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산의 수고와 고통
인간이 겪는 고통을 1에서 10으로 구분하면 그 고통이 가장 심한 것은 화상을 입는 작열통(灼熱痛)이라고 한다. 그 다음은 신체의 일부에 상해를 입는 절단의 통증이고, 그 다음이 해산의 고통이라고 한다. 중국 산둥성(山東省) 지난(濟南)시에 있는 어느 산부인과에서는“분만 모의실험장치”(childbirth simulator)를 통해 여성들의 출산고통을 가상 체험하는 중국 남성들의 모습을 언론에 소개하였다. (2014. 11. 4) 산부인과 병원에서 들려 나오는 고통어린 신음소리의 주인공들은 모두 남성들이었다. 해당 병원은 전문 기술진에 의해 제작된 분만 모의실험장치를 개발하였다. 전기 자극을 이용해 복부근육을 자극하면 여성들이 분만 중에 겪는 진통을 남성들이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 실험에 참여하는 이들은 대개 아내가 임신 중에 있는 남편들로서 아내의 해산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간접적으로 체험해보고 배우자와 태아의 소중함을 간직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비록 가상체험이긴 하지만 전기 자극으로 복부 근육이 자극되는 몇 분 내에 남성들 대부분은 견디기 어려운 신음을 토하며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렀다. 출산예정일을 3개월 앞둔 아내와 함께 병원을 찾은 한 남성은 “왜 아내가 해산 중에 그토록 고통스러워했는지 지금은 이해가 된다.”며 자신의 고통 체험을 실감나게 설명하였다.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은 아들딸을 낳는 해산의 고통을 경험한 분들이다. 예수님도 마리아의 해산의 고통을 통하여 태어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새도 깃 들일 곳, 여우도 머리 둘 곳이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는 말씀처럼 그런 삶을 사시던 우리 주 예수님은 나중에 해산의 수고나 고통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몸이 십자가에 달리는 처절한 고난을 당하셔야 했다. 주님은 그의 양손과 양 발에 큰 못을 박고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는 무리들 앞에서 심장의 피 한 방울과 물 한 방울까지도 모두 다 흘리고 참담한 모습으로 죽으셨다. 어머니 마리아는 아들 예수의 그 고난의 십자가 밑에서 울고 또 울었다. 나중에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시체를 품에 안은 어머니 마리아를 생각하여 보라. 미켈란젤로가 대리석 조각 작품인 ‘피에타’(Pieta)를 통해 형상화한 그 비통한 슬픔의 현장 말이다. 기독교 복음의 진수인 구원의 은총은 그러한 고통과 슬픔과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는 사죄(赦罪)의 은혜인 것이다. 다메섹 성으로 들어가는 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체험하기 이전의 사울은 기독교를 짓밟는 극악한 핍박자였다. 사도로 부르심을 받기 이전의 사울은 그리스도께 대하여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다.(딤전1:13) 그런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덧입고 이방에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사도가 되었다. 그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전혀 새로운 인물이 되었다. 핍박자가 변하여 복음 전파의 정열이 식지 않는 이방 전도자가 된 것이다. 그는 순교하기 까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거룩한 부르심의 사도였다. 그는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4:19)라는 고백을 할 정도로 사랑이 철철 넘쳐흐르는 사랑의 화신(化身)이 되었다. 사도 바울은 결혼도 하지 않았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여성이 아기를 수태하고 산고의 과정을 거쳐서 생명을 낳는 해산의 수고를 체휼(體恤)하듯이 몸소 느끼며 전도자의 열정을 불태웠다. 그는 언제나 식지 않는 구령 열이 활활 타오르던 복음 전파의 열정가였다. 광야 길 사십 년 동안 동족들을 대하는 모세의 가슴에 그런 열정이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아카시아 밭에 가마니를 깔고 미군들이 쓰다 버리고 간 군용 천막을 구해다가 나무토막을 엮어서 십자가를 세우고 개인과 가정과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금식하며 기도하던 신앙 선배들의 그런 기도의 열정이 다시 불붙여 지는 이 땅이 되기를 기도하는 마음 간절하다. 청와대에서 청운 중학교 정문을 지나 세검정으로 넘어 오는 산자락에 위치한 창의문 곁 언덕 한 귀퉁이에 있는 자그마한 흰 색 건물이 눈길을 끈다. 그곳은 ‘윤동주 문학관’이다. 그 안에는 28살 청년의 때에 일본 후쿠오카(福岡)형무소에서 의문의 주사를 수 없이 맞고 해방을 여섯 달 남겨 놓은 1945년 2월 16일 새벽, 비운에 숨진 기독 애국 청년 윤동주(尹東柱, 1917-1945)의 친필 원고가 진열 되어 있다. 그의 ‘서시’나 ‘십자가’나 ‘자화상’이나 ‘참회록’ 같은 시들을 보면 청년 윤동주는 주권을 빼앗긴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하여 사도 바울처럼 ‘해산하는 수고와 고통’을 골수(骨髓)에까지 채워 넣던 영원한 애국청년이었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의 사십일 금식 기도 후에 그의 곁에 찾아와서 그를 시험하는 마귀의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일일이 대적하여 이기셨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명령하여 떡 덩이가 되게 하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 보아라.”,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주며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는 시험 앞에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사탄아 물러가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는 위엄 있는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치셨다. 주님의 생애는 한 마디로 하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해산의 수고와 같은 모습이었다. 우리나라 선교 초기의 선교사 중의 한 사람인 엘리자벳 쉐핑(Elisabeth J. Shepping, 1880-1934)은 독일에서 태어났고 9살에 미국에 이민 간 후에 간호학을 공부하고 성경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의료 선교사였다. 군산 예수병원,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서 간호사로 섬기며 간호학교에서 가르치던 그녀는 전남 광주의 제중 병원(현, 기독 병원)의 간호사로 자리 잡았다. 그녀는 나병환자들의 어머니로 살았고, 금주 금연 운동과 인신매매 반대, 축첩 금지, 공창제도 폐지 운동에 앞장섰다. 그녀는 광주에 진다리교회와 봉선리 교회를 설립하였고 미국인 친구의 후원을 받아 3층 건물의 학교를 건축하고 한일장신대학교의 전신인 이일여학교를 설립하여 수많은 여성들에게 공부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학생들에게 자수, 양잠, 직포 등을 가르쳤고 제품을 미국에 수출하여 기금을 벌어다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기도 하였다. 배출된 여학생들은 간호사, 산파, 교사, 유치원 보모, 전도사 등으로 활동하게 함으로서 계몽 운동과 신여성 운동에 힘을 쏟았다. 1930년대 광주와 전라도 지역에는 220만 인구 중에서 90여만이 굶주렸고 10만 명 이상이 구걸하며 살아가는 걸인이었다. 그녀는 오갈 데 없는 14명의 고아들을 아들딸로 받아 들여 양자녀 삼았고 불쌍한 미망인 38명을 불러 모아 한 집에서 살았다. 또한 여러 권의 간호학 서적을 번역 출간하고 1923년에 조선간호협회를 결성하고 11년 동안 초대 회장으로 섬겼다. 그녀는 나귀를 타고 전라남북도와 제주도까지 오가며 수많은 사람들을 섬겼다. 여일학교 학생들은 농촌으로 흩어져서 매년 3-4만 명의 여성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였다. ‘큰 년이, 작은 년이’라고 불리며 자기 이름도 없던 여성들에게 제 이름을 붙여 불러주는 일에도 열심을 다하여 이 땅의 여성들에게 자존감을 심어 주었다. 한복을 즐겨 입고 미혼으로 54년을 살다가 간 그녀는 복음으로 조선을 품고 22년 간 해산의 수고를 다하던 선교의 여장부였다. 선교 역사가들은 “나이지리아 선교 현장에 메리 슬레서가 있다면 한국에는 엘리자벳 쉐핑이 있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그녀는 장기(臟器)마저 이 땅에 의학 연구용으로 기증하였고 그의 장례는 광주시 최초의 사회장으로 엄숙하게 치러졌다. 그녀 곁에 남은 것은 낡은 담요 한 장과 동전 일곱 개와 강냉이 가루 두 홉뿐이었다. 한글 이름, 서서평(徐舒平)! 임종한 그녀의 침대 곁에는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Not Success, But Service.)는 빛바랜 좌우명이 붙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