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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으나 살아 있는 이들 2014.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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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4-01-25 13:49 조회 14,898 댓글 0
 
2014년 1월 19일에 중국 하얼빈 현장으로부터 희소식이 전해졌다.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그 현장에 105년 만에 ‘안중근의사기념관’이 건립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응칠應七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義士는 31살이던 1910년에 여순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그는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대한침략의 원흉인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향하여 쏜 4발의 권총 중에서 3발을 명중시켜 저격하였다. 고종 16년인 1879년에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그는 예닐곱 살 때에 아버지가 만든 서당에서 동네 아이들과 함께 사서四書와 사기史記 등을 읽었다. 또 틈만 나면 화승총을 메고 사냥을 잘 해서 어려서부터 명사수로 이름이 났다. 16살 때에는 아버지가 감사監司의 요청으로 수렵자인 산포군山砲軍을 조직해 동학군 진압에 나섰을 때 참가하였다. 다음 해에 천주교에 입교해 토마스多默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1904년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해외 망명을 결심하였다. 산둥山東을 거쳐 상해에 도착한 그는 그곳에서 알고 지내던 프랑스인 신부로부터 나라를 구하려면 실력을 키우고 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충고를 듣고 망명하려던 마음을 돌이키고 다시 귀국하였다. 1906년 3월에 진남포 용정동으로 이사해 석탄상회를 경영하다가 정리한 뒤에는 서양식 건물을 지어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하였고 곧이어 남포南浦의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해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는 28살이었다. 1907년부터 본격적으로 반일운동에 앞장 서기 시작하였다. 이 해 7월에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자 다시 북간도로 망명하였고 몇 달 뒤에는 노령으로 갔다. 얼마 후에 러시아의 노브키에프스크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후에 한인청년회 임시사찰이 되었다. 그 곳에서 의병지원자가 300여 명이 되자 김두성, 이범윤을 총독과 대장으로 추대하고 안중근은 대한의군참모중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무기를 구해 비밀리에 수송하고 군대를 두만강 변으로 집결시켰다. 1908년 6월에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군사령관이 되어 함경북도 홍의동과 경흥의 일본군 정찰대를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제3차의 회령전투에서는 5,000여 명의 일본군을 만나 혈투를 벌였지만 처참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겨우 목숨을 건지고 탈출한 뒤 1909년 3월 2일, 노브키에프스크 가리(可里)에서 김기룡, 엄인섭, 황병길등 12명의 동지가 모여 손가락을 잘라 내어 조국 독립을 위하여 싸울 것을 맹세한 단지회斷指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안중근과 엄인섭은 대한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김태훈은 친일파의 앞잡이인 이완용李完用을 암살하겠다는 결의로 단지斷指의 피로써 맹세하였다. 저들은 자신들의 약속을 3년 이내에 성사하지 못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동족에게 속죄하기로 결의하였다. 그 같은 해인 1909년 9월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원동보’遠東報와 ‘대동공보’大東共報의 기사를 통해 이토가 러시아의 대장대신大藏大臣 코코프체프Kokovsev, V.N.와 하얼빈에서 회견하기 위해 만주에 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안중근은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와 이토 히로부미 저격방안을 모의하고 만반의 준비를 다 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특별 열차가 드디어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코코프체프와 약 25분간의 열차 회담을 마치고 기차에서 내렸다.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환영 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안중근은 무리 속에서 뛰어나가며 권총을 발사하여 이토 히로부미에게 명중시켰다. 현장에서 체포된 그는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 심문에서 자신은 한국의용병 참모중장이며 나이는 31살 이라고 밝혔다. 거사 동기에 대한 질문을 받자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니라”고 담대하게 밝혔다. 그는 관동도독부지방법원 원장 마나베眞鎬十藏 판사의 주심으로 여섯 차례의 재판을 받았다. 안중근은 자신은 일반 살인피고가 아닌 전쟁포로로 취급해 달라고 주장하였다. 국내외에서 변호 모금운동이 일어났고 변호를 지원하는 인사들이 여순旅順에 도착했으나 허가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일본인 관선 변호사 미즈노水野吉太郎와 가마타鎌田政治의 변호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안중근은 재판과정에 정연하고 당당한 논술과 태도로 임하자 일본인 재판장과 검찰관들도 탄복할 정도였다. 관선 변호인 미즈노는 그의 답변 태도에 감복해 “그 범죄의 동기는 오해에서 나왔다고 할지라도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지 않으면 한국은 독립할 수 없다는 조국에 대한 충정심에서 나온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변론하였다. 공판은 1910년 2월 14일에 개정되었고 재판장 마나베는 사형을 언도하였다. 죽음을 앞둔 며칠 전 정근定根, 공근恭根 두 아우에게 “내가 죽거든 시체는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返葬)하지 말라.……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유언하였다. 결국 그는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여순감옥의 형장에서 처형당함으로 순국殉國하였다. 성경, 마가복음 6장에 보면 세례 요한이 목 베임을 당하여 죽은 장면이 자세하게 나온다. 당시의 로마 통치자 헤롯은 동생의 부인인 헤로디아를 빼앗아 취하여 살 정도의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인간이었다. 그와 같은 비윤리적인 사생활을 지적한 세례 요한에 대하여 항상 앙심을 품고 있던 헤롯은 세례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다. 하루는 헤롯의 생일잔치에 대신과 천부장과 주변의 귀인들을 불러 모으고 술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헤로디아의 딸은 다들 주흥이 더 해가던 현장에서 춤을 추었다. 소원을 묻는 헤롯의 질문 앞에 헤로디아는 딸에게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고 귀 뜸하여 주었다. 결국은 헤롯의 생일 잔치날 감옥에서 목 베임을 당한 세례 요한의 피 범벅이 된 머리는 소반에 담겨 헤로디아 앞으로 전달되었다. 그날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스승의 시체를 인계 받아다가 슬픈 장례식을 치루었다. 독일의 양심이었던 본 훼퍼Dietrich Bonhoeffer(1906-1945)목사는 히틀러의 불의 앞에 맞서서 그를 암살하려고 외롭게 씨름하다가 붙잡혀 39살 나이에 교수형을 당했다. 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본 훼퍼는 21세의 젊은 나이에 독일의 베를린 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했을 때 당대 최고의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그의 학위 논문을 ‘신학계의 기적’이라고 극찬 하였다. 그는 미국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 1년 연수 후에 주어진 교수 직 제안을 거절하고 히틀러의 학정이 계속되던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악당인 히틀러에 대하여 “선량한 시민이 히틀러의 독재의 마차바퀴에 깔릴 때, 나는 일회용 반창고를 부쳐 주기에 만족하기 보다, 마차바퀴에 막대기를 찔러 넣어 마차를 중지시키겠다.”고 했다. 체포된 본훼퍼가 감옥에 있는 동안 간수들은 오히려 그를 귀하게 여겼고, 절망적인 죄수들의 방으로 데리고 가서 그들을 섬기게 하였다. 간수들은 그의 연구논문, 수필, 시들을 보존하였고 그 결과로 역사 속에 오늘 날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약혼녀를 남겨 둔 그는 1945년 4월 9일, 프로센버그 강제 수용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는 죽기 전에 레위기 26장 6절을 묵상하였다. “내가 그 땅에 평화를 줄 것인즉 너희가 누을 때에 너희를 두렵게 할 자가 없을 것이며 내가 사나운 짐승을 그 땅에서 제할 것이요 칼이 너희 땅에 두루 행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리고 그는 죽어 가면서 이렇게 읊조렸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요즘처럼 기독교계 조차도 매관 매직에 눈이 멀고 태평성대에 배 부르며 등 따뜻해진 한국 교회에 신사참배를 거절하던 주기철 목사의 순교 신앙이나 미국의 마틴 루터 킹 목사나 독일 교회의 본 훼퍼 목사가 다시 생각나는 이유는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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