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각 이야기
가까이 사는 이웃이 주말 농장에서 농사한 채소와 방울토마토를 문 앞에 갖다 놓았다. 검은 비닐봉지 안에 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 중에는 노각도 두 개 있었다. 어렸을 적 기억에 오이는 이 계절의 요긴한 반찬거리였다. 중학교 다닐 때에 오후에 집에 돌아 와 보면 가족들은 모두 다 들판에 일하러 나가고 집이 텅 비어 있고는 하였다. 한 시간 이상을 뙤약볕에 걸어 왔기에 목도 마르고 속도 궁진했다. 냉장고 없던 시절 이야기이다. 찬장을 뒤져 보고 가마솥을 열어 봐도 먹을거리란 아무것도 없다. 남아 있는 식은 밥조차도 없다. 그러면 집 뒤에 있는 텃밭에 가서 커다란 오이를 따서 한 입 덥석 물고는 하였다. 땡볕을 받아서 오이조차도 따뜻하였다. 다시 부엌에 들어가서 찬장을 뒤진다. 오이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입 안 가득하게 얼큰한 화기(火氣)가 전해지고 식은땀이 쫙 뜬다. 순식간에 커다란 오이 한 개를 다 먹어 치운다.
그렇게 허기를 해결한 후에 뒷산으로 소를 먹이러 나아간다. 산딸기도 따 먹고 개암도 따 먹고 운 좋으면 잘 익은 보리수 열매도 따서 먹고는 하였다. 덩굴 식물인 오이는 자고 일어나서 둘러보면 열고 또 연다. 자라기도 잘 자란다. 그래서 어린애들이 쑥쑥 잘 크는 것을 보면 “오이처럼 잘 자란다.”고 말하고는 했다. 그런 오이가 주인의 눈에 가려진 채로 덩굴의 수북한 이파리 속에서 한 여름을 자라나다 보면 노각이 된다. 노각은 늙은 오이를 말한다. 오이가 따로 있고 노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오이는 자라다 말고 병이 들어서 모양 없이 비틀어지고 시들어져 버리는 것도 있다. 그러나 노각은 오랜 날들 동안 크고 탐스럽게 누런색을 띠며 멋들어지게 농익어 간다. 영어로도 노각을 ‘잘 익은 오이’(an overripe cucumber)라고 표현한다. 영어로는 해삼(海蔘)을 ‘바다 오이’(sea cucumber)라고 부른다. 모양이 오이처럼 생겨서 일 것이다.
생각해 보라. 설익은 것이 문제이지 너무 잘 익고 농익은 것이 문제될 것은 전혀 없다. 노각 무침이나 노각 짠지나 노각 요리 맛을 아는 사람은 오이 맛과 노각 맛을 구별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이 맛이 좋지만 노각의 은은하고 감칠 맛 나는 그 맛을 비교할 수는 없다. 물론 오이 맛은 오이 맛이고 노각 맛은 노각 맛이지만 구태여 비교하라면 어떻게 오이 맛이 노각 맛을 따라 가겠는가.
맛 뿐 만 아니라 노각의 효능은 더운 여름철에 입맛을 돋게 하고 수분보충용으로도 좋다. 수분 함량이 많다보니 갈증 해소와 피로회복에 도움이 된다. 또한 식이섬유가 풍부하여 포만감을 느끼게 해 주기 때문에 다이어트에도 도움이 되고 이뇨작용에 도 으뜸이다. 노각은 칼륨이 풍부해 체내 노폐물을 배출하는데 도움을 주고 몸 안의 과잉 염분을 배출 시켜 주기 때문에 혈압 조절에도 효능이 있다.
인생도 그렇지 않나. 병균과 해충을 이겨 내고 여름이 거의 다 가도록 끝까지 붙어 남아서 묵직하고 굵직한 크기의 누렇게 잘 익은 노각은 애 오이와는 차원이 다르다. 노각이 되려면 비바람이 휘몰아치고 몹시 덥고 때로 가물고 혹은 계속하여 장마 비가 내리는 긴긴 우기 철을 다 지내기까지 버티고 남아 있어야 한다.
성경의 인물들도 그렇지 않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만나기 이전에 이미 인생살이의 별의별 풍상을 다 겪은 인물이 아니었나. 그 때나 오늘 날이나 75년 쯤 인생을 살았다면 희로해락 중에서 무슨 안 겪어 본 일이 더 있겠는가. 그런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언약으로 불러 내셔서 25년 후에 이삭이 태어나기 까지 그의 나중 생애를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 다듬어 가셨다. 이삭, 야곱, 요셉, 여호수아, 갈렙, 기드온, 사무엘, 다윗, 이사야, 예레미야, 엘리야, 엘리사, 다니엘, 에스겔, 느헤미야 등 저들 모두 다 노각처럼 하나님 안에서 노련한 생을 믿음으로 살았던 인물들이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 제사장 사가랴나 그의 부인 엘리사벳도 그러하였다.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 요셉은 그런 시련과 생의 우여곡절을 일찍이 겪을 대로 다 겪었다. 30살의 요셉은 애늙은이처럼 노련한 청년으로 커 있었다. 그는 열일곱 살에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갔고 13년을 별의 별 고생을 다 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않나. 요셉은 나이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환난과 곤고를 남다르게 겪었다. 나중에는 여 주인으로부터 누명을 쓰고 감옥에 까지 가서 지내야 했다. 그 당시 애굽의 감옥에 갇힌 히브리 노예 청년 요셉을 구출해 줄 수 있는 힘이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감옥의 요셉을 바로 임금 앞으로 불러 내셨다. 그리고 그의 나이 30에 애굽의 총리에 등극하게 하셨다. 총리가 될 당시에 요셉은 겨우 30살이었으나 그는 그냥 젊은이가 아니었다. 요셉은 온갖 세상 풍상을 넉넉하게 다 겪은 인생 노장과 같은 모습으로 임금 바로 앞에 나아가 섰다. 바로 왕은 요셉의 지혜에 감탄하였고 국가 경영의 전권을 그날로 요셉에게 위임하였다. 임금 바로는 요셉이“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창41:38)임을 알아 차렸다.
요셉은 그 후 80년 동안 애굽의 총리였다. 왕이 죽고 새 왕이 세워지도록 요셉의 자리는 변하지 않았다. 요셉은 110년의 생을 노각처럼 살다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갔다. 창세기의 시작은 창조 이야기이지만 창세기의 끝은 요셉의 죽음을 다룬다. 요셉은 죽음 직전에 “하나님이 돌보시고 인도하여 내사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실 것이니 내 해골도 메고 그 땅으로 올라가라.”고 가족들에게 유언하였다. 인생은 주 안에서 노각처럼 점점 그렇게 영원을 향하여 익어 가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