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야구 선수인 추신수(1982∼)의 팔은 황금알을 낳는 팔이다. 부산 수영초등학교 시절인 8살 때부터 야구에 흥미를 갖기 시작한 그의 오늘은 우연히 주어진 결과가 결코 아니다. 외야수인 추신수는 미국 생활 13년 만에 텍사스 레인저스 야구단과 7년간 1억 3천만 달러의 계약을 체결하였다. 우리 돈 약 1,380억 원의 초대형 계약이다. 이는 매년 198억 원을 받는 셈이다. 그 중에 세금을 이것저것 다 떼어도 매년 109억 원을 받게 된다. 이 같은 인터넷 뉴스 자료가 소개된 컴퓨터 화면 한편에는 “월급 4만원 노예 노동의 비극…방글라데시 의류 공장 붕괴 참사”라는 제목의 또 다른 뉴스가 참담한 사진 자료와 함께 눈길을 끌었다. 8층 건물이 붕괴되어 당시 건물 안에 있던 3천여 명 중 4백여 명이 사망했다는 기사였다. 매년 추워지면 꺼내 입는 나의 겨울 코트에는 ‘MADE IN UKRAINE'라는 라벨이 붙어 있다. 가 본 적도 없고 만나 본 적도 없는 우크라이나 현지의 공장에서 생산된 것이다. 미국에서부터 입기 시작했으니 한 15년 쯤 되었다. 사실 우리가 입는 사계절의 그 많은 옷가지들 중에서 적지 않은 분량이 이처럼 열악한 환경에서 생산된다. 중노동에 시달리며 박봉을 손에 받아 드는 현대판 노예시장과 같은 곳에서 수고하는 누군가의 손길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들이 적지 않다. 왜 다 같은 인간인데 누구는 세상을 화려하게 살아가고 누구는 입에 풀칠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며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헉헉대며 살아가는 것일까.
성경은 하나님을 의인화하여 표현한 내용이 적지 않다. 하나님의 눈, 입, 손 등 말이다. 그 중에 하나님의 팔을 묘사한 표현도 여러 곳에 나온다. 신명기 33장에 보면 연세 120이 된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축복하는 내용 중에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신33:27)는 말씀이 나온다. 모세는 하나님의 팔을 영원하신 팔이라고 하였다. 그렇다. 인간의 팔은 아무리 능력이 있고 힘이 세고 강하고 다재다능하다고 할지라도 영원하지는 않다. 가난을 딛고 일어서서 런던 올림픽 체조 부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양학선의 팔도 영원하지는 못할 것이고 추신수의 팔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다윗 시절의 블레셋 대장은 골리앗이었다. 그의 키가 270센티미터 이상 한 3미터쯤 되는 거인이었다. 그가 잡아 치켜드는 창은 베틀 채 만하다고 하였다. 그런 그의 팔뚝이 얼마나 대단하였겠는가. 아마도 보통사람 넓적다리 정도 굵기의 힘을 가진 팔뚝이었던 것 같다. 그런 골리앗도 하나님의 사람인 이스라엘 소년 다윗이 던지는 물맷돌 한 개 앞에 힘없이 쓰러져 죽고 말았다. 성경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의 가정은 매우 평범한 족장들 중의 한 가정이었다. 그 당시에는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대개가 그러하였겠지만 갈대아 사람들이 살던 땅인 우르를 떠나서 가나안 땅에 가서 살려다가 하란에 머물러 살던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 숭배자요 뿐만 아니라 우상을 만들어 파는 장사도 하였다. 그의 세 아들들 중의 하나인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그를 불러 내셨고 하나님은 그의 부르심에 순종한 아브람을 통하여 오늘 날 유대인의 역사를 이루어 오셨다.
그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낳은 쌍둥이 중의 동생인 야곱의 열 두 아들들 가운데 11번째가 요셉이다. 야곱이 가나안의 흉년을 이기지 못하여 내려갔던 땅 애굽에서 17년을 행복한 공양을 받으며 살 수 있었던 노년기의 중심에는 아들 요셉이 곁에 있었다. 그 야곱이 늙어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기 전에 일일이 자녀들을 축복하고 예언한 말씀이 창세기 49장에 나온다. 그 내용 중에 요셉을 축복하는 말씀은 이렇게 시작된다.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창49:24)라고 했다. 여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라는 말씀을 생각하여 보라. 누가 요셉의 활을 굳세게 하였으며 누가 그의 팔을 힘이 있게 하였는가. 17살! 빨가벗겨진 채 두려움에 질린 요셉을 애굽으로 가는 미디안의 장사꾼들에게 팔아넘긴 것은 두 팔에 힘이 넘쳐 나던 그의 배 다른 열 명의 형들이 작당한 짓이었다. 아버지 야곱은 그의 앞에 던져진 아들 요셉의 찢어지고 피 뭍은 옷가지를 보며 통곡하며 감쪽같이 속았고 그 후 20년의 통한(痛恨)의 긴 세월이 흘러갔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요셉인데 하나님이 지금 그의 팔을 힘이 있게 하신 것이다. 요셉은 야곱이 98살 때에 그렇게도 총애하던 아내 라헬을 통하여 낳은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끔찍하게 여기던 아들들 중의 아들이 아닌가. 그 아버지 야곱이 지금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기 전에 아들 요셉을 축복하고 있다.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야곱은 평생을 살아오며 깨달아 알았다. 인생의 힘은 그 분으로 말미암아 임하여야만 한다는 것을. 그래서 지금 죽음 직전의 야곱은 엄숙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여 아들 요셉을 축복하고 있는 것이다. 25절 이하에 보면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 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로다.”라고 하였다. 아버지 야곱의 축복의 말은 우물의 샘이 솟구쳐 나오는 것과 같고 암벽의 벌집에서 야생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것과도 같다. 아버지 야곱의 축복의 말은 계속된다.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없음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창49:26) 이것이 무슨 말인가. 인간의 생사화복은 하나님의 손길 안에 있고 하나님의 그 크신 팔 안에 있다. 나사렛의 미천한 동정녀 마리아의 태에 하나님의 아들이 잉태되었다. 두려움과 무서움 속에 당혹스러워하던 마리아는 유대의 산골 마을에 사는 친척인 엘리사벳의 집에 가서 섣달을 숨어 지내면서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고백한 마리아의 찬가에 보면,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눅1:51)라고 했다. 그렇다. 하나님의 팔의 힘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는 마리아의 고백 앞에 이의를 제기할 인생은 동서고금 그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영국의 역사학자였던 아놀드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1889-1975)는 그의 책, <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에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 개입에 대하여 그의 기독교 역사관을 바탕으로 역사를 조망(眺望)한다. 그에 의하며 “동서양의 모든 인류의 역사란 그 문명의 발전과 쇠퇴가 모두 다 그 분의 손 안에 있다”는 정의이다. 그 분! 그 높으신 전능자의 그 손길에 섭리가 담겨 있고 그 분의 팔에서 영원한 능력이 나오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도 베드로에게 장차 사도의 길을 제대로 걸을 것을 분부하면서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8)고 하였다. 그렇다. 역사 속에 영원한 인간의 팔의 권세가 그 어디에 있었는가. 진시황인가. 알렉산더인가. 징키스칸, 히틀러, 모택동, 스탈린... 그 누구인가. 현대사로 하면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수쿠 부부는 160발의 총탄을 맞고 비참하게 처형되었고 공동묘지 한 귀퉁이에 버려지듯이 매장되었다. 리비아의 독재자 카다피도 고향의 시궁창에 숨어 지내다가 시민군의 총탄을 맞고 초라하게 죽었고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도 사형 당하고 말았다. 에스겔 30장 20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은 애굽의 바로왕의 두 팔 즉 성한 팔과 이미 꺾인 팔을 꺾어서 칼이 그 손에서 떨어지게 하시는 전능자이시라고 하였다.(겔30:20-22) 찬송가 405장 가사처럼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라고 찬송하며 공의의 심판주이신 그분의 팔에 붙들려 살아가는 인생과 가문이 부럽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