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누리는 사귐
요한 일서를 기록한 이는 사도 요한이다. 사도 요한이란 세베대의 아들인 야고보의 형제 요한을 말한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과 요한 1, 2, 3서와 요한 계시록을 기록한 영광스러운 제자 중 한 사람이다. 가롯 유다 대신이 맛디아로 충원된 12제자들은 사도 요한 외에는 모두가 다 순교자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유일하게 장수하다가 주후 100년경에 94세를 일기로 주님께 돌아간 것으로 전해진다.
우리는 에베소교회의 담임 목사였던 사도 요한이 80대 중후반에 왜 이러한 편지를 남겨야 했는가 하고 질문하게 된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그 첫째는 당시 로마의 황제인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재위 A.D. 81-96)가 이시스(Isis)라는 우상을 숭배하며 자기 자신을 또한 신으로 칭함받기를 원했다. 그러하다 보니 자연히 기독교인들을 심하게 박해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당시의 기독교인들에게 환난과 핍박을 잘 견디고 인내하며 구원을 이루는 성도가 되기를 바라면서 이 편지를 썼을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교회가 탄생한지 50여 년이 된 그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오해와 이단의 횡포가 점점 심각해져 가는 것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에 대하여 세상을 떠나가기 전에 기록으로 남겨서 후대에 전해야만 하겠다는 생존해 있던 예수의 마지막 제자로서의 부담감이 컸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는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라는 이단(異端)이 극심하였다. 영(靈)과 육(肉)을 분리하는 이원론(二元論)적인 헬라의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저들은 구원은 육체와 상관이 없으며 육은 악한 것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저들은 육체의 타락과 죄악에 대하여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도덕 폐기론자들이었다. 이처럼 기독교의 거룩한 삶을 강조하는 교훈을 배척하려 하는 심각한 이단 집단이 영지주의자들이었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께서 이 땅에 몸을 입고 오셔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룩하신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대하여 역사적인 예수를 부정하는 이들이었다.
그러므로 점점 연세가 들어가던 사도 요한은 로마 황제의 박해로부터 인내심을 갖고 믿음을 지킬 것과 영지주의와 같은 이단으로부터 진리를 지켜나가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계속해 나갈 것을 권면하기 위해서 이 세 편의 편지를 쓰게 된 것이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1장 1절의 시작 부분에서 무엇이라고 말씀을 시작하고 있나.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말씀”이며 그는 태초부터 계시던 분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자, 그러면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에서 강조하는 바가 무엇인지 좀 더 자세하게 묵상하도록 하자.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누리라.
요한일서 1장 2절에 보면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한 생명이라고 소개한다. 뿐만아니라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신 동안에 그분의 말씀을 친히 듣고, 눈으로 그분을 보고, 손으로 만지기까지 했다는 경험을 강조하고 있다. 그 당시에 얼마나 많은 이단들이 예수의 성육신 즉 육체로 오셔서 기사와 이적을 행하시고 수 많은 천국 비유를 말씀하신 역사 중에 살아 계시던 예수를 부정하였으면 이런 강조를 반복한 것일까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이렇게까지 편지의 시작부터 “나는 예수를 보았고 그 분의 말씀을 친히 들었고 손으로 만지기 까지 예수와 접촉하며 지내던 제자이며 증인이다”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은 이 땅에 생존해 있는 예수의 마지막 제자로서의 절규와 같은 심정을 느끼게 한다.
요한일서 1장에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는 ‘사귐’이란 단어이다. 사귐이 무엇인가. 3절과 6절과 7절에서 계속해서 ‘사귐’이란 표현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사귐이란 교제한다는 말이다. 현대인의 성경에 보면 ‘사귐’이나 ‘누림’ 대신에 ‘교제’(交際)라는 단어를 썼다. 사귄다는 것은 시공(時空)을 같이하며 시시때때로 손을 맞잡고 대화할 수 있는 같은 공간 안에서 상대방과 삶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같이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제는 상호적이다. 3, 7절의 사귐의 바탕은 6절의 ‘하나님과의 사귐’에 근거하는 것이다. 우리의 사귐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과의 사귐이며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로서의 서로의 사귐이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평생 사역한 태백의 예수원 수도 공동체의 설립자인 성공회 사제였던 대천덕( R. A. Torrey, 루번 아쳐 토리 III, 1918-2002)신부는 교회를 정의하기를“교회(敎會)라고 하지 말고 교회(交會)라고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우리는 서로가 주 안에서 형제자매의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서로를 돌보고 섬기고 나누고 베풀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교회다. 그것이 성도들의 사귐이다. 성도는 주 안에서 기쁨과 슬픔과 즐거움과 그 어떤 고난이라도 함께 더불어 누리며 극복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영원한 생명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몸 찢기고 피와 물을 쏟아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기쁨을 누리며 사귀며 살아가는 성도의 참모습인 것이다.
빛이신 하나님의 진리를 행하라.
요한일서 1장 5절에 보면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했다. 우리가 잘 아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장 8절, 16절)는 말씀도 요한 일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처럼 사도 요한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에 대하여 심각한 오해에 빠져서 이단의 미혹에 휩싸여 있는 그 당시의 수 많은 안타까운 영혼들을 향하여 사랑이시며 빛이신 하나님의 진리 안으로 돌아 올 것을 권면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편지를 받아 읽는 초대교회 성도들마다 영지주의와 같은 어리석은 이단에 빠지지 않고 빛이신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사귐을 갖고 진리를 행하는 빛의 자녀가 되기를 촉구하고 있다.
그렇지 않나. “하나님께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5절),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진리를 행하지 아니하는 것이다.”(6절), “하나님이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서 행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도 서로가 사귐이 있는 것이다.”,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7절),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한 것이다”(8절)
이런 교훈들을 논리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요한일서 1장을 차근 차근 읽다 보면 우리가 성찬식 시간에 자주 묵상하는 요한일서 1장 9절 말씀에서 눈길이 멈추게 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의 초청인가. 우리는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점을 계속하여 증거하여야 한다.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이 죄인임을 자백하고 시인할 수 있어야만 한다. 빛의 자녀의 삶으로 드러내 보여야 한다. 성도는 어둠을 행하면 안된다. 여기서 사도 요한이 말하는 어둠이란 죄와 악을 말한다. 죄의 두려움과 악의 끝을 알면서도 죄를 행하고 악을 반복한다면 그 끝은 지옥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빛이신 하나님과 사귀며 살아가는 신앙생활의 증거는 어둠에 행하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