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가 죽었는가
2월 4일이 입춘(立春)이다. 아직은 춥지만 올 겨울도 이렇게 지나가고 있다. 지난 주말 오후, 올 겨울 처음으로 낮의 햇살이 꽤나 따뜻하게 느껴졌다. 양(羊)의 해인 올해에 모든 이들에게 주님 안에서 좋은 일, 기쁜 일, 복(福)되고 길(吉)한 일만 넘쳐 나기를 소원하는 마음 가득하다. 지난 1월 22일, 내란선동 혐의로 유죄가 확정된 이석기(53) 전 통합진보당 의원은 대법원 대법정의 최종심의에서 항소심과 마찬가지로 징역 9년에 자격정지 7년을 선고받았다. 그 순간 그는 방청석을 향해 “사법정의는 죽었다”고 외쳤다고 한다. 그가 주장하는 ‘정의’란 무엇일까. ‘정의’(正義)란 주관적인 개념이 아니라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다. 몇 해 전에 하버드대학교 마이클 샌델 교수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국내에서 인문학 도서의 판매량은 10만부를 넘기기가 어렵다는데 그 책은 60만 부 이상이 팔렸다고 한다. 그 책의 주제인‘정의’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972년. 우루과이대학의 럭비 팀을 태운 경비행기가 안데스 산맥에서 추락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비행기는 부서져 동체만 남은 채로 미끄러졌고 해발 3500미터의 눈이 뒤덮인 안데스 산맥에 불시착하였다. 승객 몇은 즉사하고 중상 입은 사람들은 높은 산 위에서 조난을 당하였다. 조난당한 사람들 중에 그나마 상태가 양호했던 몇몇은 생존자들을 돌보며 구조대를 기다렸다. 그러나 구조대의 소식은 없고 일주일이 지나가 버렸다. 그들은 라디오 방송을 청취하던 중에 수색작업을 포기했다는 절망적인 보도를 듣게 되었다. 영하 40도에 이르는 극심한 추위 가운데서 끔찍한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조난당한 사람들은 먼저 죽어간 승객들의 인육을 먹으며 72일간을 견뎌냈다. 그들 중에서 29명은 죽고 16명은 극적으로 살아남아 구출되었다. 이 사고의 내용은 1993년에‘얼라이브’(Alive)라는 영화로도 제작된 적이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정의’(正義)가 무엇인가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처럼 ‘정의(正義)에 대한 정의(定義)’는 한 두 마디로 명쾌하게 단정하기 어려운 복잡한 삶의 과정이다. 국어사전에 보면 “정의란 사회나 공동체를 위한 옳고 바른 도리”혹은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 “개인과 사회를 구성하는 올바르고 공정한 도리”라고 설명하였다. 독재 국가나 절대 권력을 가진 체제 아래서의 ‘정의’란 자기 집단의 이익을 우선으로 한다. 그러므로 ‘정의’란 보편적이고 상식적이며 누구에게나 골고루 자유와 혜택이 돌아가는 올바른 것이어야 한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정치 철학 교수를 지낸 존 롤즈(John. Rawls, 1921~2002)는 그의 책, <정의론>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라고 설명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 C 384-322)는 "정의란 그에 의해 각자가 자기의 것을 취하며, 법이 정하는 바대로 하는 미덕이다. 반면에 부정의란 그에 의해 누군가가 남의 재물을 취하고 법에 따라서 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즉 모든 면에서 골고루 서로가 서로에게 억울하지 않게 대하며 살아가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라고 설명한 것이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도 인간 사회의‘정의’에 대한 고민이 심각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예레미야 5장 1절에 보면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는 말씀이 나온다. 하나님의 관심은 이 두 가지 즉 ‘정의’와 ‘진리’로 귀결된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진리 안에서 자유하게 되는 길이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고 하였다. 그러므로 ‘정의’라는 주제도 ‘진리’안에서라야만 그 대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이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인간은 정의를 떠났고 공의를 멀리하며 살아 왔다. 하나님은 아모스 선지자를 통하여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암5:7)라고 책망하였다. 아모스 선지자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책망의 말씀을 전하기 전에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암5:4, 6)고 권면하였다. 하나님을 찾는 민족과 개인으로 살지 아니하면 불 같이 임하여 멸할 것이고 그 불을 끌자가 없게 하시겠다고 엄히 경고하셨다.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시다. 정의란 세상과 인간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며 기준이시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소돔 성을 향하여 기도하는 아브라함의 기도 내용이 나온다. 그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하고 여쭈었다. 그 때 하나님은 “소돔성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을 수 있다면 그 의인들로 인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는 대답을 하셨다. 그 의인이란 하나님의 정의의 저울에 달아 보아서 합격할만한 인생들이다. 그러나 소돔 성은 아브라함의 기도의 내용처럼 의인 열 명을 찾기도 힘든 도시였다.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명령은 분명하다. “너는 마땅히 정의만을 따르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리라.”(신16:20)고 하셨다. 모세의 축복 기도인 신명기 33장 21절에 보면 야곱의 후손인 ‘갓’지파에 대하여 축복하기를 “여호와의 공의와 이스라엘과 세우신 법도를 행하도다.”고 칭찬하였다. 하나님 앞에 일천 번제를 드리며 기도하던 솔로몬 왕은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그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항상 주사 오늘과 같이 그의 자리에 앉을 아들을 그에게 주셨나이다.”(왕상3:6)라고 주께서 베풀어 주신 큰 은혜에 감사하는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솔로몬의 배 다른 형제요 다윗의 아들이었던 압살롬은 날마다 일찍이 일어나서 예루살렘 성문 곁에 서서 임금 다윗에게 재판을 청하려고 나오는 백성들의 억울한 송사를 직접 나서서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백성들에게 “내가 정의 베풀기를 원하노라”(삼하15:4)고 말하기는 하였으나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부왕(父王) 다윗에 대한 반감과 백성들의 마음을 미혹하려는 반역자의 피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사무엘하 15장을 계속하여 읽어 내려가다 보면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압살롬이 훔치니라.”는 말씀이 그 당시의 상황을 전해 준다. 사무엘하 23장에는 다윗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남긴 마지막 말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사람을 정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삼하23:3-4)고 하였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 유대 땅으로 귀환한 무리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였다. 하나님께서 스룹바벨을 앞장 세워서 그런 일이 가능하게 해 주신 것이다. 그 후에 세월이 오래 지나도 해결 되지 않던 무너진 지 오래된 예루살렘 성곽 공사를 52일 만에 마무리한 역사적인 총독 느헤미야는 “그러나 우리가 당한 모든 일에 주는 정의로우시니 우리는 악을 행하였사오나 주께서는 진실하게 행하셨음이니이다.”(느9:33)라고 고백하며 공의와 진실하심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높이며 영광 돌리는 장면이 나온다. 욥기에 보면 하나님은 욥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은 공의(정의)를 굽게 하지 아니하시며(욥8:3, 34:12, 37:23) 공의(정의)를 미워하지 아니하시는 분이라고 하였다. 예수님도 ‘공의(정의)와 사랑’(눅11:42)을 버리면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정의가 죽었다고 외치는 이들이 주장하는 정의란 과연 무엇일까 참으로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