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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부름 받은 한 사람(출3:1-12) 2012.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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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2-01-15 20:34 조회 17,074 댓글 0
 
낙천지명(樂天知命)이란 말이 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안다는 뜻이다. 우리 각 사람의 나날이 그런 생활이 되길 소망하자.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유명한 음악인인 정명훈의 숨겨진 실력 중의 하나가 요리다. 정명훈은 1953년생인 그는 그의 가족과 함께 그가 8살 되던 해인 1961년에 미국 씨애틀로 이민을 떠났다. 그는 이미 4살 때에 피아노를 시작했고 3년 후인 7살 때에 서울 시향과 협연하면서 천재성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그의 부모는 식당을 경영하며 여러 남매를 키웠다. 오늘 날은 그의 누이들 중에 첼리스티 정명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씨와 함께 세계가 알아주는 음악 가족이 되었다. 늘 분주한 이민 사회의 식당 주방을 드나드는 일은 어렸을 적 정명훈의 형제자매들에겐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과 중의 하나였다. 정명훈은 어려서부터 음식 만드는 일을 좋아 했다. 그는 스스로도 자신이 음악가가 아니었다면 요리사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이다. 지금도 평소에 연주가 없는 날에는 집에서 음식 만드는 것을 즐겨 한다고 한다. 그는 뉴욕의 매너스 음악 학교에서 피아노와 지휘를 공부하고 나중에 줄리아드 음악대학원에서 지휘를 공부했다. 24살에 뉴욕 유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되었다. 28살에 LA 필 하모닉의 부 지휘자가 되었다. 32살에 독일 자르브르켄 방송교향악단의 음악감독겸 상임 지휘자가 되었다. 그 후로 뉴욕 필 내셔날 교학악단과 보스톤 교향악단과 크리블랜드 교향악단 등의 객원 지휘자로 왕성한 활동이 계속되어 왔다. 최근에도 세계 각국의 음악계에서 차지하는 그의 명성은 대단한다. 그렇게 분주한 삶을 살아가는 그가 지난 2003년에는 <마에스트로 정명훈의 Dinner for 8>이란 요리 관련 전문 서적을 출간한 적도 있다. 거인 성악가 파라로티는 연주회가 끝나고 나서 한꺼번에 닭 요리 여섯 마리 분량을 한 번에 먹었다고 하는 소문도 있지만 정명훈은 대식가가 아니라 미식가라고 한다. 그는 책에서 음식과 음악이 서로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도록 여러 가지 음식을 먹으면서 그 분위기에 맞게 들을 수 있는 클래식 음악 57가지를 골고루 소개해 주고 있다. 가령 에피타이저로 마늘빵을 먹는 동안에는 로시니의 ‘알제리아의 이탈리아 여인’을 감상하고, 고기나 생선을 주 요리로 먹는 순간에는 베토벤의 ‘교향곡 3번 운명’이 어울리고, 간단한 후식을 먹는 동안에는 쇼스타코비치의 소품 ‘로망스’를 들으면서 식사를 마무리하는 것이 참 좋다고 조언하기도 한다. 6개월간에 걸쳐서 네 나라의 네 도시로 이동하면 요리하고 촬영하고 글을 써서 만든 그의 책에는 무려 60가지의 요리 솜씨를 담아내고 있다. 어려서부터 천재적인 피아니스트로 성장하여 명지휘자로 자리 잡은 그에게 있어서 요리는 지휘와 또 다른 매력을 갖는 세계라고 강조한다. 같은 재료로도 서로 다 다른 맛과 모양의 음식이 만들어 질 수 있듯이 음악도 누가 연주하고 누가 지휘하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묘미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는 음식과 음악의 같은 재료와 양념을 가지고 서로 어떻게 표현하느냐(interpret)에 따라서 서로 다 다른 맛이 나는 것에 공통점이 있어서 좋아한다고 했다. 지휘자나 요리사나 다 마찬가지로 연주자 즉 ‘interpreter’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 각 사람을 연주하시는 연주자(interpreter)이시다.

사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 그러하지 않은가. 내 생을 주관하는 것이 나 자신일 수도 있지만 내 인생의 시간과 건강과 능력과 재주와 기술과 역량과 색깔과 맛을 가지고 절묘한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내 인생의 지휘자요 요리사요 연주자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나의 생을 맡기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위탁하는 겸허한 자세로만 살아갈 수 있다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요 모세를 불러서 쓰신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의 생애를 통하여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열매가 풍성하게 맺도록 인도해 주실 것이다.

사실 동물의 세계와 인간의 삶의 차이는 그 삶의 질에서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저 아프리카의 대 평원에서 자유롭고 평화롭게 풀을 뜯는 얼룩말을 비롯한 그 여러 종류의 초식동물들의 여유롭고 평화로운 모습은 바라다보기만 하여도 마음에 쉼과 안식을 누리게 해 준다. 길고 예쁜 다리는 뽐내며 한가로이 물가를 거니는 홍학 떼를 보라.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와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얼마나 염려가 많은가.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공중에 날아다니는 새와 들에 핀 백합화를 통해서 인간이 염려를 버리고 살아가야 할 것을 당부하신 적이 있지 않은가.

평생을 평탄하게 살아가는 이들도 있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우여곡절이 적지 않게 살아간다. 한해를 살아가려 해도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경험해야 하듯이 살아가는 것은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변화를 경험해 나가는 것이 아닌가. 하루를 살아도 새벽과 저녁이 있고 낮과 밤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본문의 주인공은 모세야 말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간 주인공이다. 그가 태어나던 당시에 그의 부모가 살아가던 곳은 애굽의 노예 현장이었다. 아브라함의 후예들이 요셉의 때로부터 모세의 때까지 4대의 기간인 400년 동안 노예생활을 계속하였다. 모세는 그런 시절에 태어났고 3개월 만에 부모의 곁에서 나일강에 갈대 상자에 담긴 채 버려져야하는 운명이었다. 그런 그가 나일 강에 목욕하려고 나갔던 바로의 딸 공주의 눈에 뜨였고 왕궁 40년을 거쳐서 애굽 사람 살인하고 피신한 광야 생활 40년이 다 차가던 나이 80의 때인 어느 날 하나님의 부르심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미디안 광야에서 장가들고 장인인 이드로의 양을 치며 늙어가던 모세가 호렙 산의 떨기나무 가운데로 치솟아 오르는 불꽃의 환상을 보는 가운데 여호와의 사자 즉 천사의 임재를 체험한 것이다. 한참을 바라보는데 불이 붙는 것 같기는 한데 나무가 타지는 않는 떨기나무의 희한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좀 더 가까이 가서 떨기나무의 불붙는 광경을 자세히 보리라고 다가가던 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다. 그리고 “모세야 모세야”하고 부르셨다.  모세는 곧 대답하였다. “제가 여기 있나이다.” 이것이 모세를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70억이 넘는 인구들 가운데 나의 이름을 아실뿐만 아니라 부르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불이 붙는 광경의 한 가운데 있는 떨기나무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던 모세에게 명령하셨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3:5)

여기서 시작해서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신 부르심으로 그에게 구체적인 명령을 시작하셨다.

발의 신을 벗는 과거와의 단절(斷絶).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신을 벗는 것은 몇가지의 뜻이 있다. 당시에는 노예들이 신을 벗고 살았다. 주인과 노예의 차이였다. 또한 신을 벗는 행위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된 인간이 자신의 악함과 부족함과 연약함을 인정하고 경의를 표하는 행위이다. 이것을 하나님은 요구하신 것이다. 그 말씀 앞부분에 보면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지리적으로 거룩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왜 그 곳, 호렙 산이 거룩한 땅인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모레 상수리나무 곁의 그 곳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거룩한 땅이었다. 이삭에게 있어서는 원주민들에게 빼앗기던 우물을 더 이상 빼앗기지 않고 새로운 우물 샘 곁에서 그 곳 이름을 르호봇이라고 이름 지었던 적이 있다. 이삭에게 있어서는 그 광활하고 우물 샘이 콸콸 터져 나오던 그 곳이 거룩한 땅이었다. 야곱에게 있어서는 형에게서 장자권한 빼앗으면 뭐가 될 줄 알았고 앞이 안 보이기 시작한 연세 많은 아버지 이삭에게 별미 대접해 드리고 축복 기도 받으면 금방 뭐가 크게 달라질 줄 알았으나 오히려 형에게 좇기고 피하여 밧단아람의 외삼촌 집을 향해 도망가던 루스 광야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그 베델의 경험이 거룩한 땅의 경험이었다. 자 이 즈음에서 당신의 거룩한 땅은 어디인가. 우린 지리적으로 이 곳이다 저 곳이다 하고 말하면 안 될 것이다.

하나님은 증거 있는 변화의 때와 장소를 기대하신다. 그러므로 과거와 단절하고 절대 순종의 길을 따라 나서기를 기대하신다. 젊은이들이 군에 입대하면 세상 신 벗기고 새롭게 지급하는 군화를 신게 한다. 아무 신이나 신으면 안 된다.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벗으라 하시면 벗고 신으라 하시면 신는 그 발 그대로 살아가고, 그 지정하시는 신을 신으며 거룩한 땅에 서야 한다. 이것이 부르심이며 소명이다. 지금 당장 편하고 좋으니 그냥 그렇게 살아가겠다는 것은 고집이며 교만이며 어리석음이며 자기 편견이며 착각이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이 자신의 형편과 처지와 입장을 따라서 신을 벗기를 원하신다.

고대의 중동 사람들에게 있어서 발의 신이란 자신의 품성이며 외적인 활동 영역의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발에서 신을 벗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다. 먼지가 많은 저들의 환경에서 신고 있던 신발을 벗는 것은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요 죄악에 오염된 세상의 더럽고 땀 내나고 먼지투성이인 신을 벗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 앞에 노출시켜야만 하는 종교적인 부르심인 것이다.

우리가 병원에 가면 의사가 신을 벗고 진찰받는 침대에 올라가 들어 누워서 의사의 지시를 기다리게 한다. 상의를 거두어 올리고 배를 보이거나 가슴을 보이라고 말하면 그렇게 해야 한다. 엉덩이를 드러내고 주사를 주겠다고 하면 그렇게 해야 한다.

신을 벗는 행위는 지금 나 자신의 약함이나 형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순종해 나가는 행위의 시작이다. 신을 벗는다는 것은 과거의 나의 경험과 지식과 타성에 젖어 있던 그 모든 것들로부터 전혀 새로운 날들을 향하여 불러내시는 하나님의 초청에 응하는 행위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곧 이어서 그 다음 명령에 귀를 기울이도록 이끄신다. 지금 여전히 망설이고 주저하면서 시간을 끌고 벗지 못하는 내 인생의 신발은 무엇인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臨在)를 믿는 믿음.
일단 순종하고 신발을 벗었다면 장차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하실 일을 주목하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 일을 계획하시고 그 일을 성취하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나 자신이 아니다. 물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공부도 하고, 노력도 하고, 열심도 내고, 그 무엇인가에 도전하여 성취도 하며 살아간다. 그러는 중에 성공과 실패의 우여곡절을 다 골고루 경험하게 된다. 어린이가 자라나서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되고 세상을 산전수전 골고루 경험하면 나이를 먹어 가면서 노인도 된다. 예레미야 33장 2절에 보면 예레미야에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자기 자신에 대한 소개가 바로 그러하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어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기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그렇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가지신 전능자이시다. 여호와란 스스로 계신 분 즉 자존(自存)하시는 분이란 뜻이다. 역사 속에 섭리하시는 하나님이며 지금도 여전히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모세가 하나님 뵙기를 두려워 하던 그 하나님은 조상 대대로 살아계신 하나님이시오 각 개인과 역사 속에 간섭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모세의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며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다. 무슨 말인가.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은 과거에는 살아 계셨고 지금은 돌아가신 하나님 혹은 죽은 신이 아니시다.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요 전능하신 아버지이시다. 뿐만 아니라 모세를 만나 주시던 당시의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인간의 고난당하는 현장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 아버지는,

애굽에서 히브리인 들이 당하는 각종 고통을 보고
부르짖음을 듣고
근심을 알고
환난과 역경에서 건져 내고
광야 길을 매 순간 인도하시고
약속의 땅으로 이끌고 가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같은 하나님이 모세의 하나님이시며  오늘 날 나의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믿고 살라. 그것이 믿음이다.

사명(使命)과 파송(派送).
9절에 “이제 가라.”고 명령하신다. 노예의 애굽 현장에서 늘 부르짖어 기도하고 간구하던 히브리 백성들의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상달되고 하나님은 친히 하늘에서부터 그 노예 현장에 내려 오셔서 환난 속에 고생하며 살아가는 백성들의 고통을 직접 보셨다. 10절에서 그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보내는 분은 누구시며 고난과 고통의 노예 현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여 내시는 분은 누구신가. 물론 사람의 수고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의 시작과 과정과 끝은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2012년 2월호인 가이드 포스트에 네팔 선교사인 신경희 선교사의 간증이 실렸다. 그의 남편은 외과 의사인 의료 선교사이다. 친정어머니는 집안 이 곳 저 곳에 부적을 붙이며 살았고 불교를 믿었다. 그런 환경의 그녀가 이화여대 특수교육학과에 합격했다. 장애인들을 위해서 살고 싶었다. 1학년을 마치고 고향인 부산에 내려가 있는 동안에 겨우 내내 친구가 찾아 와서 교회 생활과 하나님 신앙을 권면했다. 처음에는 시큰둥하게 여겼고 신앙 토론으로 서로 열변을 토하기도 했다. 결국 친구의 정성으로 어머니를 속여 가면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당시에 교회 청년부에서 호주 출신의 세실리 모아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다. 선교사님이 건네준 매일 성경을 날마다 읽게 되었다. 처음 만난 선교사님의 인격적인 감화력에 앞에 그녀는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집에서 새벽 5시면 어머니는 아래층에서 염불을 하시고 자기는 난방이 안 되어 차디찬 이층 방에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개학을 하자 다시 서울에 올라온 그는 날마다 새벽이면 성경을 읽었다. 자연스럽게 성경 묵상이 시작되었고 교회 청년부 활동도 열심히 하게 되었다. 그 때부터 그는 신학과 신앙의 고민에 젖어 있었다. 그 '원죄‘라는 것이 잘 깨달아 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문제의 해답을 찾으려고 한 학기 내내 공부하면서 틈틈이 열심히 성경을 읽어 내려갔다. 밤을 세워가며 성경만 읽은 적도 여러 날 있었다. 복음에 대한 확신이 생기자 그녀는 학교 안에서 만나는 그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마음은 언제나 기뻤고 날아갈듯이 즐거웠다. 그런 그녀가 부산에 내려가 있는 동안에 교회 생활이 어머니와 불화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예수 믿는 딸이 못마땅하였던 것이다. 집안에 우환이 생기자 예수 믿는 딸 때문이라면서 딸의 따귀를 때린 적도 있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딸은 불교에 빠져 있는 어머니의 구원을 위해 더욱 더 열심히 기도했다. 졸업이 다가오자 부산의 청각 장애인 학교에 구화 교사로 교생 실습을 나갔다. 거기서 정식 교사도 되고 성경 공부 활동을 하던 반의 리더와 사귀게 되면서 그는 지금의 남편이 되었다. 병원 중환자실에 들어가신 어머니가 의식을 회복하신 후에 복음을 영접하고 병상에서이지만 세례를 받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후 의사 남편을 만나 행복한 나날을 지내며 이웃들을 불러 모아 성경공부도 하고 새벽 예배도 드리던 이들 부부에게 지중해 연안에 나가 선교사로 활동하던 친구가 방문했다. 그들 부부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국민 1%의 화려하고 축복된 생활이리며 도전장을 내었다. 그 후로 이들 부부의 마음에는 좀 더 보람 있는 삶이 없을까를 고민하게 되었고 부부 수련회에서 은혜를 받고 네팔 선교지로 떠나게 되었다. 1992년의 일이다. 가난하고 못 배우고 의료 혜택을 한 번도 받아 본 적인 없는 네팔 사람들에게 저들 부부는 천사와 같은 분들이었다. 세월이 지난 지금은 이미 몇해 전에 <나마스떼 닥터 양>이란 제목의 선교 간증집이 책으로 나와서 세상에 많이 알려 졌다. 저들의 책을 읽은 이들 중에 누군가는 의료용 버스도 사주어서 네팔 현지의 장애아들을 실어 나르는 데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힌두교 신앙을 주로 가진 네팔 사람들은 장애를 가진 자녀가 태어나면 전생에 벌을 받아서 그렇게 태어난 것이라고 여겨서 학대하고 방치하고 심지어는 쇠사슬에 묶어서 집안에 가두어 두기도 한다. 종이장처럼 말라 죽어 가는 저들을 찾아가서 설득하고 이끌어 내고 치료를 돕고 가르치고 사랑해주고 복음을 가르치고 섬기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고 했다. 

영원한 동행(同行).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언제 어디서나 택한 백성들의 삶의 중심에서 함께 늘 동행하시는 아버지이시다. 12절에 보면 하나님의 명령 앞에 당황해하며 자신 없어 하는 모세에게 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소개된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애굽의 그 악한 임금 바로에게 모세를 보낼 때에 모세만 보내고 그의 형 아론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반드시 함께 하시시라는 약속의 말씀을 해 주신 것이다.

오늘 날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지금 어떤 길을 가고 있는가. 지금 무슨 고민과 갈등과 아픔과 괴로움 가운데서 괴로워하고 있는가. 400년의 애굽 노예 현장에 찾아내려 오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 내시고 이끌어 내시는 것처럼 오늘 날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의 가정에 함께 하시고 범사에 함께 하시리라는 믿음을 가지라. 이는 부활 승천하시기 직전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한 명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과도 똑 같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아프리카에서 평생 선교한 영국의 리빙스턴 선교사가 본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이미 사자에 물려 한족 팔이 떨어져 나간 상태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 긴간 세월 동안 어떻게 위험과 고난을 이길 수 있었는가 묻는 질문 앞에 답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와 같은 주님의 말씀이 그에게 매 순간 힘이 되었노라고 했다. 그런 승리의 앞날 되길 소망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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