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레스 오블리주
14세기에 프랑스와 영국 간에 백여 년간의 전쟁이 계속되었다. 그 당시 프랑스의 도시 ‘칼레’는 영국군에게 포위당하였다. 칼레는 영국의 거센 공격을 막아내려 안간힘을 다하였지만 결국은 항복하고 말았다. 그 때에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에게 자비를 구하는 칼레시의 항복 사절단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점령국인 영국은 “모든 시민의 생명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누군가가 그동안의 반항에 대해 책임을 져야한다”며 “이 도시의 대표 6명의 목을 매 처형 시켜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하였다. 모두가 머뭇거리며 주저하는 상황에서 칼레시에서 가장 부자였던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Eustache de St Pierre가 처형받기를 자청하였다. 그 후에 이어서 시장과 재산가와 법률가 등의 귀족들도 칼레 시민을 위하여 자신이 처형 받겠다고 나섰다. 그들은 다음날 처형을 받기 위해 교수대에 모여 들었다. 그러나 임신 중이던 왕비의 간청을 들은 영국 왕 에드워드 3세Edward III(1327-1377)는 죽음을 자처했던 시민 여섯 명의 희생정신에 감복하여 저들 모두를 살려 주었다. 프랑스어인 ‘Noblesse oblige’, nɔblɛs ɔbliʒ란 “귀족성은 의무를 갖는다.”는 뜻이다. 원래 노블리스는 ‘닭의 벼슬’을 의미하고 오블리주는 ‘달걀의 노른자’라는 뜻이라고 한다. 즉 ‘닭의 사명은 자기의 벼슬을 자랑함에 있지 않고 알을 낳는데 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렇다. 부와 권력과 명예와 사회적인 지위는 그 만큼의 책임이 뒤 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사회지도층에게 사회에 대한 책임이나 국민의 의무를 모범적으로 실천하는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용어이다. 우리는 천년 로마가 멸망한 원인을 분석하는 역사가들의 글을 접할 때가 많다. 그러나 반면에 이름 없던 로마가 제국을 이루고 천년의 번성기를 가질 수 있었던 저번에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묵묵히 실천한 로마제국 귀족들의 불문율 덕분이었다. 로마 귀족들은 자신들이 노예와 다른 점은 단순히 신분이 다를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부담하고 담당해야만 하는 의무도 다르다는 자부심이 뛰어났다. 초기 로마 공화정 시대의 집정관인 'consul'은 선거를 통하여 선출된 고위 공직자들로서 귀족 계급을 대표하는 신분이었다. 그런 저들은 한니발 때에 카르타고와 벌어진 포에니 전쟁에 참전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제 2차 포에니 전쟁 중에는 16년 동안에 13명의 집정관이 최전선에 나서서 전사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로마에서는 병역의무를 실천하지 않은 사람은 호민관이나 집정관 등의 고위공직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엄격하였다. 또한 고대 로마 시대에는 자신의 재산을 헌납하여 공공시설을 신축하거나 보수한 귀족에 대해서는 그 건물이나 시설물에 그의 이름을 붙여 주기도 하였다. 귀족들은 이를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또한 그와 같은 법을 제안한 정치인의 이름을 그 법안에 붙여 부르기도 하였다. 그런 영향은 나중에 미국이 발전해 오면서 자신이 이룬 재산을 헌납하여 세운 대학교 중에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가 세운 카네기멜론 대학교, 은행가 존스 홉킨스가 세운 존스 홉킨스 대학교, 존 락펠러의 이름을 딴 락펠러 대학교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현재 영국의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Elizabeth II (1926-)는 19살 때인 1945년에 아버지 조지 6세George VI(1895-1952)의 허락을 받고서 또래 소녀들이 봉사하고 있는 영국 여자 국방군의 구호품 전달 서비스부서에서 군복무를 하였다. 이후로 영국은 징병제를 폐지하였지만 영국 왕실의 왕족과 왕실에 속한 귀족들은 반드시 왕실 내부 규율과 영국 병역법에 따라 장교의 신분으로 군복무를 하도록 규정하여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앞장서고 있다.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전쟁 때인 1982년에 영국의 왕자인 앤드류가 헬기 조종사로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전쟁에 참여한 것은 그래서 큰 화젯거리였다. 조선 시대 정조 임금 당시인 1793년에 제주도에 큰 흉년이 들었다. 수 백 명이 굶어 죽어갈 정도였다. 이 소식을 들은 당시의 여성인 거상 김만덕金萬德(1739-1812)은 자신의 전 재산을 정리하여 쌀을 사서 제주도 사람들에게 ‘진휼미’賑恤米로 분배하였다. 그 후 제주도민들은 그녀를 ‘의녀’義女라고 칭해 왔다. 김만덕은 12살에 부모를 잃고 고아처럼 자랐으나 열심히 장사하여 번 돈으로 흉년의 때에 발 벗고 나서서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린 것이다. 경주 최 부잣집은 ‘백리 안에 굶는 이가 없게 하라’는 가훈을 따라서 베푸는 생활을 늘 실천하였던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좋은 예이다. 군수업으로 번 막대한 재산을 독립운동에 쏟아 부었다는 독립 운동가 최재형崔在亨(1858-1920)이나 독립군의 김좌진金佐鎭(1889-1930) 장군이 자기 집안의 노비를 해방하고 이 땅의 독립을 위하여 무장투쟁의 선봉에 직접 나섰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미래를 위하여 후세들을 양성하는 교육 사업에 매진한 일화도 그 좋은 본보기이다. 유한양행 설립자인 유일한柳一韓(1895-1971)은 9살 때에 선교사의 손을 잡고 미국에 건너가서 성장하였다. 그는 귀국 후에 정경유착이나 탈세 등의 부정을 막는 경영뿐만 아니라 전 사원이 주인이라는 참여 의식을 갖기를 강조하였고 경영 수익금으로 세운 학교가 유한공업고등학교이다. 그는 혈연관계를 떠나서 전문 경영인에게 회사를 인계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세상 이야기와 일화를 들면 끝이 없으니 성경에 나오는 일화를 좀 더 생각하자. 어느 날 예수께서 여리고 성으로 들어가고 계셨다. 그 성에 삭개오란 이름의 세리장인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키가 작았다. 예수를 만나보고 싶은 마음에 체면을 무릎 쓰고 큰 길 가의 돌무화과 나무 꼭대기에 기어 올라가 나뭇잎 사이에 몸을 숨기고 길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아셨는지 그 밑을 지나가시던 예수께서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그의 이름을 부르셨다.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 즐거운 마음으로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시고 들어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성민들은 “예수께서 죄인의 집에 유하려고 들어갔도다.”하고 수군거렸다. 예수를 집 안에 모신 삭개오는 앉지도 않고 예수 곁에 서서 이렇게 고백하였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그 때 예수께서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는 말씀을 해 주셨다. 이는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필자를 비롯한 성경의 독자들은 지난 이천년 동안 그 삭개오의 나중의 생활이 어떻게 변화되었을까 하고 궁금하게 생각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이런 것이 아닌가. 이 세상에 자기 목숨 귀하지 않고 자기 재산 아까워하지 않는 이가 그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목숨이란 것이 제가 지킨다고 천년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또한 재산이란 것이 선한 목적과 용도로 사용하지 아니하면 나중에 그 누군가 엉뚱한 손길이 끼어들어 와서 가치 없이 바람에 날아가는 겨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루는 어떤 사람이 예수께 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고 물었다. 그 때 예수께서 “네가 영생하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대답해 주셨다. 그 때 청년은 다시 묻기를 “모든 계명을 제가 지키며 살아 왔는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하고 말을 이어 갔다.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19:21) 이 말씀을 들은 그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예수의 곁을 떠나갔다. 천국은 베풀고 나누고 돌아보고 섬기는 곳에서 시작된다. 예수께서는 평소에 사랑을 실천한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