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게 쓴 어머니의 편지
“네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하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진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건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아마도 이 어미가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 재회하길 기대하지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거라.” 이 글은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옥중의 아들에게 쓴 편지이다. 이 세상 모든 어머니들의 소원은 아들딸이 건강하고 평안하게 잘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어머니 보다 아들딸이 이 세상을 먼저 떠나야 할 날이 온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독립운동가 안중근(1879-1910)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의 본명은 조성녀이다. ‘성녀’(聖女)라는 이름은 영아세례 때 세례명으로 받은 또 다른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 개신교의 복음이 들어 온 초기이지만 저의 가족들은 천주교의 영향을 받았다. 조마리아 여사 역시 독립운동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안중근은 삼남 일녀 중의 장남으로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그가 15살 때였던 1894년 그의 선친안태훈은 황해도 지역에서 일어났던 동학군을 토벌하고 군량미를 노획한 일이 있었다. 나중에 그에 대한 상환 압력을 받아 곤궁에 빠진 선친 안태훈 진사는 명동성당으로 피신하였다. 그 곳에서 프랑스 신부들의 도움을 받아 몇 개월 동안 머물렀다. 이 기간에 선친은 성경을 탐독하고 신부들의 강론을 들으면서 천주교 신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신앙에 정진하였다. 2년 후에 군량미 문제가 해결되자 안태훈은 청계동을 비롯한 일곱 곳의 마을에 찾아다니며 천주교를 전했고 신앙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다음 해인 1897년에 안태훈은 매화동 본당 빌렘(Wilhelm, 洪錫九)신부에게 공소 설치를 청원하고 빌렘 신부로부터 청계동 주민 33인이 세례를 받았다. 그 때에 안중근을 비롯한 가족들도 다 같이 세례를 받았다. 선친 안태훈의 세례명은 베드로, 모친은 마리아, 안중근은 도마, 부인은 아네스이다. 그 때 안중근의 나이는 17살이었다. 안중근은 시대를 보는 눈이 남달랐다. 그는 구한말의 교육가이며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후대에 그에게 의사(義士)라는 칭호가 붙여졌다. 그의 자(字)는 응칠(應七)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유학을 배웠고 총을 잘 쏘았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안중근은 항일독립운동의 기지를 마련하기 위하여 중국 산동반도와 상해를 방문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러던 중에 상해 성당에서 르 각(Le Gac, 郭元良) 신부를 만나 나라를 살릴 수 있는 길을 의논하였다. 곽 신부는 안중근에게 “교육의 발달, 사회의 확장, 민심의 단합, 실력의 양성” 등을 강조해 주었다. 국내로 돌아온 안중근은 청계동의 가산을 정리하고 평안도 삼화항에 정착하였다. 그곳에서 천주교 본당이 운영하던 돈의학교를 인수하고 뒤이어 삼흥학교를 세워 인재양성에 앞장섰다. 1907년 황해도, 평안남북도 3개도 50여 학교의 학생 5,000여 명이 참가한 연합운동회에서 안 중근이 운영하던 두 학교가 우승을 차지했다. 그 때 안중근의 나이는 28살이었다. 이는 두 학교가 민족정신이 투철한 인재양성을 위해 민족교육을 철저히 실시한 결과였다. 그는 언제나 동료들과 후배들에게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는데 열심이었다. 안중근의 교육에 대한 열정은 그 이전부터 한국에서 민족의식이 투철한 민족지도자를 길러 내려면 대학 설립이 최우선 과제라 생각하고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에게 대학 설립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07년 한일신협약에 체결된 후에 간도로 가서 의병을 결집하였고 일본군대와 싸웠다.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러시아의 코코프체프와 열차에서 회담을 마친 뒤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고 환영하는 군중 쪽으로 걸어가는 이토 히로부미에게 권총 3발을 명중시켰다. 이어서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만철(滿鐵)이사 다나카 등에게 중경상을 입힌 뒤 큰 소리로 “대한만세”를 외치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심문과 재판과정에서 자신은 한국의병 참모중장이라고 말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교란자이기 때문에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며 자기 개인의 신분으로 사살한 것이 아니라는 거사동기를 밝혔다. 그는 러시아 관헌의 조사를 받고 일본 측에 인계되어 여순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여러 차례의 재판을 받는 동안 “나는 의병의 참모중장으로서 대한독립을 위한 전쟁을 했고 참모중장으로서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으니 이 법정에서 취조 받을 이유가 없다”고 분명한 의사를 밝히며 재판을 거부하며 자신을 전쟁포로로 취급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일본검찰에게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을 차근차근 밝혔다. 일본이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 1905년 11월에 한일협약 5개조를 체결한 일, 1907년 7월 한일신협약 7개조를 체결한 일, 대한제국의 양민을 살해한 일, 이권을 약탈한 일, 동양평화를 교란한 일 등 15가지를 제시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그 당시 국내외에서는 안중근을 구명하기 위한 변호기금 모금운동이 일어났고 안병찬과 러시아인 콘스탄틴 미하일로프, 영국인 더글러스 등이 무료변호를 자원했으나 일본은 관선 변호사의 선임조차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1910년 2월 14일에 사형언도를 받았고 40여일 뒤인 3월 26일에 여순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그의 나이 31살 때의 일이다. 아들이 숨지기 전에 여순 감옥으로 보낸 어머니 조마리아의 또 다른 편지 내용은 이렇다. “아들아. 옥중의 아들아. 목숨이 경각(頃刻)인 아들아. 칼이든 총이든 당당히 받아라 이 어미 밤새 네 수의(壽衣)를 지으며 결코 울지 않았다. 사나이 세상에 태어나 조국을 위해 싸우다 죽는 것 그보다 더한 영광이 없을 지어니 비굴치 말고 왜놈 순사를 호령하며 생을 마감하라. 하늘 님 거기 계셔 내 아들 거두고 이 늙은 어미 뒤쫓는 날 빛 찾은 조국의 푸른 하늘 푸른 새 되어 다시 만나자. 아들아 옥중의 아들아 목숨이 경각인 아들아. 아! 나의 사랑하는 아들 중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