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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지성래목사  | 칼럼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아 금식하던 왕 2015.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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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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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5-02-15 06:54 조회 18,170 댓글 0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아 금식하던 왕
 
 
올해도 사순절(四旬節)이 다가 왔다. 사순절이 시작되는 첫 날을성회(聖灰) 수요일’(Ash Wednesday) 혹은 '재의 수요일'이라고 한다. 이날 성도들은 이마에 재를 바르며 인생이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갈 것을 시인하고 고백하며 주님을 향한 믿음을 새롭게 다짐하는 예배를 드린다. 동서고금에 왕이나 그 시대 최고 통치자의 입는 옷은 그 당대 최고 최상의 의복이었다. 가령 조선시대 임금들의 곤룡포는 임금의 권위를 수놓은 정교하게 각종 문양으로 장식된 비단옷이었다. 그러나 조선 제 22대 임금 정조(正祖, A. D 1752-1800, 재위 1777-1800)는 달랐다. 25살에 왕위에 오른 저는 이미 학자였고 평생 의식주가 검소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의 식사는 늘 단촐 했고 그는 화려한 곤룡포 대신에 여름이면 평범한 삼베옷과 겨울이면 평민들의 무명옷을 세탁하여 입는 소박한 생활을 이어 갔다. 규장각의 설치와 운영에 힘을 써서 역대 왕의 문적들을 수집해 보관하게 하고 중국에서 보내온 서적을 비롯한 많은 책들을 거두어 수장하게 하였다. 또한 그는 당쟁을 뛰어 넘어 충역(忠逆), 시비(是非), 의리(義理)를 분명히 하는 탕평책을 추진하는데 비중을 두었다. 성경인 요나서 3장에 보면 왕이 그 화려한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은 적이 있었다. 성경에 그 왕의 이름은 소개되어 있지 않다. 역사가들은 그가 살만에셀 4(BC782-773)이거나 그 후대의 두 대를 이었던 아슬란 3(BC 772-755)나 아술니라리 5(BC754-745)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런 그 임금이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아서 금식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먹지도 않고 물도 마시지 않는 금식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니느웨 성민들에게 조서를 내려 선포하였다.“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3:7-9) 하나님은 선지자 요나를 니느웨 성에 보내셔서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3:4)고 니느웨 성의 멸망을 예고하였다. 평민이든 임금이든 앞으로 얼마 못가서 망한다는데 여전히 주색잡기를 즐기며 흥청망청 지낼 이가 이 세상 그 어디에 있겠는가. 천년 로마라도 역사 속에 사라진 것을 보면 흥망성쇠가 없는 역사란 물론 없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그 패망의 원인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니느웨의 수도였던 앗수르 지역에 인간이 자리 잡고 살기 시작한 역사는 B. C 7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후대에 니느웨를 웅장한 도시로 발전시킨 사람은 성경에 산헤립이라고 소개된 왕 센나케리브(Sennacherib, B. C ?-681)였다. 그는 훌륭한 거리와 광장을 설계하고 그곳에 그 이전 역사의 그 무엇과 비길 데 없는 최고의 왕궁을 건축하였다. 이 도시의 흔적들은 후대에 거의 발굴되었으며 왕궁은 전체면적이 가로 180m, 세로 189m 되는 거대한 규모였다. 이곳에는 80개의 방이 있었으며 대부분의 방들에는 정교한 조각품이 가득하였다. 유명한 서판 유물들의 대부분이 여기서 발견되었다. 주요출입구 몇 군데에는 측면에 사람 머리를 한 황소의 조상들이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이 시대에 니느웨는 총면적이 700ha 가량이었으며 성벽에는 거대한 입구가 15군데 있었다. 고도의 기술수준을 보여주는 18개의 수로 망을 통해 구릉지대에서 물을 끌어다 사용하는 관개 수로가 발전하였다. 그런 거대 국가의 수도 니느웨에 자리 잡고 태평성대를 누리던 왕이 화려한 왕복을 벗고 초라한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아서 금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대가 융성해지면 왕이든지 대신이든지 백성들 중의 그 누구이든지 타락하는 것은 역사의 수순과도 같다. 당시의 앗수르도 예외는 아니었다. 니느웨의 시대 상황은 성경 요나서 12절이 소개한다.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그렇다. 당시 앗수르를 비롯한 특히 수도인 니느웨 성민들의 생활상은 악독이 가득하였다. 그런 이방 나라의 성을 심판하시겠다는 예언이 선포되었다. 니느웨 성 안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만도 십이 만 명이었다. 대략 60만 명 이상이 살던 고대의 거대한 성이었다. 그런 도성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여 멸망시키려 하신 것이다. 선지자 요나를 통한 이와 같은 예언의 말씀을 전해들은 왕이 나서서 백성들과 함께 금식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을 믿지 않던 그 왕의 조서에 하나님 운운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3:9) 이 내용은 무엇을 말하는가. 니느웨 성의 백성들이 구원 받는 길은 좋은 옷을 벗어 버리고 베 옷을 입었다든지, 왕의 옥좌(玉座)를 사양하고 재 위에 내려앉았다든지 혹은 금식하였기 때문에 악독한 죄악으로부터 용서 받은 것은 아니다. 용서와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몫이다. 죄를 용서하는 사죄와 구원의 은총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다. 니느웨 성의 왕은 하나님을 믿던 왕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조서에 담긴 평소의 그의 사상과 신관(神觀)을 보면 놀랍지 아니한가. 오늘 날 신앙의 위기는 교회 안에 있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무리들 가운데에 더욱 심각하다. 믿는 자들조차도 하나님이 누구신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성령님이 누구신지에 대하여 오해에 빠져 있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을 보게 된다. 니느웨의 왕은 그 동안 하나님을 모르고 지내던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고백을 보면 하나님의 절대 은총에 의한 구원을 간절히 기다리며 의지하는 겸손한 마음가짐이 있었다. 그렇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과 입의 말과 행위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나의 소행을 나 자신보다 훨씬 더 낱낱이 잘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요나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 이후에 분열된 북왕국 이스라엘의 정치적, 경제적 번성기였던 여로보암 2(B. C 783-773)때의 선지자였다. 물론 그 당시의 앗수르는 그 이전 시대보다는 국력이 다소 약화되어 가던 때였다. 앗수르는 북방 신흥국가였던 아라랏과의 장기전과 큰 전염병(B. C 765-759)으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백성들이 죽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B. C 763615일에 있었던 완전일식으로 인하여 온 앗수르 땅에 대 낮에 암흑이 드리우는 불길한 징조를 보게 되면서 백성들의 민심이 동요되고 있었다. 그와 같은 시대에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이스라엘의 선지자 요나를 통한 회개의 촉구와 멸망 받으리라는 심판의 경고는 저들 백성들과 왕의 마음까지도 사로잡는 급박한 신의 음성으로 들렸던 것이다. 저들은 왕과 백성들이 다 함께 회개하기 시작하였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리라던 니느웨성에 용서가 임하였다. 우리나라가 잘 사는 나라가 된 것은 사실이나 총리를 비롯한 지도자를 인준하기 위한 국회 청문회를 거칠 때에 보면 나라 안밖에 청백리가 너무 귀한 안타까움이 항상 마음 한 구석에 아쉬움으로 남고는 한다. ‘청백리’(淸白吏)란 사전에 보면 성품과 행실이 올바르고 무엇을 탐하는 마음이 없는 관리라고 정의되어 있다. 창세기의 요셉과 같고 다니엘서의 다니엘과 같으며 느헤미야서의 느헤미야와 같은 그런 인물은 탐심이 없었다. 출애굽기에 보면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에게 정치 철학을 교훈하는 내용이 나온다. 혼자 분주하게 일하며 기력이 쇠해 가던 모세에게 장인 이드로는너는 온 백성 가운데서 능력 있는 사람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不義)한 이익(利益)을 미워하는 자를 살펴서 백성 위에 세우라”(18:21)고 가르쳐 주었다. 일일이 언급할 수조차 없이 구설수에 오르는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 시대에 누군가가 앞장서서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아 금식하며 회개 운동을 시작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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