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내 삶이 끝나지 않기를...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 생명의 신비를 감사하게 된다. 생각하여 보라. ‘나’란 존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것이 신비롭지 않은가. 내가 나의 생을 선택한 것이 아니니 말이다. 이 세상에 나의 생명이 주어진 것이다. 여기에는 그 분의 섭리 가운데 보냄을 받은 자로서의 은총이 있다. 세상 사람들은 운명 혹은 숙명을 말하지만 기독교의 가치관에 비추어 보면 이는 섭리에 속한 것이다. ‘섭리’(攝理)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자연계를 지배하고 있는 원리와 법칙”이란 정의와 함께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뜻”이란 설명도 포함되어 있다.
모세는 그의 시편에서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시90:10)라고 고백하였다. 모세가 태어날 당시에 애굽의 임금 바로는 히브리 사내아이들을 모두 다 죽이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모세의 부모는 왕의 명령을 어기고 석 달을 숨겨 키웠다. 모세가 마땅히 죽임을 당하였어야 할 상황에서 목숨을 건지고 왕족으로 자라난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 그렇게 살아남은 모세가 120년을 살았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체험하였다. 우리는 개인이든 민족이든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요즘은 보건위생과 예방의학이 발전하고 웬만한 질병을 치료하는 의학의 혜택으로 인하여 과거보다 훨씬 장수하는 시대가 되었다. 요즘은 칠십 대에도 청년 같은 노인들이 적지 않다. 미국의 현직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1946- )는 71살이다.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1918-2013)는 76살에 대통령이 되었고 95살까지 살았다. 그는 27년 동안 감옥의 독방에서 살아남았고 72살에 자유의 몸이 되었다. 실로 칠십은 청년 같고 팔십에도 씩씩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없지 않다. 그러나 지나가는 세월과 흘러가는 시간을 막을 용사란 이 땅에 없다. 모두가 장수하고 누구나 다 100수세 하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살다 보면 사고, 사건, 질병, 재난 등으로 인해서 일찍이 이 세상을 떠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삶의 태도가 문제이지 나이가 문제가 아니다.
연인과 함께 네팔 히말라야 트레킹을 시작한 대만의 대학생이 실종된 지 47일 만인 지난 4월 26일에 구조되었다. 21살 청년 량성웨는 몸무게가 30kg정도나 줄어 있었다. 동행했던 19살 여자 친구 류천춘은 구조받기 삼일 전에 눈을 감았다. 대만 국립 동화대 1학년 동급생인 저들은 히말라야 산맥의 가네시히말 봉우리로 트레킹을 떠났다가 길을 잃었고 연락도 끊기고 말았다. 저들은 전문 산악인의 도움이 없이 낯 설은 트레킹 코스를 택했다가 화를 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조난당한 이후 두 청년은 배낭에 챙겨 간 감자와 국수 등을 조금씩 꺼내먹으며 보름을 버텼다. 식량이 다 떨어진 뒤엔 물과 소금만으로 연명해 나갔다. 그렇게 44일이 흐른 뒤 여자 친구인 류천춘은 결국 숨을 거뒀다. 류천춘은 자신의 페이스 북에 “여기서 내 삶이 끝나지 않기를...”이란 글을 남겼다고 한다. 삶은 숭고한 것이다. 추위와 굶주림과 두려움과 사랑하는 애인을 잃은 슬픔과 충격에 휩싸인 채 숨진 여자 친구의 시체 곁에서 사흘을 더 버티다 살아남은 량성웨는 해발 2600m 높이에서 헬기 구조대에 의해 구조되었다. 그의 발은 이미 동상으로 문드러져 구더기가 우글거렸고 온몸에는 이 떼가 가득하였다. 구조 될 당시에 그는 몹시 지친채로 잠이 들어 있었다. 구조대원들의 목소리를 듣고 깨어난 그를 보고 구조대원들이 오히려 더욱 놀랐다고 한다. 47일 동안 죽지 않고 살아 있었으니 말이다. 그는 현재 네팔의 수도인 카트만두 그랜드 국제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살아남은 청년 량성웨! 그의 앞날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은 그에게 주어진 남은 자의 몫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반면에 죽을 뻔한 형편에서 살아남아 있다는 것은 생명의 신비이다. 그러므로 살아남아 있다는 것은 “남은 자의 은혜”를 누리며 “남은 자의 사명”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신(神)의 부르심 앞에 있는 것이다.(미7:18) 소설 <오두막>에서는 슬픈 자에게 찾아 온 그 ‘파파’를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다. 모세의 부모는 어린 아들을 더 이상 품 안에 안아 키울 용기를 포기하고 갈대 상자에 담아서 나일 강에 버렸다. 그 아기가 죽지 않고 살아남아서 동족을 출애굽시키는 지도자로 쓰임 받았다. 살아남은 자는 살아남은 자의 몫을 하면서 살다가 가는 것이 세상을 세상답게 사는 길이 아닐까.
사도 바울은 어떤가. 죽었어도 벌써 죽었고 죽임을 당했어도 벌써 죽임을 당했어야 할 위기를 수도 없이 겪었던 사도 바울은 여전히 살아남아서 고린도교회에 둘째 편지를 이렇게 쓰고 있었다.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11:27-30). 그렇다. “약한 것을 자랑하는 것” 이것이 살아남은 자의 삶을 사는 모든 이들의 겸손한 고백이어야 할 것이다.
요즘, 영화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로 제작되어 상영되고 있는 주인공은 조선의 테레사로 불리는 엘리자베스 쉐핑(Elisabeth J. Shepping, 1880-1934)선교사이다. 서서평은 그녀의 한국식 이름이다. 그녀는 1912년에 이 땅에 와서 독립 운동가들을 옥바라지 하며 22년 동안 고아와 나병환자들 곁에서 홀몸으로 지냈고 국립 소록도 나병환자 거주지를 마련한 장본인이다. 그녀는 14명의 고아들을 자녀로 입양하여 함께 살며 돌본 간호원 출신 선교사이기도 하다. 그녀는 한일장신대학의 전신인 이일학교도 세웠고 조선간호협회도 발족시켰다. 풍토평과 영양실조로 54살에 숨을 거둔 그녀의 낡은 침대 밑에는 이런 글이 남아 있었다.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