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서양의 30미터 바다 속에 가라앉은 배에서 삼일 동안 살아남아 목숨을 버티던 29살 청년이 구조를 받아 새 삶을 살게 되었다. 사건이 일어난 것은 2013년 5월 26일이다. 대서양의 나이지리아 델타 앞바다에서 유조선을 예인하던 예인선, ‘자스콘 4’가 전복되어 침몰되고 말았다. 예인선에 타고 있던 12명 모두 사망한 것으로 알고 시체 인양 작업을 진행하였다. 사고현장에서 12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다이빙업체의 전문 ‘DNC다이빙’ 전문 요원들이 현장에 파견되어 시체 인양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캄캄한 바다 속에 들어가서 가라앉은 배 안을 뒤지고 다니면서 시체를 찾아내는 일은 참으로 가슴 아프고 힘겹고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 배 안에서 누군가가 구조대원의 손을 덥석 잡는 것이었다. 그 순간 구조대원은 얼마나 놀랐겠는가. 사고를 당한 예인선에 음식을 만드는 조리사로 승선했던 헤리슨 오케너는 사고가 나던 그 시간에 아침 일찍 일어나 화장실에 가 있었다.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됐지만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있던 그가 선박이 뒤집히며 생긴 ‘생존 공간’을 찾게 되면서 다른 11명의 생명을 앗아간 사건 현장의 유일한 생존자가 된 것이다. 사고 당시 복싱팬티 한 장만 하의로 걸치고 있던 그는 점차 떨어지는 체온과 줄어드는 산소를 호흡하며 콜라 한 병을 손에 움켜잡은 채로 마지막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 앞에 두려운 시간을 맞고 있었다. 그런 죽음과 공포의 상황에 처한 그에게 용기를 준 것은 그의 아내가 핸드폰의 문자메시지로 보내준 성경 구절과 찬송가 가사였다. 찬송가를 부르고 ‘구원을 위한 기도’를 드리며 째깍 째깍 다가오는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임종을 위한 기도 밖에는 더 이상의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70여 시간 만에 사망자의 시신을 찾으러 바다 속에 다이빙 하여 들어갔던 다이빙요원들의 손을 그가 붙잡게 된 것은 사람의 손길이 아닌 하나님의 구조의 손길이었다. 사람이 땅 위에 있던지 공중이나 바다 한 가운데 그 어디에 있던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제 힘이 아닌 것을 우리는 다 잘 안다. 사람은 그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이 있는가 하면 죽는 순간이 찾아온다. 모든 인간의 하루하루의 삶과 그 육체의 목숨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욥기의 주인공인 동방의 의로웠던 부자 욥 내외가 그들의 생전에 일곱 아들과 세 딸의 죽음의 소식을 하루에 동시에 들을 줄 상상이나 하며 살았겠는가. 십남매가 큰 아들의 집에 모여서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셔가며 풍성한 파티를 벌이던 그 날에 거친 들에서 큰 바람이 불어와서 큰 아들의 집을 무너트리자 그 잔치자리에서 십남매가 한 순간에 다 죽고 말았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다가 보면 이런 상상할 수조차 없는 재앙을 만날 때가 없지 않다. 올해는 미국의 J. F. 케네디 대통령이 임기 중인 1963년 11월 22일에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 어느 누가 자신의 시간과 장래를 계수할 수 있겠는가.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90:12)라고 고백하였다. 우리나라의 동족간의 전쟁이었던 6.25 때 참전국의 사망자를 모두 합하면 200만 이상이 죽었다. 한국의 사망자는 백만 명이 넘으며 그 중 85%는 민간인이다. 소련의 통계를 보면 북한의 11.1%에 해당하는 113만 명의 인구가 전쟁을 통하여 사망하였고, 양측을 합하여 250만 명이 사망하였다. 80%의 산업시설과 공공시설과 교통시설이 파괴되었고, 정부 건물의 75%가 파괴되거나 손상되었으며 가옥의 절반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다. 그 밖에도 약 20만 명의 전쟁미망인과 10여만 명 이상의 전쟁고아가 생겨났고 1천여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오늘 날도 세계 처처의 어디에선가는 전쟁과 테러와 강도와 살인과 지진과 질병과 굶주림과 홍수와 가뭄 등의 각종 재앙과 사건으로 원치 않게 목숨을 잃고 일찍이 세상을 작별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누가 강건한 나날을 원하지 않으며 그 누가 장수를 원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인간의 생명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수보다 중요한 것은 매 순간 하루하루를 사명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며 오래 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헤리슨 오케너 같은 특별한 생사(生死)의 위기(危機)를 겪은 이들의 나중의 삶을 어떠할까.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향하신 주의 부르심과 사명을 재발견하는 일이다. 성경, 요나서의 내용은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다. 니느웨는 티그리스 강 동부 유역에서 번영하였던 고대 앗수르 즉 아시리아의 수도이다. 1880년 이후에 발굴된 당시의 사적에 의하면 앗수르와 니느웨의 문명이 얼마나 화려하게 발전하였었나를 쉽게 알 수 있다. 어느 날 하나님은 선지자 요나에게 명령하셨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 곳 백성들의 악독한 삶이 내게 상달 되었으니 어서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고 외쳐라” 그러나 선지자 요나는 무슨 생각을 품었는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항구 욥바로 내려가서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기에 그 배를 탔다. 그런데 그 배가 풍랑을 만났고 저들의 미신대로 제비를 뽑았는데 배 밑창에서 잠을 자고 가던 요나가 뽑힌 것이다. 성경은 그 때 일어났던 큰 풍랑의 원인이 우연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일으키셔서 큰 폭풍이 일게 하신 사건이라고 했다. 뱃사공들은 두려움 가운데 자신들이 믿는 자기들의 신의 이름을 부르며 구원을 요청하였고 배를 조금이라도 가볍게 해 보려고 배 안에 싣고 가던 물건들을 바다에 던져 버리며 초조하고 위험한 항해를 계속하고 있었다. 제비 뽑힌 요나에게 뱃사람들이 물었다.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욘1:8) 그 때 요나가 대답했다.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만드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다” 그 때에 바다는 점점 흉용해져 갔다. 그 때에 뱃사람들이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고 묻자 요나는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욘1:12)고 대답하였다. 요나서를 읽어 보면 제비를 뽑아 요나를 뽑아 놓은 뱃사람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질 용기는 없었던 것 같다. 저들은 요나의 말을 들은 후에도 계속하여 노를 저어서 배를 육지에 대어 보려고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하나님을 믿지 않던 뱃사람들의 기도 내용은 이렇다.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욘1:14) 이런 기도를 드린 후에 요나를 들어서 바다에 던졌는데 바다가 신비하게 금방 잔잔해 졌다. 그 순간에 뱃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렵게 여기며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하는 기도를 드렸다. 요나서 1장은 이렇게 끝난다.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욘1:17) 요나는 그 큰 물고기 뱃속에서 죽지 않고 사흘 동안 하나님께 회개하는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사흘 후에 하나님은 그 큰 물고기에게 말씀하셔서 요나를 육지에 토해내게 하셨다. 물고기 배 속에서 기도한 요나의 기도를 간단히 요약하면 “나를 다시 살려 주시면 감사하는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값겠습니다.”하는 내용이다. 세상에 토해져서 다시 빛을 보며 살게 된 요나인데도 하나님의 말씀에 꼬박 꼬박 순종하지 않고 지내는 모습을 보면 인간의 실존(實存)을 보는 것만 같다. 니느웨 성민의 회개를 입으로는 선포하면서도 하나님이 이방 백성들을 용서하시려는 섭리에 대하여 이의(異意)를 갖고 싫어하며 화를 내던 요나의 모습 속에 아직도 덜 거듭난 우리 인간의 자화상(自畵像)이 담겨 있지 않은가. “미스터 헤리슨 오케너! 앞으로 주 안에서 잘 살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