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카락
우리는 가늘고 별것 아닌 것을 말할 때에 ‘머리카락’에 비유하고는 한다. 작은 것을 말할 때에‘티끌, 먼지, 눈곱’에 비유하는 것처럼 말이다. 요즘 세상은 환경공해가 심각해져서‘미세 먼지’라는 표현을 쓸 정도의 시대가 되어 버렸다. 그 폐해의 심각성이 이미 위험 수위를 넘어 선지 오래이다. 모든 사람들이 방독면을 쓰고 지내야 할 지경이 되었으니 말이다. 짧은 시간을 말할 때에는 ‘눈 깜짝할 사이’라는 표현을 쓴다. ‘순간’(瞬間)이란 단어의 ‘순’(瞬)은‘눈을 깜짝이다’라는 뜻이다. 이 모두가 작고 적고 짧고 별것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사소한 것들을 표현하는 말들이다.
사람의 머리카락은 계속하여 자라나고 날마다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빠진다. 한 가닥으로 하면 참으로 별 것 아닌 것 같으나 그 머리카락이 빠져 나가고 또 빠져 나가면 나중에는 성경의 ‘엘리사’의 외모처럼 되고 만다. 열왕기 하 2장에 보면, 벧엘로 올라가던 선지자 엘리사를 향하여 어린아이들이 “대머리여 올라가라.”하고 반복하여 놀렸다. 못마땅하게 여긴 엘리사가 뒤를 돌아보며 아이들을 저주하였다. 그 때에 수풀에서 암곰 두 마리가 나와서 마흔 두 명의 어린이들을 찢었다. 이 사건이 교훈하는 바는 각자가 알아서 받을 일이다.
집안 식구 몇이서 사용하는 세면대에 날마다 빠져 흘러 들어가는 머리카락이 쌓이고 쌓여서 하수관의 물이 잘 내려가지 않게 된다. 그 처리시설을 분해해 보면 조금 씩 쌓이기 시작한 머리카락들이 뭉치가 되고 물의 흐름을 막아 버린 것을 알게 된다. 그걸 처리하고 나면 다시 물이 콸콸 시원하게 흘러내린다.
사람이 생활하다 보면 생활공간에 몸에서 마른버짐 같은 미세한 것들이 떨어져서 머리카락과 작은 터럭들과 먼지가 뒤 섞인다. 영어로 그걸 ‘먼지 토끼’(dust bunny)라고 한다. 그게 작은 덩어리를 이루고 바람에 날리면 이리 굴러다니고 저리 쏠려 다닌다. 아마 집집마다 침대 밑이나 장롱 밑에 그런 먼지 토끼를 꽤 여러 마리씩 키우며 살 것이다.
죄(罪)란 것이 그렇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것들이 쌓여서 큰 문제를 일으킨다. 우리 속담에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말이 있다. 생각하여 보라. 바늘을 훔친 것은 작은 도둑질이고 남의 외양간에서 소를 풀어 간 것은 큰 도둑질인가. 그렇지 않다. 도둑질은 도둑질이다. 물론 세상 법으로 하면 경범죄로 다루는 죄가 있고 중형에 처해지는 죄목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죄의 문제를 그렇게 다루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미움이 곧 살인이며 음욕을 품는 것은 곧 간음한 것이라.”고 교훈하셨다. 형제를 향하여 노(怒)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고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 가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형제를 향해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경고의 말씀도 해 주셨다. 여기서 ‘라가’란 ‘히브리 사람들의 욕’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최초의 인간은 아담과 하와이다. 에덴동산은 저들에게 주어진 완전한 축복의 동산이었다. 그처럼 복되고 아름다운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였다. 그 범죄란 것이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서 먹은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다음부터는 다시는 그러지 말고 제발 내 말 좀 잘 들으며 에덴동산에서 행복하게 잘 들 살아라.”하고 타이르고 마셨으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상황을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은 준엄했다. 결국 아담과 하와는 에덴에서 추방당하고 말았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까지 하셨을까.
C. S. 루이스(C. S. Lewis, 1898-1963)는 그의 책, <순전한 기독교>에서‘가장 큰 죄’라는 대목을 다루었다. 그가 심각하게 취급한 죄 중의 하나는 교만(驕慢, pride)과 자만(自慢, self-conceit)에 관한 것이다. 이에 반대되는 기독교의 덕목은 겸손(謙遜)이다. 그는 교만에 대하여 이렇게 규정하였다. “성경이 다루는 가장 핵심적인 악은 교만이다. 성적(性的) 부정, 분노, 탐욕, 술 취함 같은 것들도 이 악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천사는 바로 이 교만 때문에 악마가 되었다. 교만은 다른 악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맞서는 마음의 상태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돈 많고 똑똑하고 잘 생긴 것을 뽐낸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남보다 더 돈 많고 더 똑똑하고 더 잘생긴 것을 뽐내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똑 같이 돈 많고 똑똑하고 잘 생겼다면 교만할 거리가 없다. 인간을 교만하게 만드는 것은 남들과의 비교이다. 즉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데서 오는 즐거움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드는 것이다. 경쟁이라는 요소가 없으면 교만도 없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교만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위선이다. 그들은 상상 속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이런 이들은 허깨비 하나님이 자신을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훨씬 낫게 여기며 인정해 준다고 생각한다. 즉 하나님께 상상 속의 겸손을 1페니 지불하고 다른 사람들을 향한 교만을 1파운드어치 얻어 내는 것이다.” 예수는 이런 이들의 교만에 대하여 지적하신 바 있다. 이런 이들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하고도 마지막 날에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책망을 듣게 될 자들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집짓기에 비유하였다. 사람들은 금, 은, 보석, 나무, 풀, 짚으로 집을 짓고 산다. 그야말로 교만의 집을 짓고 사는 것이다. 작은 악과 교만이 쌓이고 쌓여서 인간은 결국 스스로 파멸의 구렁텅이를 향해 돌진하고 만다. 나중에 불의 공적 앞에 타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 구원의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3:11)고 선포하였다. 바울은 이렇게 교훈하였다.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은 다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3:1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