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윤동주를 생각하며
시인 윤동주는 100년 전인 1917년에 태어났다. 박정희 전(前) 대통령도 그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에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일본의 후쿠오카형무소에서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27살 때의 일이다. 그의 고향집에는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를 가지러 오라.’는 전보가 배달되었다. 비보를 접한 그의 아버지와 당숙 윤영춘이 일본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 때에 ‘동주, 위독하니 보석할 수 있음. 사망 시에는 시체를 가져갈 것. 아니면 규슈제국대학 의학부에 해부용으로 제공할 것임. 속답 바람.’이라는 내용의 전보가 뒤 늦게 고향 집에 배달되었다. 윤동주가 위독한 사실을 알리는 전보가 사망 소식을 알리는 전보보다 더 늦게 도착한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른 채 후쿠오카형무소에 도착한 아버지와 당숙은 같은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송몽규를 면회하였다. 몹시 초췌한 몰골의 송몽규는 날마다 이름 모를 주사를 맞고 있다고 전했다. 이는 두 사람이 일제로부터 생체실험을 당했다는 증언으로 여겨지는 대목이다. 후쿠오카형무소 측은 윤동주의 운명시각이 오전 3시 36분경이라고 전했다. 그때 일본인 간수가 “동주 선생은 무슨 뜻인지 모르나 큰 소리를 외치고 운명했소.”라고 전해주었다. 윤동주의 시신은 규슈제국대학 의학부에서 방부제 처리를 해둔 상태였다. 윤동주의 장례식은 그 해 3월 6일에 만주의 용정중앙감리교회의 성도들과 함께 문재린 목사의 집례로 치러졌다. 장례식장에서는 윤동주가 <문우>에 발표했던 그의 시 “자화상”과 “새로운 길”이 낭송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시인윤동주지묘(詩人尹東柱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그로부터 하루 뒤인 3월 7일 후쿠오카형무소에 남아있던 송몽규도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고모 윤신영의 아들인 사촌간이다. 그해 여름인 8월 15일에 우리나라는 꿈꾸는 것처럼 광복을 맞았다.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시인 윤동주를 모르는 이는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윤동주의 증조부는 함경북도에서 기근을 피하여 만주로 이주해 살았다.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은 기독교의 복음을 받아들인 장로였다.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은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 있는 명동학교 교사였다. 윤동주는 친구인 문익환 목사와 함께 명동학교에 다녔다. 성장기의 윤동주는 의젓하고 씩씩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즐겨하던 그는 용정에 있는 은진중학교에 다녔다. 그는 늘 문학 소년으로 성장해 갔고 축구도 좋아하였고 교내웅변대회에서 1등을 한 적도 있었다. 나중에 숭실중학교에 다녔으나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학교가 폐교되자 광명학원으로 편입하였다. 윤동주는 그 곳에서 문익환, 장준하 그리고 나중에 국무총리를 지낸 정일권 등과 함께 공부하였다. 윤동주는 광명중학교 5학년 2학기가 되면서 아버지와 불화하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윤동주에게 의과대학에 진학할 것을 권하였다. 문학의 꿈이 분명했던 윤동주는 아버지와 몇 달 동안 불화하였고 단식 투쟁을 하기도 하였다. 어떤 때는 아버지가 밥상을 뒤 엎는 등의 격렬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결국은 할아버지가 중재하여 윤동주는 문학도의 길을 가게 되었다. 1938년에 윤동주와 송몽규는 사촌 간에 나란히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합격하였다. 그 해에 북간도 전체에서 연희전문학교에 합격한 이들은 저들 사촌 두 명 뿐이었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도서관에서 촉탁으로 있던 국어학자 외솔 최현배 선생에게서 조선어를 배울 기회를 얻기도 하였다. 윤동주는 여름 방학에 만주의 용정에 있는 고향집으로 갔고 그 곳에 있는 북부감리교회에서 여름성경학교 교사로 봉사하기도 하였다. 윤동주의 시들이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수 있었던 것은 광명학교와 연희전문학교 2년 후배로 만난 정병욱의 노력 덕분이었다. 정병욱은 나중에 서울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1941년 12월 8일에 일본이 진주만 기습을 하자 태평양 전쟁이 일어났다. 그런 이유로 인해서 전시(戰時)학제 단축을 하게 되었다. 예정보다 3개월 앞당겨 12월 27일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그 동안 써 두었던 19편의 시를 모아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란 표제로 한정판을 출간하려 했었다. 그러나 “슬픈 족속”, “십자가” 등의 작품이 일제의 검열을 통과하기 힘들 것이란 주변의 조언을 받아 들여 출간을 보류하고 말았다. 결국 윤동주는 출간을 포기하고 3권을 일일이 필사하여 이양하 교수와 정병욱에게 각각 1부씩 전해 주었다. 시대는 점점 어수선해져만 가고 있었다. 일제는 전쟁물자 동원령을 내렸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징용되어 전쟁터로 끌려가기 시작하였다. 마지못해 이름을 일본식의 히라누마 도오쥬우(平沼東柱)로 바꾼 그는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그 당시 창씨개명의 굴욕감을 시로 표현한 것이 “참회록”이다. 그리고 그는 결국 죽어서 시체가 되어 그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는 일본 유학 중에 징역 2년 형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이렇게 쓰여 있다. “‘윤동주는 어릴 적부터 민족학교 교육을 받고 사상적 문화적으로 심독했으며 친구의 감화 등에 의해 대단한 민족의식을 갖고 내선(일본과 조선)의 차별 문제에 대하여 깊은 원망의 뜻을 품고 있었고,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려 하는 망동을 했다.” 민족시인이었던 윤동주는 27살에 죽었으나 그는 그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영원한 청년의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서시”(序詩)에서 그의 심경을 이렇게 써 놓았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2월 16일은 그가 일본의 차가운 감옥에서 숨진 날이다. 청운동과 부암동이 만나는 언덕 자락 창의문 곁에 마련된 윤동주 문학관 벽에는 그의 시 “새로운 길”이 새겨져 있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올해도 우리나라와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길‘이 펼쳐지기를 기도하며 두 손을 모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