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을 하는 것과 같은 사랑
며칠 전, 선배 가정의 따님 결혼식에 축하하기 위하여 참석하였다. 예식장의 내부가 마치도 교회의 예배당 같은 느낌을 주었다. 예식장 실내 전면 중앙의 높다란 벽면은 잔잔하게 벽을 타고 내려 흐르는 폭포수로 처리해서 하늘에서 이 땅에 임하는 축복이 계속되기를 염원하는 하객들의 마음을 작품화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시선을 좀 산란하게 하는 약점 외에는 상징성이 있는 실내 분위기였다. 후면 상층 베란다에서 남녀혼성 4인조 성악가들의 세련되고 다듬어진 축하 노래를 계속하는 시간도 좋았다. 예식장의 그 곳 내부 예식처 이름도 ‘그레이스 채플’(grace chapel)이라고 정한 것을 보면 아마도 사업주가 기독교인이 아닌가 싶다. 늠름하고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씩씩하게 입장하는 신랑과 신앙 안에서 성장하였고 준비된 실력을 갖추고 사회생활도 잘 하고 있다는 신부의 모습이 서로에게 잘 어울리고 안정되어 보였다. 주례자의 주례사 중에 신랑 신부에게 결혼 준비를 위하여 미리 만나서 나누었던 대화 내용이 소개 되었다. “신랑 될 이는 신부될 이의 무엇이 그렇게 좋아서 서로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신부될 이를 대하고 있으면 마치도 마약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감정을 느껴서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대답하더란다. 상대방을 향한 사랑의 감정에 빠져 있는 자기의 심정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리라고 여겨졌다. ‘마약을 하는 것과 같은 사랑’ 혹은 ‘마약에 중독된 것과 같은 사랑’이란 어떤 상태일까.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각기 제 나름대로 그 누군가를 사랑하기도 하고 혹은 그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기도 하면서 살아간다. 그 사랑의 대상이 사람일수도 있고 개나 고양이와 같은 반려동물일수도 있고 꽃이나 새나 수석(壽石)인 돌멩이나 음악, 미술, 도예, 조각, 연극, 뮤지컬, 오페라나 각종 스포츠나 아니면 자기가 하고 있는 그 일 즉, 천직처럼 여기는 직업일 수 있다. 사람이 그 무엇인가에 깊이 빠져서 취미 정도가 아닌 중독 상태로 발전할 수 있다. 요즘처럼 사랑이 금방 식어 버리고 변질 되어버리는 때에 년 말의 극장가를 따뜻하게 녹이는 다큐 물의 영화 한 편이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라는 제목의 영화 말이다. 주인공인 98세의 조병만 할아버지와 89세의 강계열 할머니의 사랑이야기이다. 당시의 결혼 문화가 그러하기도 하였다지만 14살 신부의 집에 데릴사위로 장가들어 76년을 동행한 촌로(村老)의 평생은 가정과 부부의 위기가 점점 심각해져만 가는 이 시대에 던져지는 사랑의 교과서와 같은 이야기였다. 열 두 자식을 낳았으나 여섯을 일찍이 잃고 여섯 남매를 키워 온 고단하고 척박한 농촌 마을의 풍경과 옛날 옛적 그 집 그대로 살아가는 그런 환경에서 이어온 사랑이야기이다. 왜 저들이라고 어려운 순간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저들 부부는 서로를 사랑해야 하는 사랑의 이유를 관조(觀照)한 사랑다운 사랑의 달인의 모습을 평범한 일상생활 중에 보여 주었다. 아가(雅歌)서에 보면, “내가 사랑함으로 병이 생겼음이라.”(아2:5)고 했고,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아2:7)고도 하였다. 이 정도 되면 마약을 하고 있는 듯한 사랑의 중독 상태라고 할 만할 것이다. 아가서 3장 5절과 8장 4절에도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는 말씀이 연 이어서 반복되는 것을 보면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에게 어지간히 깊은 사랑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당대 최고의 왕이었던 솔로몬이 일개 시골 마을의 검은 피부를 가진 시골 여성 술람미에게 폭 빠진 사랑을 시작하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물론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에게 있어서 유일한 사랑의 대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여전히 당대 최고의 권력자요 언약 민족의 중심에 세움 받았던 다윗 왕권의 계승자요 번영하던 왕국의 소문난 지혜의 왕 솔로몬에게서 고백되어지는 아가서의 내용들은 이미 삼천 년 전에 왕의 체면이나 권위를 가리거나 숨기지 아니하고 솔직하고 담백하게 고백한 남녀의 연정을 담은 성애문학(性愛文學)의 극치를 보여준다. 어떻게 솔로몬의 연애편지와 같은 그런 내용이 ‘아가’서란 이름으로 성경에 받아들여질 수 있었을까. 사랑하는 자와 사랑 받는 자의 관계와 그 고백이 주는 교훈으로 하면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서로에게 속하는 것이다. 아가서는 이것이 사랑의 정수(精髓)임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는 내용이 세 번이나 반복된다.(아2:15, 6:3, 7:10) 이것은 신구약 성경의 바탕을 이룬다. 하나님은 인생들에게 있어서 어떤 분이시며 택함 받고 부름 받은 선민의 삶이란 하나님 앞에서 어떠하여야 하는가를 강조하는 것이 성경의 구속사적 기틀이다. 이사야 62장 5절에 보면,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고 하였다. 사도 바울은 남녀 간의 이 같은 모습을 복음 전파의 과정에 연결하여 이렇게 고백하였다.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라.”(고후11:2) 이와 같은 묘사의 절정은 요한 계시록의 말씀이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계19:7-9)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모시고 그의 신부로 준비되어 가는 듯한 모습이 성도의 삶이어야 한다. 아가서의 큰 틀도 그런 내용을 담고 있다. 서로를 사랑하여 그 사랑을 고백하는 연애의 대화와 결혼식의 장엄함과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며 겪는 우여곡절의 고비를 잘 극복하고 더욱 더 깊어져 가는 사랑의 심화(深化)를 묘사하고 있다. 진정한 사랑은 영원을 향하여 성숙해져 가는 것이다. 순간적인 격정이나 열정으로 사랑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마약을 하는 것과 같은 사랑에서 시작하여 그 기운에서 깨어난 후에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삶의 현실을 분별력 있게 수용하며 의지적인 사랑을 키워 갈 수 있어야 한다. 사랑은 불완전한 두 인격이 만나서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며 점점 성숙한 삶의 자리를 가꾸어 가는 것이다. 신랑으로 묘사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완전하고 영원한 사랑이시지만 한 없이 부족하고 미약한 인간은 그리스도의 그 사랑의 공급을 통하여 점점 거룩해져 가는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아가서의 사랑고백의 극치는 마지막 장인 8장에서 드러난다.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아8:6-7) 성탄절이 다고 오고 있다. 성탄절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는 사랑을 더 이상 다른 방법으로 표현할 길이 없으셔서 영이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하나님께서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하신 날이 성탄절이다.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인류 구원 계획과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못에 박히고 창에 찔려 온 몸의 피와 물 한 방울까지 모두 다 쏟고 죽으신 그 죽음 뒤에 삼일 만에 찾아 온 부활의 영광으로 절정에 이른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과 그 사랑이 영원한 것처럼 우리의 사랑은 그런 사랑에 기초한 사랑이어야만 할 것이다. 사랑의 변질과 사랑이란 허울을 쓴 타락된 사랑을 염려하는 이 시대에 그 누구도 감히 흔들어 깨울 수 없는 꿈만 같은 그런 사랑으로 서로를 대하며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