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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부활절 2014.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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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4-04-19 17:30 조회 14,180 댓글 0
 
슬픈 부활절
 
 
안나 스패포드Anna Spafford(1842-1923)는 노르웨이에서 미국 시카고로 이민 간 가정의 딸이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매 주일마다 성실하게 교회 학교에 출석하여 예배 생활을 하였다. 교회 안에서는 14살 연상인 스패포드의 눈길이 항상 그녀의 주변을 맴돌았다. 스패포드Horatio G. Spafford(1828-1888)는 하나님을 잘 믿는 매우 신실한 청년이었다. 그는 나중에 안나와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다. 그는 나중에 시카고의 유명한 변호사요 린드 대학과 시카고 의과 대학의 법리학 교수가 되었다. 신학교 이사와 운영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 그 유명하던 무디 교회Moody Church의 재정 담당 장로였다. 43살이던 1871년에 스패포드는 사랑하는 아내와 5명의 자녀들과 함께 시카고 근교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 그 해에 그의 외아들이 세상을 떠났다. 몇 달 후에는 시카고에 큰 화재가 발생하여 그의 집도 불탔고 그의 전 재산을 모두 다 잃어 버렸다. ‘시카고 대화재’Great Chicago Fire는 1871년 10월 8일에 시작되어 이틀 만에 온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도시 한 편에서 젖을 짜던 젖소가 등유 램프를 발로 차는 바람에 불이 났다고 하기도 하고 품꾼의 실수로 불이 났다고 전해 오기도 한다. 30여만 명이 살던 시카고 시민들 가운데 10만 명 이상의 집이 불탔다. 이 화재 사고로 사망한 시민들만도 300명이 넘는다. 온 도시를 휩쓸고 지나간 화마火魔는 하나님을 그렇게 신실하게 믿던 스패포드의 집이라고 해서 예외로 하지 않았다. 그의 집도 불탔고 그의 삶의 근거지도 모두 다 사라지도 말았다. 그야말로 폐허가 되고 만 것이다. 시카고 도시의 그 유명하던 무디 교회도 완전히 불 타버렸다. 이년 뒤인 1873년에 서로의 마음을 위로하며 잿더미 위에서 재활의 의지를 키워 가던 성도들은 무디 목사가 앞장서고 복음성가 가수 생키가 동행하는 영국 집회에 휴가를 겸하여 집회참석을 결심하였다. 그 해 11월 어느 날, 무디 목사 일행은 영국 에든버러에서 전도 집회를 하고 있었고 같은 시각에 미국 필라델피아에서는 국제적인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회의가 끝나자 손님들은 각국으로 돌아가고자 S. S. Ville du Harve호에 승선하였다. 스패포드의 부인과 네 딸들도 같은 배를 타고 있었다. 스패포드도 함께 출발할 예정이었으나 급하게 정리하여야 할 사업상의 일들 때문에 우선 먼저 가족들만 출발 시킨 것이다. 뉴욕 항을 출발한 배는 1873년 11월 21일 새벽 2시경 영국 범선 Loch Earn호와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2시간 사이에 226명을 실은 배는 캄캄한 대서양 바다 깊숙이 가라앉고 말았다. 아홉살, 일곱 살, 다섯 살, 두 살짜리 네 딸들을 모두 잃고 스패포드 부인만이 선원들의 도움으로 실신 상태에서 구조되었다. 9일 만에 47명의 생존자들은 영국의 웨일즈 카디프Cardiff, Wales에 상륙하였고 그 때에야 부인은 남편에게 전보로 사고 소식을 알렸다. “Saved alone. What shall I do.” “나 홀로 구조 받았어요.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요.” 이와 같은 전보를 받아든 스패포드는 부인을 만나기 위하여 배를 타고 영국을 향해 가던 배 안에서 선장의 설명을 들었다. “바로 이곳이 그 일이 일어났던 곳입니다.” 그는 너무나도 마음이 무겁고 슬프고 침통한 심정으로 밤 새 울면서 기도하였다. 그런데 새벽 3시경 그의 마음속에는 형용할 수 없는 고요와 평안이 찾아 들었다. 그는 그 당시의 심경을 종이 위에 적어 내려갔다. 그는 그 날 밤 울며 슬퍼하며 꼬박 밤을 지새웠고 몇 줄의 글을 써 내려갔다. When peace like a river attendeth my way, When sorrows like sea billows roll; Whatever my lot, Thou hast taught me to say, "It is well, it is well with my soul." It is well with my soul; It is well, It is well with my soul. 이렇게 시작된 다섯 절의 글 들은 삼 년이 지난 1876년에 유럽 선교를 마치고 귀국한 무디 목사와 찬양 사역자 브리스Philip Paul Bliss(1838-1876) 에게 전해졌다. 작곡 의뢰를 받은 브리스는 그 해 11월 마지막 금요일에 시카고 페어웰 홀에 천명 이상이나 모인 사역자들의 집회에서 처음으로 그 찬송을 소개하였다. 그 날은 우리말 찬송 413장, ‘내 평생에 가는 길’이 탄생하는 날이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그 해 말 브리스와 부인은 두 아이들을 친지에게 맡긴 채로 집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뉴욕 주 버펄로에서 시카고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 1876년 12월 29일인 그 날은 금요일이었다. 저녁 8시 경에 오하이오 아쉬타버러에 가까이 가던 기차가 횡단할 즈음에 철교가 무너져 내렸다. 그 사고로 기관차와 7대의 객차들이 얼음이 꽁꽁 언 낭떠러지의 깊은 강물 속으로 떨어졌다. 그 아수라장의 현장에서 목숨을 건진 사람들도 기차에 불이 나는 바람에 재목과 기타 침목들이 떨어지는 바람에 그 속에 갇혀 불에 타 죽고 말았다. 그 사고로 160명 승객 가운데 59명의 시체를 찾아냈고 14명이 생존 했을 뿐 나머지 사망자들은 시체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불 타 버리고 말았다. 그 참사에서 살아나온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브리스는 불을 모면했지만 그의 부인이 불꽃 속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것을 보고 자기 부인 곁에 남아서 결국 맹렬한 불꽃 속에서 산화하고 말았다. 재난의 현장을 찾은 그를 사랑하는 친구들이 삼일 동안 사고 현장에서 물품들을 긁어모았지만 브리스 부부의 시체는 더 이상 찾을 수가 없었다. 그 해 브리스의 나이는 38살이었다. 스패포드 부부와 브리스 부부는 이 세상의 그 어떤 이들보다 열배 백배 슬픈 일을 겪다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저들의 신앙의 고백을 담아서 작사 작곡한 찬송, ‘‘내 평생에 가는 길”은 열방 중에서 그 얼마나 많은 영혼들을 위로하고 매 만지며 격려하는 성령이 임재하시는 찬송으로 불리어지고 있는가. 이 땅에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오고 부활 신앙이 전파 된 이후로 올 해의 부활절은 너무나 슬프고 마음이 우울하며 침통한 분위기 가운데 맞이하게 되었다. 아마도 1905년 을사 늑약이 있던 해의 부활절이나 전국 강토에서 방방곡곡마다 삼일 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의 부활절도 올해의 마음과 같이 슬프고 우울하고 비통하였을 것이다. 그해 4월 1일에 충남 천안군 병천면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 만세를 부르던 유중권 열사와 이소제 여사를 포함한 19명이 일본 경찰의 총칼에 숨졌다. 유중권은 유관순의 아버지이며 이소제 씨는 그녀의 어머니이다. 16살 소녀 유관순은 아우내 장터 만세 시위 주동자로 붙잡혔고 일본 헌병대에 의해 투옥 되었다. 공주를 거쳐서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 이감 된 그녀는 기회 있을 때마다 법정에서 일제의 한국 침략을 규탄하고 복역 중에도 큰 소리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는 하였다. 그럴 때마다 끌려 나가서 온갖 고문을 당하던 그녀는 다음 해인 1920년 9월 28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17살에 옥사하였다.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6. 25 전쟁 동안의 부활절을 비롯하여 이 땅에 슬프고 침통한 부활절은 한 두 해 가 아니었다. 금번에 진도 앞 바다에서 어려운 일을 당한 세월 호 침몰 사건으로 슬픈 일을 겪고 있는 수 백 가정의 아픔을 그 누가 무슨 말로 위로하고 감싸 줄 수 있을까. 성경 구약의 욥이 당하였던 열 명의 자녀들을 한 자리에서 잃어버린 슬픔을 그의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 말로 위로하지 못하였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다만 이렇게 기도드릴 뿐이다. “주여 두 손을 모아 간절한 마음으로 비오니 저들 큰 슬픔 당한 가족들의 마음을 주께서 친히 위로하시며 순간마다 붙드시고 감싸 주시옵소서. 현장을 수습하기 위하여 애쓰는 이들을 위로하시며 아비규환 가운데 숨져간 어리고 젊은 영혼들을 비롯한 깊은 바닷물 속에 잠겨 버린 이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불쌍히 여겨 주시고 하나님 나라의 위로와 영원한 안식을 덧입혀 주시옵소서. 아멘” 성경은 선포한다. “나는 부활이여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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