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 숭배란 무엇인가.
요즘도 돼지 머리 앞에 절하는 이들이 있다. 수 만 평의 거대한 빌딩을 지어 놓고도 부적을 붙이거나 명주 실 타래에 북어 두 마리를 둘둘 말아 문틀에 매어 다는 건물주가 있다. 우리나라는 단군 신화로부터 온갖 미신과 토속 신앙의 영향을 받아 왔다. 오늘 날도 각종 사이비 유사 종교의 영향을 받는 이들이 여전히 적지 않다. 뿌리가 깊지는 않지만 우리 민족이 기독교의 복음을 받아들인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성경의 ‘십계명’ 중에서 첫째 계명은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둘째 계명이 “우상을 만들지도 말고 절하지도 말고 섬기지도 말라.”는 내용이다. 왜 하나님은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고 하셨을까. 기독교인들은 누구나 다 하나님만 섬기며 사는 유일신 신앙이 분명할까. 기독교 신앙의 눈으로 보면 ‘여호와 하나님’만이 창조주(創造主)이시고 만사를 주관하시며 섭리(攝理)하시는 유일신(唯一神)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 이외의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그 무엇인가는 모든 것이 우상이다. 우상 숭배란 하나님을 경배하는 대신에 인간의 마음을 자리 잡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이다. 우상과 우상숭배는 구약성경 전체 주제 중의 하나이다. 에덴의 뱀의 유혹으로부터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이 우상과 우상 숭배의 미혹 앞에 노출되어 왔다. 애굽을 떠나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과 가나안 정착 과정과 사사 시대와 대대로 이어지는 왕정 시대의 흥망성쇠의 바탕에는 항상 우상 숭배의 문제가 심각하게 깔려 있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계속하여 우상 숭배를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 올 것을 촉구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대 왕들과 방백들과 백성들은 우상 숭배를 쉽게 떨치지 못하였다. 결국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지 못하는 심판 앞에 선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과 열방의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은 구세주로 보내 주셨다.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만 사랑하고 섬기라는 초청의 말씀이 신명기에 나온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4-5) 그리고 이어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신6:13)는 강조도 하셨다. 이는 우상을 따르지 말 것을 맹세하라는 요구이시다. 돈, 금은보석, 재물, 재산, 땅, 성(性), 명예, 권력, 힘, 군대, 지위, 인기, 외모, 건강, 세속적인 소망, 성취에 대한 집착, 탐심, 우월감, 비교의식, 끊임없는 번영의식 등이 모두 다 우상 숭배에 뿌리 내리고 있는 것들이다. 심지어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감정을 지배하는 그 어떤 모든 것들도 우상 숭배의 문제들 중의 하나이다. 가령 “완벽주의, 일 중독, 성 중독, 게임 중독” 등도 한 사람의 영혼을 지배하는 우상 숭배의 일종이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변장하고 침투해 들어오는 우상숭배도 있다.
가령 아브라함은 75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 그 당시에 그는 자녀가 없었다. 하나님은 그를 말씀으로 불러내시면서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다의 모래와 같은 후손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태어난 것은 그의 나이 100세 때의 일이다. 물론 그 전에 부인 사라의 몸종 하갈을 통하여 아들을 낳았지만 하나님은 이스마엘의 탄생을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탄생으로 여기지 않으셨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찾아 오셔서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께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셨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은 얼마나 끔찍하게 아끼고 사랑하는 아들인가. 그런데 그 아들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신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는 것이 죄인가. 우상숭배인가. 아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그런 무리한 요구를 하신 것일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묻고 계신 것이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데리고 삼일 길을 걸어서 모리아 산에 도착하였다. 종들을 산 아래 남겨 둔 아브라함은 아들과 함께 산에 오르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 돌아오리라.”(창22:5) 성경의 내용을 웬만치 아는 이들이라면 아브라함의 이 말에 의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치매기가 있었나.”, “아브라함이 환청을 들었나.” 뭐 이런 별의별 상상을 다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 그 상황에서의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 이삭을 번제단에 결박하여 눕혀 놓고 칼을 잡고 아들을 잡으려는 순간에 하나님은 천사를 동원하셔서 아브라함의 이름을 급하게 두 번 부르셨다. 그리고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그 순간에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사랑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중심을 간파하셨다.
이 사건 이후로 아들 이삭을 바라보는 아브라함의 마음가짐은 예전과 분명히 달랐을 것이다. 그 천년 후에 하나님의 아들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셨다. 이삭을 살려 내신 하나님이 왜 예수께서 죽임을 당하시던 그 날은 침묵하셨을까. 그리고 사흘 만에 예수를 부활케 하심으로 죄와 사망을 이기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셨다. 학문과 신분과 지위와 종교심이 우상처럼 자리 잡고 있던 사울이 다메섹에서 변화되었다. 그는 그 후로 달라졌다. 그는 예수 외의 그 모든 것들을 배설물같이 여겼다. 바울에게 있어서 더 이상의 우상 숭배란 사라졌다. 바울의 여생은 ‘그리스도를 본 받은 자’(고전11:1)의 모본이 되었다. ‘신앙과 우상 숭배’ 이는 각 사람이 스스로 세심하게 점검해야만 할 숙제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