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파(蘭坡) 홍영후 이야기
지방 집회에 가면 가능한 오후 시간을 비워서 가까운 곳의 가볼 만한 곳을 찾아 가 고는 한다. 지난 주 화성지방 연합 집회를 인도하던 둘째 날 오후에 홍난파(1898-1941) 선생의 생가를 방문하였다. 그의 생가 터에서 오랜 만에 활짝 핀 봉선화(鳳仙花)를 보았다. 어렸을 적 시골에서는 봉숭아라고 불렀다. 그가 태어날 당시인 120년 전의 생가는 사라지고 지금의 초가집은 후대에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난파는 그의 호이고 본명은 영후이다. 그는 1898년 4월 10일에 그 곳, 화성군 남양면 활초리의 홍씨 집성촌에서 태어났다. 지금도 꼬불꼬불한 길을 한참 찾아 들어가야 하는 시골 마을이니 그 때는 더 시골이었을 것이다. 그 곳에 방문한 우리 일행 네 사람은 마당에 둘러서서 “나의 살던 고향”을 다 같이 노래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음악성이 뛰어났다. 아버지 홍준은 국악에 조예가 깊었고 집안 식구들이 거문고나 퉁소 등 전통 악기를 연주했으나 그는 앙금을 즐겨 연주했다. 그가 태어난 다음 해에 그의 온 가족은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사하였다. 그 후 그는 새문안교회에 다니면서 서양 음악을 접하게 되었고 그의 사촌 형과 조카들도 모두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었다. 그는 새문안교회에서 13살 때에 세례를 받았고 후에는 집사가 되었다. 성가대 활동 등 신앙생활을 적극적으로 하였다. 새문안교회를 비롯하여 많은 교회의 음악회에 초청 받아 바이올린 연주를 하였다.
그는 12살 때에 황성 기독교 청년회(YMCA) 중학부에 입학하였다. 그는 장난감 바이올린을 구입하여 숫자보를 사용하여 '도레미법'을 터득하였고 아르바이트로 7원 50전을 모아 바이올린을 구입하여 음악연습을 시작했다. 1912년에 조선 정악 전습소 서양악부 성악과에 입학하여 성악을 전공했다. 한동안 음악평론가로 활동하기도 한 그는‘한국의 슈베르트’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작품 중 〈봉선화〉, 〈성불사의 밤〉,〈옛동산에 올라〉, 〈고향 생각〉, <나의 살던 고향은> 등 십 여곡의 가곡을 작곡하고〈고향의 봄〉, 〈나뭇잎〉, 〈개구리〉 등 111개의 동요를 작곡하여 천재 작곡가로 인정을 받았다. 일제의 압박 아래 살아가는 설움과 한을 노래하며 조국의 광복과 평화의 시대가 오기를 염원한 것이“봉선화”의 줄거리이다. 우린 대개 1절만 기억하며 부르지만 3절의 “북풍한설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있으니...”라는 가사가 그러하다.
서울의 독립문 맞은 편 언덕길을 올라가다 보면 홍파동 월암공원에 그가 살던 붉은 벽돌 이층 건물의 아담하고 아름다운 집이 지금도 남아 있고 뜰에는 그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그는 18살 때에 김상운과 결혼하였고 조선 정악전습소 서양악부 교사로 부임하여 <악전대요>, <통속창가집>을 출간하였고, <간이무답행진곡집>을 편찬하는 등 활동을 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권유를 못이겨 세브란스의전에 입학한 그는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인하여 1년 만에 중퇴하고 이듬해 초에 태어난 첫 딸 홍숙임을 데리고 아내와 함께 일본 도쿄 우에노(上野)음악학교 예과(預科)에 유학하여 일 년 동안 공부하였다.
1919년 3월 그는 3·1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잠시 귀국하였다. 3·1 운동 직후 그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복학을 신청했으나 받아주지 않자 좌절하고 다시 귀국하여 첫 작품의 작곡에 매진하였다.
1920년에 <애수>를 작곡했는데 이 작품은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봉선화>의 원곡이다. 그 해 일제 식민지 상태에서 조선인 최초로 독주회를 열었다. 1921년 첫 창작 소설집인 <처녀혼>을 발간한 이후로 <음악 세계>, <음악계> 등의 음악 잡지를 발간하기도 하고 바이올린 곡 작곡과 연주회 등 왕성한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는 1920년 매일신문사에 입사하여 기자생활을 하며 생업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그는 결혼 10년 만에 일찍이 세상을 떠난 아내 김상운과의 사별의 아픔을 안고 다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도쿄 고등음악학원 야간반에 편입학하였다. 도쿄 고등음악학원에 재학하면서 그는 오늘 날의 NHK 교향악단의 전신인 도쿄 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린 연주자로 당당하게 입단하였다. 1929년 고등음악학원을 수료한 뒤 도쿄 교향악단을 사직하고 귀국했다.
평소에 이웃에 살면서 가깝게 지내던 김형준이 가사를 쓰고 홍난파가 곡을 붙여 불려진 <봉선화> 노래가 많은 사람에게 전해지기 시작한 것은 1926년 이후이다. 그 해에 홍난파는 <세계명작가곡선집>을 편찬하였는데 그의 작품 <봉선화>가 여기에 수록되었다. 이듬해 라디오 방송을 통해 봉선화 곡이 소개되었다. 그 당시에 봉선화 노래를 불러서 널리 퍼지게 한 소프라노 김천애의 증언에 따르면 김형준이 살던 집 울 안에는 봉선화 꽃이 가득했다. 김형준은 봉선화를 보면 늘 “우리 신세가 저 봉선화 꽃 같다.”는 얘기를 자주 했다고 한다.
그는 더 많은 것을 배우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미국의 셔우드 음악학교를 2년간 다녔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도산 안창호가 이끄는 흥사단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홍영후의 미국 생활은 경제적인 어려움과 교통사고의 후유증 등 어려움이 많았다. 그는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의 관련자로 지목되어 경성부 종로경찰서 경찰에 의해 검거되었다. 72일 동안에 걸친 옥고를 치른 후에 늑막염으로 고생하던 중에 석방되었으나 몇 년 후인 1941년 8월 30일에 결핵균이 머리로 들어가게 되면서 뇌결핵으로 이어져 눈을 감고 말았다. 그의 나이 43살 때의 일이다. 그는 "내가 죽거든 꼭 연미복을 입혀서 화장(火葬)해 달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