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 다녀와서
사순절을 시작하는 성회 수요일 새벽 예배 후에 속장 세미나로 인천 내리교회와 성산 교회에 다녀왔다. 내리교회는 1885년 7월 29일에 인천 최초로 세워진 감리교회이다. 성산 교회는 해방이 되던 1945년 10월에 시작되었다. 제물포 항이 가깝고 맥아더 장군 동상과 한미 수교 백주년 기념탑이 있는 자유 공원 산자락에 내리 교회가 위치해 있다. 성산 교회는 내리 교회를 마주 바라다보는 답동 언덕에 위치해 있다. 과거에는 그곳들이 인천의 중심 지역이었으나 이제는 송도와 영종과 청라 지구의 신도시 개발과 함께 역사 속에 상징적인 곳으로 남아 있다. 인천 제물포(濟物浦)의 지명이 언제부터 그렇게 불리어졌는지는 불분명하다.
제물포는 부활절이었던 1885년 4월 5일 새벽에 미국 감리교의 헨리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와 미국 장로교의 언더우드 선교사가 같은 배를 타고 도착한 곳이다. 헨리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 1858-1902)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서더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기드온 아펜젤러(Gideon Appenzeller)는 독일계 스위스인으로 개혁교회 교인이었고 어머니 마리아 게르하트(Maira Gerhart)는 독일계인 메노나이트파였다. 헨리는 어려서부터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가진 부모의 품에서 자라났다. 14살 때부터 서더튼 교외 임마누엘개혁교회에 출석하였다. 18살 때에 웨스트체스터사범대학에 다니던 중에 그곳 장로교회 집회에 참석했다가 회심(悔心)의 체험을 했다. 그는 1876년 10월 6일의 그 체험을 거듭난 날로 기억하여 간증하고는 하였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장로교회에 출석하였으며 2년 후에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랑캐스터에 있는 프랭클린앤드마샬대학에 진학하였다. 그는 그 곳에서 히브리어와 헬라어 등 어학훈련에 집중하였다. 그러나 회심 이후 개혁교회나 장로교회의 신앙유형에 대하여 갈등을 가지고 있던 중에 랑캐스터제일감리교회 기도회에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다음 해에 감리교회로 옮기게 되었다. 그의 나이 21살 때의 일이다. 그가 선교사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4살 때인 1882년에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드루신학교에 진학하면서였다. 그는 신학교에서 만난 가까운 친구였던 워즈워드(J.S. Wadsworth)에게서 그리피스(Griffis)가 쓴 “Korea, the Hermit Nation”(은둔의 나라, 한국)이라는 제목의 책을 빌려 읽은 후부터 한국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다음 해 10월에 하트포드에서 열린 전국신학교연합회 집회에 드루신학생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한 헨리는 해외 선교에 대한 열띤 강연을 듣고 좀 더 선교에 대한 열망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 곳에서 뉴브런스윅신학교 학생 대표로 참석한 언더우드(H.G. Underwood)도 만나게 되었다. 졸업과 동시에 그는 미감리회의 해외선교부에서 물색하고 있던 한국 선교사 후보로 정해졌다.
그는 한국에 도착하기 한 해 전인 1884년 12월에 펜실베니아 랭카스터에서 만난 청교도 후예인 닷지(Ella Dodge)와 결혼하였다. 그는 다음 해인 1885년 2월에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감리회 해외선교부 총무인 파울러 감독에게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들 부부는 의사 스크랜턴(W.B. Scranton)부부와 함께 태평양 우편선인 아라빅호를 타고 일본에 도착하였다. 그들 부부는 일본에 머무는 한 달 동안 갑신정변으로 망명해 있던 박영효에게서 한국어를 배우기도 하였다. 얼마 후 일본의 요코하마를 떠나 한국으로 향하였다. 그 배에는 아펜젤러 부부와 언더우드 외에 고종의 특사로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오던 묄렌도르프(P.G. Mo¨llendorf)도 함께 타고 있었다. 4월 2일 부산에 도착하여 하루 정박하는 동안 하선하여 처음으로 한국 땅을 거닐어 보았다. 다시 같은 배를 타고 4월 5일에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다. 그 날은 부활절 날 아침이었다. 제물포에 상륙한 아펜젤러는 그날의 감격을 기도문 형식으로 작성하였다. “우리는 부활절 날에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죽음의 철창을 산산이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자유와 빛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이번에 우리 일행이 방문한 “선교 백주년 기념탑”에 있는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와 언더우드 선교사의 동상 아래 화강석에는 이 기도문이 한글과 영어로 새겨져 있었다. 제물포에 도착한 그들 부부는 인천의 여관에서 일 주간을 머물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한 달간 지내면서 한국어를 공부하였다. 그 사이 의사 스크랜턴이 혼자 서울에 진출하여 정동에 집을 마련하였다. 아펜젤러 부부는 같은 해 7월 19일에야 서울에 들어올 수 있었다. 1887년부터는 한국 선교부 감리사로 임명을 받고 학교, 병원 그리고 복음전도에 매진하였다. 그는 1888년부터 2년 동안에 전국 8도 중 6개 도의 각 지방을 순회하였는데 총 여행거리는 1,800마일에 이르렀다. 1890년에는 현 대한기독교서회의 전신인 ‘한국성교서회’(韓國聖敎書會)를 창설하였다. 자신이 목회하던 정동교회는 1897년 10월에 붉은 벽돌의 서양식 예배당인 벧엘 예배당을 신축하였다. 1898년의 독립협회사건으로 많은 민족지도자들이 투옥되었을 때 옥중으로 방문하여 전도하였는데 이상재, 이승만, 남궁억 등이 기독교인이 되는 데는 그의 공로가 컸다. 1899년에는 언더우드와 함께 한국 YMCA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너무 열심히 선교 하다 보니 40대의 나이인데도 노인과 같은 모습이었다. 고종 임금도 그의 노고를 인정할 정도였다. 오늘 날 배재대학교와 배재중고등학교도 그의 손길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는 1902년 6월 11일에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 번역 모임을 위해서 배를 타고 가던 중에 군산 근처 어청도 앞바다에서 같은 일본 상선과 충돌하자 남을 구하려고 애를 쓰다가 깊은 밤중에 침몰하여 숨지고 말았다. 44살에 숨진 헨리 아펜젤러! 그의 선교 17년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는 주님의 말씀처럼 후대에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 한국선교의 거룩한 씨앗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