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란 무엇일까
최근 언론에서 기독교의 회개(悔改)에 대하여 자주 언급하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서 모 여성 검사가 8년 전에 법무부 고위 관료인 검찰 간부로부터 심한 성희롱을 받았다. 장례식 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 자리에는 당시 법무부 장관도 동석해 있었다. 조직 사회의 어렵고 불편한 자리에서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수치스럽고 민망한 일을 겪었다. 그녀는 그와 같은 씻을 수 없는 통탄(痛嘆)할 추행을 당하고도 항의를 하기는커녕 사과 한 마디 받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 사건 이후에 예전에 없던 사무 감사 지적을 받았고 그 동안 쌓아 온 경력에 어울리지 않는 부당한 인사 보복도 당하였다. 그처럼 성추행을 당하는 경우에 그 상처란 신체적으로도 그러하고 정신적으로나 정서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상태로 평생토록 지낼 수도 있다. 서 검사는 사건 이후로 불면증, 어지럼증, 두통 등에 시달리며 지냈다. 자살을 고민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계속되는 스트레스로 둘째 아기가 유산되는 어려움도 겪어야 했다. 한의사인 남편은 감정을 다스리며“만약 고소하면 사회의 모든 시선이 피해 여성인 당신에게 집중될텐데 그 후유증을 감당 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평소에 밝은 옷을 즐겨 입던 서 검사는 그 사건 이후로 검은 색 옷과 검은 바지를 주로 입고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그 사건의 상대방은 법무부 고위직에서 퇴직 한 후에 기독교에 귀의해서 아내의 손을 잡고 교회 생활을 시작하였다. 수도권의 초대형 교회에서 세례도 받았다. 그 많은 회중들 앞에서 세례 받는 기념으로 간증도 하였다. 그 후 이곳저곳 불려 다니며 간증하는 일도 여러 차례 있었다. 그는 간증 내용 중에 ‘회개’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기독교의 세례란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신앙으로 살아가기를 고백하는 이들에게 증표로 행하는 예식이다. ‘메타노이아’라는 회개의 뜻은 ‘생각의 변화’를 말한다. 생각이 변하고 바뀌기 전까지는 변하는 게 없다. 말이나 행동이나 습관의 변화는 생각의 변화로 인한 결과이다. 생각에 변화가 없는데 삶에 변화가 올리는 없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은혜를 받았다’든지 ‘성령을 받았다’든지 혹은 ‘성령과 동행한다.’는 것은 복음을 깨닫고 변화된 자신의 삶을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삶으로 가꾸어 가는 회개와 성화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회개란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이루어지는 동시적인 사건이어야 한다. 위 사건을 예로 들어 보자. 상대방 남성은 ‘회개 하였다’, ‘새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고 다니지만 자신의 과거의 일탈 행동으로 인해서 상대방은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슬퍼하며 극복하지 못하는 통탄스럽고 참담한 악몽 속에서 여전히 시달리고 있지 않나. 한 남편의 아내요 자녀들을 키우는 엄마인 그녀의 마음속에 가득 찬 수치심과 분노와 아픔을 누가 씻어 줄 것인가.
성경,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여리고 성의 세리장 삭개오에 대한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그는 부자였다. 작은 키의 그는 돌무화과 나무 위에 올라가 앉았다. 그리고 예수가 그리로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 나무 아래를 지나시다가 나무 아래서 위를 쳐다보셨다. 그리고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즐거워하며 급히 내려온 삭게오는 예수를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삭개오는 예수께 고백하였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이와 같은 고백을 들으신 예수는 “이 집에 구원이 임하였다.”고 축복해 주셨다. 여기서 말씀하는 구원(救援)이란 회개를 실천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영적 상태이다.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 앞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붙잡힌 여인을 끌고 나왔다.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저들은 모세의 율법을 언급하며 “이러한 여자는 돌로 치라”고 명하지 않았느냐고 질문하였다. 저들은 예수께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하고 물었다. 땅에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던 예수는 일어나서 저들에게 말씀하였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이 말씀을 하신 예수께서는 다시 몸을 굽히고 손가락으로 땅에 글씨를 쓰고 계셨다. 그 현장을 지켜보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부터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한 사람씩 한 사람씩 그 현장을 떠나갔다. 그 곳에는 예수와 그 여자만이 남아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이 사건이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은 다양하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해 보자. 이 여자와 음행하려던 상대방인 유대 남자의 나중의 삶은 어떠하였을까. 또 다른 질문을 해 보자. 예수 앞에 그 여성을 끌고 왔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각각 어떤 기준의 사회생활을 계속하였을까. 예수께서는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8),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욕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2),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7:5)는 등의 가르침을 주셨다.
성경이 교훈하는 회개란 악을 떠나 선을 행하는 삶으로의 변화를 말한다. 불의한 삶에서 의로운 삶으로, 거짓되고 위선이 가득하고 교만한 삶에서 진실하고 겸손한 삶으로의 변화가 뒤 따라야 진정으로 회개한 자의 삶이 아니겠는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첫 말씀이 이것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
가족이라면 그렇게 함부로 대하며 살아 갈 수가 있을까. 성경이 말씀하는 회개란 그렇게 값싼 구원의 방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기독교 신앙을 헐값으로 도피성 삼는 경우는 없어야만 할 것이다. 별의 별 다양한 상처를 입고 마음 아파하는 이 세상의 모든 이웃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고 몸 찢겨 이룩하신 십자가의 사랑과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부활의 영광 가운데 가득하기를 진심으로 소망하는 것은 너무나 나약한 기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