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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구하는 능력 2014.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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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4-12-27 20:57 조회 12,996 댓글 0
 
남을 구하는 능력

이 세상에 자기 목숨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이들이 그 누가 있으랴. 물론 정신적으로 질병을 앓고 있거나 심약한 이들 중에는 자신의 목숨을 함부로 대하는 이들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 자신의 재산, 자신의 가족, 자신에게 속한 그 모든 것들에 대하여 집요한 애착심을 갖고 살아간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어려움을 당하는 이웃의 목숨을 구해 주는 일을 천직(天職)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그 들 중의 하나가 ‘스쿠버 다이빙’을 전문적으로 훈련 받은 이들이다. 이는‘스킨 다이빙’과 그 차원이 크게 다르다. ‘스킨 다이빙’은 간단한 호흡장치인 스노클과 오리발만 착용하고 수면이나 얕은 수심에서 잠수하는 정도의 놀이를 말한다. 그러나 산소통을 메고 깊은 물속에 잠수하는 것은‘스쿠버 다이빙’이라고 한다. '스쿠버'(SCUBA)라는 용어는 '자급식 수중호흡장비'(Self-Contained Underwater Breathing Apparatus)라는 영어 단어의 머리글자이다.‘물 속의 폐’라고 불리는 ‘아쿠아 렁’(aqua lung) 개발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스쿠버 다이빙 기술이 민간에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1959년 '잠수 교관 연합'(NAUI)이 결성되었다. 미국인 다이버가 1966년 또 다른 단체인 '전문 잠수 교관 연합'(PADI)을 출범시켰다. 저들은 수중 18m까지 잠수가 가능한 '오픈워터 다이버' 등 잠수 능력에 따라 자격증을 세분한다. 한국에도 여러 개의 민간잠수단체가 있다. 지난 4월 16일의 세월호 침몰 현장에서 생존자를 찾아보려 애쓰고 시신을 수습하는 일에 남다른 공헌을 한 이들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세월호 구조 작업을 돕다가 지난 5월 5일에 숨진 이광욱 잠수사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올해 53살이었다. 보건복지부는 이씨가 숨진 뒤 7개월이 지난 금번 12월 16일에 그를 ‘의사자’로 지정했다. 그는 잠수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도 바다에서 평생을 지냈다. 하늘을 마음대로 날아가는 것처럼 물속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는 것은 인간의 오랜 꿈이었다. 잠수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1860년대 초 프랑스의 기술자가 처음으로 원시적인 산소통을 개발했다. 물이 넘친 탄광에서 위험에 처한 이들을 도우려는 필요에서였다. 프랑스 해군이 1894년 이 기술을 군사장비로 채택해 세계 최초로 잠수장비를 개발했다. 이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기술 개발이 진행되었다. 1946년 프랑스의 과학자 자크 쿠스토와 에밀 가냥이 기술을 발전시켜 현대적 잠수장비를 개발해서 특허를 냈다. 그것이 ‘물 속의 폐’라고 이름 붙여진 ‘아쿠아 렁’(aqua lung)이다. 이광욱 잠수사의 선친인 이진호씨는 1931년 생으로 군에서 이 기술을 접했다고 한다. 그는 6. 25가 일어나던 한 해 전인 1949년 3월에 해군에 병사로 입대한 후 1960년 상사로 제대했다. 그 동안 해군 함정의 기관실과 소해정 근무 등을 두루 거쳤다. 소해정은 적이 설치한 기뢰를 제거하는 작업을 말한다. 이진호씨는 해군 'UDT‘(수중폭파부대)에서 '스쿠버 다이버'로 맹활약하다가 재대한 후로 1960년대에 한강변에서 80여구의 실종 익사체를 인양했고 200여 명의 목숨을 건져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도왔다. 2001년에 선친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아들 형제는 아버지의 하시던 일을 이어왔다. 이광욱 잠수사는 노모와 아내와 자녀들에게는 큰 슬픔을 남기고 떠났으나 그의 죽음을 국가는‘의사자’로 정하고 기억하게 된 것이다. 국회의 한 보고서에 의하면 군·경·민간 잠수사 등 세월호 사건 관련 잠수사 434명 가운데 45명이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우울감, 스트레스, 자살사고 등을 겪는 '위험군'이라고 한다. 예수님은“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람이 없나니 너희는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나의 친구라.”(요15:13-14)고 말씀하셨다. 입법부와 사법부와 행정부를 비롯한 정치, 경제, 기업, 군대, 병원, 대학 등등에서 처처마다 ‘갑’(甲)의 횡포가 한해의 말미를 우울하게 하고 있다.  이와 같은 때에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그의 형상대로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갑의 자리에 머물러 계시지 않고 이 땅에 ‘남을 섬기는 자’의 ‘을’(乙)의 모습으로 오셨다. 주님의 생애는 을의 모습이셨다. 예수님은 말구유에 누이시고 머리 둘 곳 없이 사시다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 삼일 간 누워 계셨으나 부활 승천하셨다. 성경은 복음의 진리인 을의 영원한 승리를 말씀한다. 이는 창세기의 요셉이 그러하고 애굽의 바로 왕 앞에 섰던 출애굽의 중심인물인 모세가 그러하지 않나. 사사기 7장의 기드온 300명의 용사로 미디안과 아말렉의 메뚜기 떼처럼 많은 대적을 물리쳤던 이야기나 물매 돌 한 개로 골리앗을 쓰러트리고 블레셋과의 전쟁을 끝나게 하였던 사무엘상 17장의 소년 다윗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역사는 갑의 힘에 눌려 있으나 한 발짝 물러서서 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정의와 공의의 편에 선 ‘을’(乙)의 사람들을 통하여 갑에게 말씀하시고 때로는 갑을 책망하시고는 하였다. 다니엘서의 주인공인 다니엘은 그 시대의 갑이 아니었다. 그러나 포로로 끌려간 유대 청년 다니엘은 할례 받지 않은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내려 주는 음식과 포도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였고 열흘 동안 채식과 물로만 배를 채웠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더욱 아름다웠고 더욱 윤택하였다. 하나님은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에게 학문과 지식을 깨달아 아는 지혜를 주실 뿐만 아니라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게 해 주셨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만나 본 느브갓네살 왕은 저들의 지혜가 온 바벨론의 박수와 술객들보다 십 배나 너 나은 줄을 알았다. 번민하던 느브갓네살 왕의 꿈을 해석한 것도 나라 안의 그 어떤 다른 술객이 아니라 다니엘이었다. 다니엘의 꿈 해석을 들은 느브갓네살 왕은 다니엘 앞에 엎드려 절했고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많은 예물과 향품을 그에게 주도록 하였다.(단2:46)  다니엘의 꿈 해석 이후 느브갓네살 왕은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내가 능히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었으니 네 하나님은 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이시로다.”(단2:47)라고 말하며 하나님을 높였다. 하나님은 다니엘을 사자굴 속에서도 건지셨고 그의 친구들을 평소보다 일곱 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 가운데서도 구하여 내셨다. 이 땅에 의사자로 지정된 이광욱 잠수사와 같은 의로운 이들이 처처마다에 넘쳐 나는 나라가 되기를 소원하는 마음 가득하다. <부흥하는 세대여 통곡하라>는 레오나드 레이븐힐의 책에 보면 모세와 바울과 존 녹스와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예를 든다. 만약에 모세나 바울이 자기 목숨만 귀한 줄 알고 살았다면 성경이 저들의 삶을 그렇게 비중있게 다루었겠느냐는 말이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 존 녹스(John Knox, 1514-1572)가 늘 “내게 성공을 주소서”라는 정도의 기도의 사람이었다면 역사가 그의 이름을 기억이나 하였겠느냐는 것이다. 존 녹스는 “주여 스코틀랜드의 영혼을 저에게 주소서. 그렇지 않으면 제 목숨을 거두어 가소서”라고 기도하며 영혼 구원에 힘을 쏟았다.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1813-1873)도 마찬가지다. 만약에 그가 “주여 저에게 아프리카 탐험의 문을 열어 주시고 저의 탐험 능력이 세상에 알려 지게 해 주십시오”라는 정도의 기도의 사람이었다면 역사가 그를 기억해 주었겠는가. “오 주여! 아프리카의 영혼들이 주님의 구원을 받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였고 그는 마지막까지 아프리카의 밀림 속에서 그런 기도의 응답을 성취하기 위하여 동분서주 하다가 무릎을 꿇은 채 기도하는 모습으로 숨을 거두었다. 성경은“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 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12:3)고 약속하셨다. 너도 나도 ‘웰 빙’(well-being)열풍에만 관심을 쏟는 이 때에 남을 구하는 구원의 능력을 덧입는 ‘웰 다잉’(well-dying)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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