨치니라.”(8:13) 사무엘하 22장에 나오는 다윗의 승전가를 보면 그의 신앙 고백이 면면이 소개된다.“여호와는... 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이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높은 망대시오.”(삼하22:3)
그렇다고 일부러 공부할 기회를 기피할 필요는 없지만 평생토록 살아가면서 학교의 공부보다 더 중요한 그 무엇인가가 분명히 있다. 그런 역사의 대표적인 주인공이 미국의 아브라함 링컨이 아닌가.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우남 이승만에게도 하나님을 믿는 그런 믿음이 분명히 있었다. 동 시대의 인물이었던 백범 김구에게도 우상과 미신을 버리고 만군의 주 여호와를 믿고 따르는 그런 신앙이 있었다. 남강 이승훈, 고당 조만식, 도산 안창호, 월남 이상재, 서재필 박사, 이준 열사 등 이 모든 구한말의 선각자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반 만 년 만에 들어온 서구 문명 앞에서 예수 복음의 진가를 깨달아 알고 믿는 믿음의 선진들이 아니었던가. 평양의 부잣집 아들로 젊어서부터 술과 놀음과 기생 곁에서 방탕한 나날을 즐기며 살던 조만식에게 친구가 예수를 전했다.“언제까지 젊은 날을 이렇게만 보낼 것인가.”새사람이 되는 길은 예수 영접하는 길이라는 친구의 전도를 받아들인 그는 세상 친구들을 불러 모아 큰 잔치를 벌이고 결별을 선언했다. 그 후로 세례 받고 예수 잘 믿으며 기독교 학교인 숭실중학교에서 공부하고 일본에 유학하여 메이지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에 고국에 돌아와서 애국운동의 선봉에 서는 애국지사가 되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의 천문학 교수였던 크리스토퍼 렌(Christopher Wren, 1632-1723)은 48살 때 그 명문 대학의 교수직을 사임하고 건축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 후 그는 89세까지 런던 대 화재 후에 영국의 대 성전 51개를 설계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전업을 우려했지만 그는 인생의 새 출발을 성공적으로 해내었다. 그의 작품인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은 로마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 그리고 피렌체의 듀오모 성당과 더불어 세계 3대 성당 중의 하나로 꼽힌다. 크리스토퍼 랜은 “사람은 나이와 상관없이 언제라도 새로운 탐구를 할 수 있으며 새로운 출발이 가능하다.”는 도전의 말을 남겼다. 그는 나중에 나이트(Knight) 작위도 서위(敍位) 받았고 하원의원도 지냈다. 출세와 성공만을 향하지 말고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 살아야한다.“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12:3)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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