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난· 조롱· 희롱
이 세상에 주변 사람들이나 남들로부터 비난이나 조롱을 받고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중국의 인민일보와 환구신보는 중국 공산당의 선전매체이다. 최근에 환구일보는 대한민국의 사드 발사대 추가 배치에 대해서 막말 비난을 쏟아 내었다. 신문 보도에 의하면 환구일보는 한국의 사드 배치에 대해서 “악성 종양”이라고 했고,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김치만 먹어서 멍청해진 것 아니냐”고 비난했다. “한국은 북핵 위기와 강대국 간의 다툼 속에서 개구리밥(浮萍)이 될 것이다.”라고 악담하는 글을 싣기까지 했다. 심지어는 “한국은 넘쳐 나는 절과 교회에서 평안을 위한 기도나 많이 해라.”하고 조롱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 후지 TV사의 뉴스 네트워크(FNN)은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요즘 아베 신조 총리와 전화통화를 하던 중에 대한민국의 문재인 대통령에 대하여‘거지’란 원색적인 표현을 써 가며 강하게 비판했다는 내용을 전했다. 한 나라의 정상이 동맹국의 정상에 대하여 제 삼국의 정상과 통화하던 중에 이처럼 원색적인 표현을 써 가며 비난했다는 것은 외교적으로 도를 넘어선 언동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지도자의 길을 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힘의 각축장인 국가 간의 외교에 있어서 힘을 키우지 않으면 언제 짓밟히고 언제 불이익을 당할지 모르는 긴장 관계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도 그런 비난과 조롱을 여러 차례 받으셨다. 심지어는 희롱을 당하기까지 하셨다. 한 번은 예수께서 고향을 방문하신 적이 있다. 모처럼 만난 마을 사람들에게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셨다. 마을 사람들은 서로들 놀라워하며 “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고 말하였다. 그리고 하는 말이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고 말했다. 앞뒤 문맥을 잘 살펴보면 ‘목수의 아들’이란 말은 무시하고 비난하는 표현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네 돌아가신 아버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목수 요셉이 아니냐”는 말이다. 이런 말투 속에는 은근히 마리아의 남편이었던 요셉의 목수 직업을 비하하고 예수의 가정사와 탄생 배경과 성장 환경에 대해서도 무시하고 깔보는 감정이 깔려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며 예수를 배척하였기 때문이다.(마13:57) 누가복음 4장에 보면 나사렛의 회당에서 안식일에 복음을 가르치신 적이 있다. 예수께서는 그 날 마을 사람들에 의해서 쫓겨나셨다. 회당에서 예수의 말씀을 듣던 자들은 화를 내면서 일어나서 예수를 동네 밖으로 쫓아내었다. 산꼭대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서 떨어뜨려 죽이려고 하였다. 예수는 그 순간을 모면하였고 그 현장을 피하여 나사렛을 떠나셨다.
예수의 소문은 가는 곳마다 퍼져 나갔다. 각색 병자들이 고침을 받고 귀신이 떠나가고 심지어는 죽은 자도 살아났다. 긴장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공회를 소집하였다. 공회란 70명으로 구성된 예루살렘의 정치 기구이다. 논의의 주제는 “예수가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었다. 그 해의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는 “한 사람을 죽여서 유대 민족이 평안할 수 있다면 그 한 사람을 죽여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냈다. 요한복음 11장 53절에 보면, “이 날부터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고 하였다. 이 사건 이후에 예수는 빈들에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 이란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셨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출입을 추적하고 있었다. 그들은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고 명령한 상태였다.
예수께서는 죽은 지 나흘이 지나고 이미 장례가 끝난 나사로를 살려 내셨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더욱 더 긴장하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나사로 까지 죽여 없애려고 모의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예수를 찾아 나섰고 예수를 믿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성취할 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예수는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요12:23)는 말씀을 하시며 곧 이어서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교훈을 말씀해 주셨다. 예수는 그 당시에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요12:27)라는 심각한 기도를 드리셨다.
예수는 그를 비난하고 무시하고 배척하며 죽이려 하고 멸시하며 조롱하고 희롱하는 무리들로 인해서 피투성이가 되셨다. 총독의 명을 받은 군병들은 공개적으로 예수의 옷을 벗겨 부끄러움을 주며 홍포를 입혔다.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웠다.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게 했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희롱했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하라.”어떤 이는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기도 했다. 어떤 이는 손으로 예수의 얼굴을 때렸다. 다시 홍포를 벗겨 낸 병사들은 예수의 옷을 도로 입힌 후에 십자가에 처형하려고 끌고 나갔다. 예수는 거반 죽어가는 참담한 모습으로 넘어지고 쓰러지며 골고다에게 까지 끌려 가셨다. 그리고 처참하게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셨다. 예수는 그렇게 숨을 거두셨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 묻혔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흘 후에 그를 다시 살려 내셨다. 예수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맞다. 비난과 조롱과 희롱의 끝에 영광스러운 순간이 기다리고 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이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다. 부활은 허구나 이념이나 사상이 아니라 역사요 진리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의 신비다. 공의와 선과 진리는 영원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주를 두려워하는 우리 민족의 앞날을 존귀하게 해 주시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