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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준경. 그녀가 살아 온 길 201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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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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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6-10-22 15:29 조회 13,461 댓글 0
 

문준경. 그녀가 살아 온 길

 

지난 월요일, 지방의 목회자 부부 일행 삼십여 명이 증도를 방문하였다. 우리나라에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 온지 131년이 되었다. 오늘 날 복음화율이 가장 높은 곳은 전남 신안군 증도이다. 증도는 2,200여명의 주민이 사는 섬이다. 전국의 섬들 중에서 홍도 다음으로 아름다운 섬이 증도라고 한다. 주민의 90% 이상이 예수를 믿는다. 크지 않은 섬에 11개의 교회가 있다. 증도에는 단 한 개의 사찰도 없고 굿당도 없다. 바다에서 일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미신(迷信)을 믿는 이들도 거의 없다. 증도에 기독교 복음을 전한 주인공은 문준경(文俊卿, 1891-1950)이다. 남자 이름 같아서 얼핏 들으면 여자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준경은 여성이다. 사진으로 만나 보는 그녀의 외모는 이름처럼이나 힘차 보이고 당당하다. 그녀는 1891년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의 섬에서 태어나 17살에 증도로 출가하였다. 그녀의 친정은 부자였다. 그러나 남편은 사업한답시고 육지를 드나들면서 바람이 났다. 급기야 다른 여자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 왔다. 그러나 만삭이 되어 누워 있는 젊은 소실을 위해 문준경은 하루도 빠짐없이 그 방에 따뜻하게 불을 지펴주었다. 그때부터 20년간 남편에게 버림받은 생과부가 되어 모진 시집살이를 하던 가운데 며느리를 불쌍히 여겨 주던 시아버지조차 돌아가시고 말았다. 36살 되던 해에 홀로 육지로 나아가 바느질을 하며 생계를 꾸려 나갔다. 그런 그녀에게 전도부인이 찾아 가서 복음을 전하였고 예수를 알게 되었다. 그 후로 목포 북교동성결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성결교의 유명한 부흥사였던 이성봉 목사는 그 당시에 그 교회를 담임한 전도사였다. 이성봉 전도사를 통하여 은혜를 받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기로 결단하였다. 성결교 신학교인 서울신학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성서학원에서 공부하면서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기혼 여성이라 입학 조건이 맞지 않았으나 어렵게 입학할 길이 열렸다. 1932년부터 신안군 지역의 섬들을 나룻배를 타고 순회하며 1933년에 임자진리교회를 첫 교회로 설립하였다. 그 후에 증동리교회와 대초리교회 등 여러 교회를 설립했다. 잔치 집에서 먹을거리를 받아다가 가난하고 굶주리는 이웃에게 챙겨 먹였다. 산파 역할도 했다. 온갖 궂은일과 힘든 일과 어려운 일을 찾아다니며 도왔다. 그녀는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길이라면 때로 짐꾼도 되고 때로 우편배달부도 되고 때로 약사와 의사도 되었다. 남들이 고무신 한 켤레 신을 때 그녀는 아홉 켤레를 해트릴 정도로 부지런히 활동하였다. 그녀는 찬양도 잘했고 말솜씨도 구수하고 해학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찬송하면 그녀의 노랫소리를 듣고 싶어 했고 그녀가 성경말씀을 전하면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녀를 통해서 증도와 그 주변 섬들마다에 20여 곳의 교회가 탄생하였다. 1943년 일제의 종교탄압이 극심해졌다. 그녀는 신사참배를 거부해 목포경찰서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여전히 저항하였다. 해방 후 신안군의 섬에는 좌익들의 활동이 활발하였다. 6·25전쟁 중에는 섬 전체를 인민군이 장악하게 되었다. 공산당에 붙잡혀 목포인민위원회에 끌려갔던 문준경은 이성봉 목사 등 주변의 만류를 무릅쓰고 교인들을 돌보아야 한다고 하며 증도로 다시 돌아갔다. 1950104일 국군이 증도에 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좌익들이 기독교인들을 처형하기 시작했다. 문준경 역시 1950105일 새벽에 인민군들에 의해 신자들과 함께 바닷가로 끌려 나갔다. 인민군들은 문준경 전도사를 새끼를 많이 깐 씨 암탉이라고 조롱하며 죽창으로 무참하게 찌르고 곤봉으로 때리고 나중에는 총을 쏘아 죽였다. 2013년에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이 건립된 이후로 그 곳을 찾는 발걸음이 끊임이 없다. 원래 그녀의 무덤은 증동리교회 뒤 편 산에 있었다. 그러나 2005년 증동리교회 앞바다의 순교 현장으로 이전하였다. 우리가 방문한 지난 월요일 오후에는 여느 때보다 해수면이 높은 날이었다. 조차(潮差, Tidal range)라고 한다. 바닷물이 밀려오는 밀물과 빠져 나가는 썰물 현상이 하루에 두 번 씩 주기적으로 일어나서 해수면이 오르내리는 현상을 조석’(潮汐) 물때라고 한다. 지난 17-18일에는 지구와 달이 가장 가까워지는 근지점에 근접하고, -지구-태양이 거의 일직선상에 놓여서 기조력이 크게 나타나 올해 최대의 조차(潮差)를 만들 것이라고 했는데 그 현상을 바닷가에서 목격한 것이다. 해변의 뚝 길 까지 가득 찬 증도 앞바다의 물결이 오후의 가을 햇빛을 받아 영롱한 은빛을 반짝거리며 비추이는 광경이 주님의 충만한 은총처럼 눈부셨다. 신안군의 섬마다 그녀의 영향을 받은 많은 청년들이 예수 믿기로 결심하였다. 그들 가운데 대학생선교회인 CCC의 김준곤(1925-2009)목사, 중앙성결교회의 원로 이만신(1930-) 목사, 크리스쳔치유상담연구원의 정태기 목사 등 30여명의 한국교회 영적지도자들이 배출되었다. 문준경 전도사. 그녀의 장례식에는 김구 선생의 장례식보다 더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녀를 통하여 복음을 영접한 사람들과 성경을 배운 사람들과 사랑 받고 치료받고 돌봄을 받은 수많은 성도들이 그녀의 마지막 가는 길을 아쉬워하였다. 문준경. 그녀는 사사기의 드보라와 같고 에스더서의 에스더와 같은 개화기의 인물이다.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 곁의 막달라 마리아와 같고 사도행전 시대에 욥바에서 활동하던 다비다 여선지자와 같은 여성이다. 사도행전 9장에 소개된 다비다의 다른 아름은 도르가이다. 그녀는 살아서도 많은 이들에게 예수를 전파하였고 죽음을 통해서도 많은 이들로 하여금 주를 믿게 하였다. 다비다의 죽음의 소식이 룻다에 선교 여행 중이던 베드로 사도에게 전해졌다. 다비다를 따르던 제자들은 베드로를 초청하였고 하나님은 베드로를 통하여 다비다를 다시 살려 내셨다. 그 일로 인하여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게 되었다.(9:42) 문준경. 그녀는 순교 당하였다. 그러나 오늘 날 그녀의 선교 열정은 그 곳의 순교 현장을 방문하는 이들의 가슴 속에 불길 같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여전히 살아 활활 타오르고 있음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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