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들 중에는 태어난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걷고 뛰기 시작하는 것들이 적지 않다. 관찰과 통계에 의하면 송아지는 태어난 지 7분 정도 지나면 걷기 시작한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은 다르다. 사람이 제대로 서서 걷기 위해서는 50,000 번 정도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시도를 한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첫 돌 즈음이 되면 걷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성장해 가면서 넘어지는 위험이다. 자전거를 배운다거나 혹은 각종 운동 경기 중에 넘어지는 것은 흔한 일이다. 문제는 일상생활 중에 넘어지는 경우이다.
지난 수요일 저녁, 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집을 나섰으나 자동차 시동이 걸리지 않는 것이었다. 배터리에 이상이 있는 것 같았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는데 당황스러웠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위해 큰 길까지 가려면 십 분쯤은 빠른 걸음으로 걸어야 하므로 마음이 급해졌다. 그 때 마침 아파트 경비실 앞에 택시 한 대가 도착하는 것이 저만치에 보였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하루 종일 택시 몇 대 안 들어오는 확률로 하면 마치 천사를 만난 기분이었다. 경비실 앞에서 손님을 내리게 한 택시가 금방 돌아 나가려 하고 있었다. 우리 내외는 급한 마음에 택시를 향해서 어둠 속을 서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서로 뛰어 가던 저 만치에서‘으..으..윽’하는 비명 소리와 함께 아내가 어두운 주차장 모서리의 콘크리트 턱에 걸려 넘어지고 만 것이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사고였다. 다행히 겨울이라 두껍게 입기는 하였지만 왼쪽으로 미끄러지면서 턱에 걸려 심하게 넘어지는 바람에 왼쪽 무릎과 옆구리와 가슴과 왼 손바닥과 손목에 큰 충격을 입었다. 아내는 몹시 고통스러워하면서 집으로 되돌아 들어갔고 나는 제대로 부축도 해 주지 못한 채 서둘러 큰길가로 나와서 택시를 겨우 탔다. 그 후로 여러 날 아파하며 결리고 고통스러워하는 아내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부부라도 몸의 고통은 각각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마음으로 안타까워 할 뿐 어찌 도울 길이 없어 미안한 마음이 컸다. 급할수록 침착했어야 하는데 말이다.
사람이 한 평생을 살아가다가 보면 물론 넘어질 때가 있다. 걷기 시작한 후에 한 번도 넘어진 적이 없이 평생을 사는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사실 어찌 생각하면 몸이 무엇엔가 걸리거나 밀려서 넘어지는 것은 한두 주일이 지나면 그 고통이 사라지고 나을 수 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인생살이에서 넘어지는 경우가 아닐까. 고린도 교회에 편지한 사도 바울은“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고 했다. 그 앞부분에서 예로 든 내용들은 심각하다. 우상 숭배와 음란과 하나님을 시험하는 불경한 태도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던 이스라엘 선조들의 광야 생활 모습을 언급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광야의 반석에서 물을 마시던 선조들의 경험을 예로 들면서“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10:4)고 했다. 그 반석에 거쳐서 멸망한 광야의 백성들과 혹은 음행하다가 하루에 죽은 23,000명의 심판을 예로 들면서“반석이신 그리스도를 거치는 악을 행하지 말라, 우상 숭배 하지 말라, 음란하지 말라, 주를 시험하지 말라. 원망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사실 그렇다. 신앙과 불신앙을 망라하고 세상은 날마다 이런 면에서 넘어지는 이들의 사건 소식으로 가득하다. 사람은 불의한 재물과 지나친 권력욕과 명예욕과 비윤리적인 대인관계로 인하여 쉽게 넘어지고 만다. 최근에도 정치계, 경제계, 금융계, 기업, 입법, 사법, 행정, 교육계, 군대 등 할 것 없이 각 분야마다 지도층에 있는 이들이 이러 저러한 연유로 인하여 연루되고 넘어지는 안타까운 뉴스들이 넘쳐 난다.
심한 바이러스성 독감에 걸리면 건강하던 사람이 며칠 만에 죽기도 하는 것처럼 분별력을 잃게 하는 악이 인간을 장악하면 그 누구라도 넘어지고 만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한 것이다. 사람은 탐심과 탐식과 호색과 욕망과 게으름과 나태와 허랑방탕한 생활로 인해서 판단력이 흐려지고 악의 깊은 수렁에 빠져서 죽어 간다. 세상에는 넘어질 듯 넘어질 듯 위태하게 살아가다가 결국은 아주 넘어지고 마는 이들로 가득하다. 이와 같은 악에 빠지고 나면 가문과 학력과 학식과 지위와 권력과 지능과 명예와 재물의 힘이 별 것 아니다. 일단 인간을 넘어지게 하는 악이 찾아 들면 그 어떤 장사라도 넘어지고 그 어떤 권력자라도 버텨 낼 수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우리 자신을 지켜 내는 힘은 절대로 아니다. 우리 각 사람이 악과 불의와 거짓의 간계한 속임수에 빠져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매 순간마다 절대적인 다른 힘의 도움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힘이며 주님의 도우심이며 성령의 동행하심과 깨우치심이다.
하와는 불순종하다가 넘어졌고 아담은 분별력 없이 아내를 따라 나섰다가 넘어졌다. 가인은 혈기로 인하여 넘어졌고 노아는 술에 취해 넘어졌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눈에 보이는 것만 바라보고 소알 땅으로 떠났다가 삼촌 아브라함만 못한 인생이 되고 말았다. 소돔과 고모라가 유황불의 심판을 받을 때에 롯의 두 사위들은 장인의 말을 농담으로 여기다가 심판의 불 속에서 구원 받지 못해 넘어졌고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다봄으로 심판의 현장에서 탈출하다 말고 넘어졌다. 롯의 두 딸들은 육신의 생각으로 아버지를 상대함으로 모압과 암몬과 같은 부끄러운 아들들을 낳는 패륜한 여성들로 넘어지고 말았다. 물론 아브라함도 한때는 사라의 요구를 가볍게 받아들이므로 몸종인 하갈로 인해 넘어진 후에 아들 이스마엘을 낳아 놓고 얼마나 후회 했는지 모른다. 모세는 구스 여자로 인해 넘어졌었고 누이 미리암은 모세를 비난하다가 나병에 걸리는 심판을 피하지 못했다. 아이성 전투에서 아간은 시날산의 외투와 금과 은덩어리에 대한 탐심으로 인해서 넘어졌고 삼손은 이방 여인 들릴라를 향한 욕망 앞에서 넘어졌다. 사울 임금은 거만한 마음과 교만한 생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경홀히 여김으로 선지자 사무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함부로 대하다가 넘어진 불행한 임금이 되고 말았다. 다윗도 한 때는 전쟁 중에 부하 우리아 장군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는 사건으로 인해서 심각하게 넘어진 적이 있었다. 다윗이 그런 민망하고 야비하고 참담한 사건을 딛고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이요 크신 긍휼 덕분이 아닐 수 없다. 지혜의 왕 솔로몬은 이방 여인들의 미혹 앞에서 넘어지고 또 넘어지는 초라한 임금의 나중이 되고 말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베드로도 교만하다가 넘어졌고 가롯 유다는 사탄에게 장악되어 어리석게 행동하다가 구원 받지 못하고 넘어지는 참담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역사에 이런 일화는 너무나 많다. 닉슨 대통령은 진실하지 못해서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넘어졌고 빌 클린턴 대통령은 곁에 있던 어린 견습생으로 인해 넘어졌었다. 그러므로 잘 사는 길이 무엇인가. 복음 안에서 바르게 사는 것이다. 창조자의 뜻과 섭리를 따라 인간답게 살고 성도답게 살고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야 한다. 인생의 결정적인 계기에 넘어지지 않도록 매 순간 조심하여야 한다. D. A. 카슨은 <그리스도인의 정의>(Basics for Believers)라는 책에서 이런 문제들을 심도 있게 제시하며“매 시험마다 이기는 것, 그것이 주님이 발견하는 나의 모습이길 원하네”라는 교회학교 때 배웠던 찬송가 가사를 인용했다. 축복. 성공, 명예, 인기 다 좋다. 그러나 잘 될 때에 넘어질까 참으로 조심해야 천국의 삶이 지속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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