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다. 로마가 당시에 얼마나 강성했던 대국이었나를 지칭하는 말 중의 하나이다. 그런 로마도 역사 속에 죄와 악의 관영으로 무너지고 말았고 이제는 유적과 유물을 비롯한 문화적인 흔적만 전해져 올 뿐이다. 독일의 아우토반Autobahn은 속도 제한이 없는 자동차 전용고속도로를 말한다. 물론 오늘 날은 아우토반에도 곳곳에 속도 제한이 되어 있어서 과거와는 다르다고 한다. 아우토반의 최초 구상과 계획은 100년 전인 1920년대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부터 건설이 시작되었다. 그 초기의 기본구상은 독일을 나중에 세계굴지의 자동차대국으로 성장시켜가는 큰 초석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연합군의 공습을 피하기 위해 터널이나 가까운 숲 안에 항공기를 숨기는 역할을 하기도 했고 활주로로 대신 이용하기도 했다. 1964년 12월 10일에 박정희 대통령은 뤼프케 대통령의 초청으로 서독을 방문 한 뒤 아우토반을 보고 돌아 와서 1968년 2월부터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왕복 16차선의 고속도로 건설을 계획하였으나 가장 반대하고 나선 당시의 야당의 지도자 김영삼과 김대중도 후에 그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전국에 대통령 유세를 다녔다. 저들 두 사람은 가면을 쓰고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 드러누워서 극렬하게 반대하므로 왕복 4차선에 머물고 말았다. “쌀도 모자라는데 고속도로 웬 말이냐, 우량 농지 훼손이 웬 말이냐, 자동차 있는 사람 팔도 유람할 고속도로 웬 말이냐”고 반대하던 어리석음을 뒤로 하고 오늘 날은 전국의 처처에서 도로가 좁다고 아우성이 아닌가.
야당의 반대에 부딪친 박정희 대통령은 장래의 도로 확장을 위해서 고속도로 주변의 양 쪽 편 땅 50미터씩을 남겨 두도록 지시했고 건축을 금지시켰다고 전해진다. 당시에 앞서 가던 나라 독일에는 1963년부터 1977년까지 한국의 광부 7,936명과 간호사 11,057명이 건너가서 외화를 벌어 들여왔다. 지지리도 가난하던 그 시절에 가족을 돌보고 동생들을 가르쳐 보겠다며 희생적인 삶을 살아온 저들의 타국살이의 외로움과 눈물과 땀은 오늘 날의 발전한 대한민국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 독일의 아우토반도 요즘은 교통량이 적은 지방 노선을 제외하고는 300km 이상을 달릴 수 있는 구간은 거의 없다. 그러나 독일의 뉘르브르크링Nürburgring은 누구든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한번 쯤 가서 달려 보고 싶은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이다. 자칫 잘못하면 죽음으로 몰고 갈 수도 있는 위험한 곳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최근에 우연히 7분 20초짜리 그 곳에서의 드라이빙 동영상을 보았다. 최고속도 313킬로미터까지 기록되었다. 여차하면 큰 사고를 부를 수도 있는 곳이었다. 그 곳은 독일의 중서부 뉘르부르크Nürburg에 있는 장거리 서킷이다. 흔히 ‘모토레이싱의 성지聖地’라 불리는 그 곳은 1927년도에 완공된 총 길이 28.3km였다. 관객 동원 최고 기록을 낸 1971년도에는 13만 명의 관객이 모여든 적도 있었다. 그러나 심한 고저차와 좁은 노폭으로 인해 많은 사고가 일어났고 세계적인 레이싱 선수들의 사망 사고까지 부르게 되자 심지어는 ‘녹색지옥’이란 뜻의 ‘The Green Hell’이라는 별명이 붙여질 정도였다. 그러하다 보니 그 곳에서 신기록을 세운 드라이버에게는 링마이스터Ringmeisters의 칭호가 주어졌다. 그 후로 위험한 코너의 수를 줄이고 노폭을 넓히는 등의 대대적인 안전 공사를 거쳐서 오늘 날은 20.8km의 코스로 154개의 아슬아슬한 코너로 이루어져 있다. 오늘 날은 F-1경기뿐만 아니라 경기가 없는 날에는 세계의 레이싱에 관심 있는 이들이 달려보는 관광 명소로 자리 잡았다. 또한 세계 각국의 자동차 생산 회사들이 자신들의 새 차의 성능을 실험하기 위하여 찾는 곳이기도 하다. 각종 코너와 고저차가 어우러져 있기 때문에 뉘르부르크링의 기록은 곧 그 차량의 타이어와 차량의 모든 것과 엔진의 성능을 평가 하는 수치가 된다.
사람들은 누구나 속도감을 즐기고 싶어 한다. 소위 잘 나가는 인생으로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어찌 인생이 그렇게 순탄할 수 만 있으랴. 최근에 선물로 받아 읽은 책, <주와 함께 하라>의 저자인 대의 그룹의 창업자이며 기독교 명문가를 이룬 살아 있는 간증의 주인공인 채의숭 장로도 건강의 이상과 교통사고의 위기 등으로 사선을 넘나드는 70년 인생의 고비 고비를 간증하고 있다. 그는 책의 곳곳에서 하나님의 도우신 손길과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고백을 계속하고 있다. 충청남도 태안의 깊은 산골에서 너무나도 가난한 가정의 여섯 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의 삶을 오늘 날 나라 안과 밖에 95교회를 건축하도록 인도하신 분은 그가 믿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셨다. 그는 이미 <주께 하듯하라>와 <하늘 경영>을 통하여 어렸을 적의 꿈과 기도를 모두 다 차례대로 응답하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다. 그의 살아 온 길은 결코 크고 넓은 길이 아닌 좁고 협착한 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섬세한 손길은 그가 살아오는 매 순간마다에 숨어 있었다. 뉘르브르크의 링마이스터가 되려면 154곳의 위험천만한 어려운 코스를 돌고 돌아 안전하게 마지막 도착지점까지 달려가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같은 경주의 대 원칙이 있다. 빨리 달리는 것도 좋지만 매 순간 그 상황에 맞는 적정 속도를 조절하는 긴밀한 판단과 숙련된 지혜가 필요하다. 욕심으로만 달려서는 차가 전복될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 사울 임금이나 솔로몬 왕이 나중에 크게 불행해진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인생이 평생을 달려가다 보면 어디서 어떤 일을 만날는지 아무도 모른다. 말씀의 조상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나선지 얼마 후에 기근을 만나 애굽에 내려가서 살아 보려고 갔다가 부인을 애굽의 왕에게 빼앗기는 비겁한 인생의 초라한 낭패를 경험한 것처럼 말이다.
이런 일은 아들 ‘이삭’에게도 없지 않았다. 무슨 말인가. 제 살길 찾아 소돔과 고모라 성이 있는 요단 지역으로 떠나갔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 성에 살던 때에 전쟁이 일어났다. 소돔 왕을 비롯한 다섯 왕들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을 비롯한 네 왕들 간의 전쟁 중에 소돔 성에 거하던 롯이 붙잡혀 갔다. 그런 그를 전쟁 중에 되찾아 온 것은 롯 자신이 아니라 연세 많은 삼촌 아브라함이었다. 아브라함은 318명의 집안 남자들을 동원하고 쳐들어가서 조카 롯과 재물과 부녀자와 친척들을 다 되찾아 돌아 왔다. 하나님이 되 찾게 해 주신 것이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낳기까지 인생길이 순탄하지 않았다. 나이 75살에 하나님이 아들 주실 언약을 하시기는 하였으나 25년이 지난 100살에야 아들 ‘이삭’을 선물로 받게 되었다. 그 기다림이 지루하여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나선지 11년 후에 아내 사라의 몸종 하갈을 통하여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으나 하나님은 탐탁하게 여기지 않으셨다. 이스마엘의 탄생은 아브라함이 순간적으로 크고 넓은 길을 선택한 결과물이었다. 아브라함은 그런 답답한 인생살이를 살아가면서 산허리를 덮는 양떼나 소떼에만 마음을 두지 않고 나중에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 마음속에 점점 자리 잡게 되었다. 창세기 15장은 아직 아들 ‘이삭’이나 이스마엘이 태어나기 이전의 내용이다. 그런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그를 의롭게 여기셨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15:6)라는 말씀 말이다. 그 후에도 아브라함의 생애는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다. 잘 사는 것도 좋고 남들보다 더 빨리 달리는 것도 좋지만 안전하게 달려야 하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 안에서 올바르게 달려가야 한다. 비록 길이 좁고 험할 지라도 생명 길로 가야 한다. 주님이 말씀하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는 그 말씀 따라서 말이다. 권력과 명예와 출세와 재물과 돈과 인기와 자줏빛 가운의 유혹이 숨겨져 있는 처처의 위험한 코너를 잘 돌아가야만 참으로 아름답고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되는 것 아닌가. 주님은 “생명生命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다”(마7:14)고 말씀하셨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과 길은 다르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