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이 땅에 머물러 산다면
나라가 안정되고 평화로우면 어떤 판단이나 무슨 결정을 위해서 그리 큰 고민을 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난세(亂世)를 만나면 상황은 달라진다. 남 유다는 예루살렘 성 밖에서 일 년 반 동안 토성을 쌓고 덤벼드는 바벨론의 군대에 의해서 망했다. 남 유다의 마지막 왕인 제 20대 왕 시드기야는 야반도주(夜半逃走)하였다. 한 밤중에 예루살렘 성을 빠져 나가 여리고 평지까지 도망하다가 그를 추격하는 갈대아 군대에 붙잡히고 말았다. 예레미야 52장 7절에 보면 도망가는 왕 시드기야의 불행한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남 유다의 중심에는 예루살렘이 있었다. 예루살렘 성 안에는 솔로몬 성전이 있었다. 남 유다가 망한 것은 성전이 없고, 제사장이 없고, 제사가 없어서가 아니다. 왕과 방백과 제사장과 거짓 선지자들이 앞장서서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다. 여전히 예루살렘 성전 제사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 성전 안에서 우상을 섬겼다. 이름은 선지자인데 하나님의 뜻을 예언하는 선지자가 아니었다. 세상 권력자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발람과 같은 타락하고 거짓말을 일삼는 거짓 선지자들이 판치고 있었다. 하나님은 회개를 촉구하며 예레미야를 통해서 줄곧 말씀하시지만 그 어느 누구도 예레미야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왕과 방백과 유능한 젊은이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간 지 몇 달이 지났다. 바벨론은 그다랴를 총독으로 세워서 남아 있는 유대인들을 통치하게 하였다. 그 당시에 바벨론의 침략을 두려워 하여 이미 애굽, 모압, 암몬 등지로 도피하거나 피신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 들 중에 유다의 왕족 중의 한 사람인 이스마엘이란 자가 암몬 왕의 충동질을 받으며 등장하였다. 이스마엘은 곁에 함께 했던 10명과 짜고 음식을 먹던 현장에서 그다랴를 칼로 쳐 죽였다. 순식간에 바벨론이 세웠던 유다 총독 그다랴가 목숨을 잃고 만 것이다.
그 즈음에 등장한 또 한 사람의 새 인물이 요하난이다. 요하난은 이스마엘에 의해 죽임 동한 총독 그다랴의 곁에서 활동하던 실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요하난의 등장은 이스마엘에 의해서 불안하고 초조하게 사로잡혀 있던 백성들로 하여금 요하난에게로 몰려가는 계기가 되었다. 사태가 쉽지 않게 되자 이스마엘은 자기 곁의 추종자 8명만 데리고 급하게 요하난을 피하여 암몬 자손의 땅으로 피신하고 말았다.
요하난은 죽임당한 총독 그다랴의 곁에 있던 모든 군대의 지휘관들을 총집결시켰다. 남은 백성들의 크고 작은 자들을 모두 불러 모은 후 선지자 예레미야를 찾아왔다. 그리고 예레미야에게 탄원하며 중보 기도를 요청하였다. 그 기도 요청의 내용은 “살아 남아 있는 자들의 갈 길과 할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아 봐 달라”는 것이었다.
사실 저들은 예레미야에게 기도 요청을 하긴 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이미 애굽행을 결심한 후였다. 그런 내용을 모르는 바 아닌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도한 후에 자신의 판단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저들에게 전달하였다. 바벨론이 쳐들어 와서 남 유다는 주전 586년에 망했다. 유다 땅에 남아 있던 자들은 그냥 유다 땅에 남아서 살아갈 것이냐 아니면 애굽이나 암몬 사람의 땅으로 피신해서 살아갈 것이냐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 갈등의 상황에서 하나님은 유다 땅에 남아 있는 자들에게 너무나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 첫째는, 세우고 헐지 아니하리라는 것이다.
우리말 성경은 “너희가 이 땅에 눌러앉아 산다면”(렘42:10)이라고 말하였다. 주변 나라로 흩어져서 살지 말고 유다 땅에 머물러 산다면 하나님께서 세우고 헐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셨다. 끌려간 바벨론 땅이냐 아니면 남아 있는 유다 땅이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절대 믿음의 회복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디에 사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삶의 태도를 갖고 살아가느냐는 것이다. 도피하고 도망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바른 믿음의 태도를 갖고 살아가면 하나님은 그 어디에서든 그 누구에게든 그 무엇이든 복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향하여 바른 믿음의 태도를 갖고 살아가면 믿음으로 살아가려는 자녀들을 든든하게 세우시려는 사랑의 주님이시다.
나는 요즘 무슨 생각에 매여 사는가. 혹시 바벨론에 끌려간 왕족이나 이웃이 여기 폐허가 된 유다 땅에 남아 있는 것보다는 더 낫겠다고 생각하며 살지는 않는가. 여기서 이러고 사느니 기회를 봐서 애굽으로 도망가서 살아야겠다고 궁리하지는 않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가 여기 이 땅에 눌러 앉아 살아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세우고 헐지 아니할 것이다.”2,600년 전 유다 땅에 남아 있던 백성들에게 하신 예레미야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날 나에게 적용되고 깨달아지는 것이 은혜요 지혜다.
그 둘째는, 심고 뽑지 아니하리라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날마다 순간마다 별의 별 고민과 갈등과 번민 가운데 살아간다. 이러 저러한 판단과 결정에 대하여 불안해하고 초조해 한다. 어떤 경우에는 지난 날의 결정에 대하여 과연 그 때의 그 판단과 결정이 옳았던 것인가에 대하여 의심하고 후회하며 괴로워한다. 지금 일이 순조롭지 않을 경우에는 지난 날의 판단과 결정이 과연 옳은 결정이었는가에 대하여 점점 더 의심하게 되기도 한다. 그 결정이 자의에 의한 것이든 혹은 환경적으로 떠밀린 것이든 마찬가지이다. 심지어는 “내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니는 것이 옳은 판단인가”하고 원초적인 신앙에 대하여까지도 회의에 빠지기도 한다. 산다는 것이 걱정, 근심, 염려, 불안, 두려움, 초조, 고민, 고통, 고난이 없이 늘 천국 생활만 하는 이가 과연 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그런데 지금 바벨론에 멸망 당한 땅에 남아 있는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말씀하고 계시다.“너희가 이 땅에 눌러 앉아 산다면 내가 너희를 심고 뽑지 아니하리라”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희망과 격려와 위로와 약속의 말씀을 해 주시는 것이 아닌가. “세우고 헐지 않겠다. 심고 뽑지 않겠다”는 말씀은 사실 같은 내용이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겠다는 말씀이시다. “지금 불안하고, 지금 불확실하고, 지금 염려로 가득하고, 지금 뭐 신통하게 되는 일이 없는 것 같고, 지금 답답한 세월을 살아가고 있을지라도 절대 자신이나 환경을 절망적으로만 보아서는 안된다”는 말씀이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우시면 그 어느 누구도 헐자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심으시면 그 어느 누구도 뽑아 낼자기 없기 때문이다. 맞다.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셔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또 하나는, 재난 대신에 함께 있어 구원하리라는 약속이다.
바벨론 왕을 겁내지 말아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내가 너희를 구원하겠다.
내가 너희를 바베론 왕의 손에서 건지겠다.
그러하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를 불쌍히 여기겠다.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도 너희를 불쌍히 여기게 해 주겠다.
그 당시에 이미 유다에 남아 있던 백성들 중에서 적지 않은 이들이 애굽으로 피신하려고 베들레헴 근처에 있는‘게롯김함’이란 곳에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냥 이 땅에 눌러 앉아 살아라.
내가 너희를 세우고 심고 함께 하여 반드시 구원해 주겠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주님 안에서 영원한 승리의 약속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다.
-위 내용은 2020. 10. 4. 주일 설교문을 요약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