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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복 있는 사람(시1:1-6) 2025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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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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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5-02-16 19:58 조회 546 댓글 0
 

                          복 있는 사람(시1:1-6)              2025. 2. 16

 

 

시편 1편은 ‘의인과 악인’, ‘의인과 죄인’, ‘의인과 오만한 자’란 대비를 통해서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인생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교훈한다. ‘복있는 사람’이란 ‘아쉬레이 하이쉬’(אַ֥שְֽׁרֵי־ הָאִ֗ישׁ)는 ‘축복들이 그 사람에게 있다’라는 뜻이다. 복수로 되어 있는 ‘복들’을 의미하는 ‘아쉬레이’는 ‘똑바른 길로 나아가다’라는 ‘아샤르’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복수 명사이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상대적인 기준을 가지고 서로의 복을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인간에게 허락하신 복의 기준은 한결같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다. 남자와 여자를 지으신 후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축복의 명령을 주시기 이전에 이미 복을 주시며 그런 말씀을 하셨다. 그렇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고 이 땅에 태어난 이미 복된 존재이다. 복을 부여 받은 존재이다. 서로의 능력, 여건, 환경, 재주, 재능, 됨됨이, 외모, 신체 조건 등이 다를 뿐이지 나를 지으신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각 사람에게 필요를 따라서 이미 덧입혀 주신 복이 있다는 말씀이다. 물론 탄생의 순간부터 중증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든지 살아가다가 엄청난 상해를 입었다든지 극복하기 쉽지 않은 불행한 사고나 사건으로 인해서 자신이나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참담한 슬픔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이웃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돌아와서 보면 ‘복있는 사람은’이렇게 시작하는 말씀을 통해서 과연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복된 인생의 길이란 어떠하여야 하는가를 교훈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게 된다.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의 본래의 모습은 복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죄가 들어 와서 인간을 타락시켰다. 타락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의 상태를 말한다. 1절에서 말씀하는 ‘악인’이란 “삶의 태도가 그릇된 자이며 규정된 법에 저촉되는 범법 행위를 한자”를 의미한다. 또한 ‘죄인’이란 “목표물에서 벗어난 자, 길을 잘못 들어서서 엇길로 빠진 자, 삶의 목표나 방법이 그릇된 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오만한 자’란 “조롱하는 자, 비웃는 자”를 뜻한다. 즉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을 비웃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이웃을 훼방하는 자”를 말한다. 1절에서 언급된 3가지의 동사를 보라. “따르다, 서다, 앉다”라는 동사에는 점진성이 있다. 삶의 목표와 태도와 방법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죄와 악을 따라가다 보면 죄악된 무리와 함께 같은 길에 서고 같은 자리에 둘러 앉게 되고 만다. 죄악의 점진성과 심각성을 경고하는 말씀이다. 그렇지 않나. 한 두잔의 술로 인해서 알콜 중독자가 되는 경우가 있나. 아니다. 처음에는 내가 술을 마시지만 계속 술을 마셔 대다가 보면 술이 술을 마시게 되고 나중에는 술이 나의 인생을 마셔 버린다. 결국은 술로 인해서 그의 인생을 망치고 만다. 

 

복이란 단어의 뜻이 “똑 바른 길로 나아가다”라고 하였다. 그렇다. 나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축복하시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똑 바로 바른 길을 가는데 복있는 사람으로 살아가지 못할 자가 있겠는가. 그 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의 길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길이다. 출애굽기 20장 6절에 보면,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라고 하였다. 우리가 <예수 따라가며> 라는 449장 찬송가를 찬송하지 않나 “예수 따라 가며 복음 순종하면 우리 행할 길 환하겠네 주를 의지하며 순종하는 자를 주가 늘 함께 하시리라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

 

실로 인간이 하나님 안에서 참된 복을 누리고 평화를 누리려면 나 스스로의 노력이나 발버둥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기대 가운데서 살아갈 때에 그런 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 아버지께 속하여 있을 때에 마치도 포도나무 비유의 교훈처럼 주 안에서 그런 행복과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 가지고 타국에 가서 주색잡기를 즐기며 허랑방탕하게 살던 둘째 아들의 비유가 무엇인가. 받은 유산이 다 떨어졌다. 남의 나라에서 거지가 되고 말았다. 돼지 우리에 눕는 신세가 되었다. 용기를 내어서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 왔다. 아버지가 둘째 아들을 반겼다. 아버지의 아들의 지위를 회복한 것이다. 아버지의 집에 있을 때에 복이 있는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의 식탁에 앉을 때에 복 있는 자가 되는 것이다. 회복된 삶이란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이제 옵니다 나 죄의 길에 시달려 주여 옵니다. 나 이제 왔으니 내 집을 찾아 주여 나를 받으사 맞아 주소서”<나 주를 멀리 떠났다>라는 273장 찬송가의 가사 그대로이다. 

 

시편 1편에는 ‘악인’이란 표현이 네 번이나 반복된다. 악인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죄를 짓는 자를 일컫는 말이다. 즉, 악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살지 않는다. 악인은 자기 자신의 생각과 의지와 판단과 결정과 욕망을 따라서 살아간다. 악인에게는 꾀가 있다. 그러므로 복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해야 한다. 그것이 복된 자의 길이다. 

 

또 하나, 죄인의 길에 서지 말아야 한다. ‘죄인이란 길을 잘못 들어서서 엇길로 빠진 자’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죄인의 길에 들어서면 점점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길에서 멀어져 가게 되고 만다. 

 

남미, 엘살바도르의 나이브 부켈레(Nayib A. Bukele, 1981-) 대통령은 2022년에 갱단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전국의 갱단을 체포해서 감옥에 가두기 시작했다. 2019년, 38살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지난 해 6월 1일에 85%의 지지를 받고 재선되었다. 재임 중의 지지율은 96%라고 한다. 부켈레 대통령의 강력한 통치력에 의해서 갱단 7만 2천여명이 체포되었다. 여의도 절반 만한 면적에 4만 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교도소 건물 8동을 지었다. 11미터 높이의 담장을 두르고 고압 전기가 흐르는 울타리를 설치하였다. 한 방에 75명을 가두었다. 화장실을 두 개 뿐이다. 3층 구조의 철판 침상에서 잠을 잔다. 메트리스도 없다. 생각해 보라. 저들이 태어날 때부터 갱단이었나. 아니다. 악인들의 꾀를 따르고, 죄인들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함께 앉다 보니 그렇게 되고 만 것이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라고 하였다. 

 

지금의 그런 상태, 그런 환경에서 벗어나서 새 사람이 되고 복있는 사람이 되는 길은 그리 쉬운 길이 아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태어나서부터,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여야 한다. 그래야만 복있는 사람으로서의 삶을 누리며 살 수 있는 법이다. 

 

어린 자녀를 안고 엎고 교회에 다니고 예배에 참석하는 일을 귀한 일이다. 그러나 중간에 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세상으로 빼앗겨서는 안 된다. 주님의 손에 꼭 붙잡혀서 살아가게 해야 한다. 주님의 손을 꼭 붙잡고 살아가도록 해야 한다. 그러려면 은혜를 알아야 한다. 은혜를 구해야 한다. 예수를 만나야 한다. 하나님을 체험해야 한다. 악을 멀리하고 죄를 두려워 해야 한다. 악인을 가까이 하지 말고 죄인의 무리에 섞이지 말아야 한다. 그 생각이 올바르고 그 마음가짐이 올곧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겨 묵상하는 사람.

1절이 복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방어적이고 소극적인 모습이라면 2절은 복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모습이다. 복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자발적인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늘 묵상하는 길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다. 아무리 좋은 것도 내가 취하지 않으면 내 것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지 않나. 소나 말을 물가로 이끌고 갈 수는 있다. 그러나 맑은 물을 마시는 것은 소나 말이 스스로 해야 할 자신의 몫이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즐거워하는 생활이어야 한다. 2절에서 말씀하는 ‘여호와의 율법’이란 모세 오경을 말하기도 하지만 성경 66권의 모든 말씀을 일컫는 것이다. ‘즐거워 한다’는 ‘하페츠’(חָפֵץ)는 “간절히 바라고 원하며 마음이 온통 한 곳에 쏠려 있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열정을 뜻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호수아 1장은 모세의 죽은 사실부터 기록한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하나님은 모세의 수종자 여호수아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여호수아에게 백성을 이끌고 광야에서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에 들어갈 것을 명령하셨다. “강하고 담대하라”라고 하셨다.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라”라고 하셨다.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셨다. “내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라”라고 하셨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 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1:8)라고 하셨다. 

 

시편 112편 1절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다. 시편 119편 16절서는, “주의 율례들을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하였다. 시편 119편 35절에는, “나로 하여금 주의 계명들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라고 하였다.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라고 하였다. “요즘처럼 바쁜 세상에 어떻게 밤낮으로 주의 말씀을 묵상하며 살라”라는 말인가. 이렇게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밤낮 없이 성경책만 붙들고 살라는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고 생활 속에 실천하며 살아가라는 초청인 것이다. 

 

 

나중이 점점 형통한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살아가면 하나님이 그 인생의 나중을 점점 복되게 해 주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생활 속에 실천하며 살아가면 하나님이 그 인생의 나날이 점점 형통하게 해 주신다. 

 

인생이란 것이 내가 발버둥 치고 내가 열심히 노력하고 내가 수고한다고 해서 다 잘되는 것이 아니다. 열심보다 중요한 것이 태도이다. 방향성이다. 방향이 잘못된 열심은 더 위험한 것이다. 삶의 목표가 잘못된 상태에서 열심을 갖는 것은 화를 부르고 불행을 자초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바쁠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분주할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할 줄 알아야 한다. 왜 그럴까.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말씀 묵상하기를 꾸준히 하다가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범사를 다스리고 이끌게 마련이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운동력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4:12)라고 하였다. 

 

역사를 돌아 보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했는데 잘못된 인생이 있는가. 한 사람도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려고 한 이들은 어느 시대, 어느 민족이나 다 존귀하게 쓰셨다. 

 

덴마크를 절망의 나라에서 오늘 날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덴마크로 바꾼 애국자가 있다. 니콜라스 그룬트비(Nikolaj Grundtvig, 1783-1872)이다. 그는 덴마크의 신학자, 루터교 목사, 시인, 찬송가 작사자, 민족운동가, 역사가, 민속학자, 정치인, 저술가, 교육학자, 철학자, 법학자, 교육인이다. 그룬트비는 “국민 의식이 개혁돼야 잘 사는 나라가 될 수 있다”라는 믿음을 갖고 덴마크 역사상 최초의 "성인 기숙 학교”설립을 주장했다. 이것이 국민 고등학교다. 국민 고등학교는 덴마크 전역으로 확산돼 덴마크 국민의 의식을 크게 변화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국민 고등학교를 마친 사람들의 삶을 목격한 덴마크 국민 사이에 “우리도 할 수 있다”(We can do it too) 라는 희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룬트비가 내세운 삼애 정신(三愛 精神) 은 곧 덴마크 국민의 구호가 됐다. 

 

하나님을 사랑하자 

이웃을 사랑하자

땅을 사랑하자

Love the God

Love Your Neighbor

Love the Earth

 

그 정신은 지금도 덴마크 사람들의 마음 저변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애국 정신이다. 강화도 시골 중학교였던 감리교 사립학교인 동광중학교 교훈이 이것이었다. 

 

​안데르센(Andersen)이 쓴 동화 <성냥팔이 소녀>처럼 덴마크는 돈 몇 푼 벌기 위해 성냥이며 양초를 팔고 다니던 소년 소녀들이 길거리에 넘쳐났던 지지리도 가난한 나라였다. 좌절에 빠진 젊은이들이 술독에 빠져 살고 하루 하루 쓰레기통을 뒤지던 절망의 땅이 19세기의 덴마크였다.

 

​그랬던 덴마크는 오늘날 유엔 산하 자문 기구인 지속 가능 발전 해법 네트 워크(SDSN)가 산정한 국가별 행복지수(World Happiness Report)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나라가 되었다. 그 한 사람 니콜라스 그룬트비 (Nikolaj Grundtvig) 목사의 애국심(Patriotism)이 민족정신이 되었을 때 부강한 나라가 된 것이다. 

 

우리나라로 하면 가나안 농군학교의 김용기 장로가 그러하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그러하다. 도산 안창호(安昌浩, 1878-1938)는,

 

"오렌지 한 개를 따더라도 정성껏 따라. 그것이 나라를 위하는 일이다.”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네가 하는 일을 정성껏 하라.”

 

“각자 맡은 바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애국이며, 애족이다. 

진정한 애국심은 그 말보다 그 실천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러면 먼저 그대가 건전한 인격이 되라.

우리 중에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는 까닭이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 자신이 왜 인물이 될 공부를 아니하는가”

 

그 외에도 수 많은 명언을 남겼다. 그는 평안도에서 서울에 와서 17살 때에 경신학교에 다녔다. 1895년에 설립된 경신학교의 그 당시의 이름은 구세학당(救世學堂)이었다. 언더우드가 세운 학교이다. 거기서 서양 학문에 눈을 떴다. 성경과 영어를 배웠다. 호레스 언더우드 선교사가 세운 새문안 교회에 다녔다. 7년 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5년 후에 귀국해서 애국계몽운동을 펼쳤다.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웠다. 나중 일제 시대 초기에 미국에 건너가서 독립운동을 펼치며 흥사단을 조직하였다. 

 

나중에 수양 동우회 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검사와의 일문 일답이 역사에 전해 오고 있다.

 

검사: "너는 독립운동을 계속할 생각이냐”

안창호: "그렇다. 나는 밥을 먹는 것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먹었고, 잠을 자는 것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잤다. 이것은 나의 몸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검사: "너는 조선의 독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

안창호: "대한의 독립은 반드시 된다고 믿는다”

검사: "무엇으로 그것을 믿느냐”

안창호: "대한 민족 전체가 대한의 독립을 믿으니 대한이 독립할 것이요, 세계의 공의가 대한의 독립을 원하니 대한이 독립할 것이요, 하늘이 대한의 독립을 명하니 대한은 반드시 독립할 것이다.”

검사: "너는 일본의 실력을 모르느냐”

안창호: "나는 일본의 실력을 잘 안다. 지금 아시아에서 가장 강한 무력을 지닌 나라다. 나는 일본이 무력만한 도덕력을 겸하여 가지기를 동양인의 명예를 위하여서 원한다. 나는 진정으로 일본이 망하기를 원치 않고 좋은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이웃 나라를 유린하는 것은 결코 일본의 이익이 아니 될 것이다. 원한 품은 2천만을 억지로 국민 중에 포함하는 것보다 우정 있는 2천만을 이웃 국민으로 두는 것이 일본의 복일 것이다. 그러므로 대한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동양의 평화와 일본의 복리까지도 위하는 것이다.”

 

상해 임시 정부에서 활동하던 그는 1932년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국내에 압송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의 옥살이하였다. 5년 후에 풀려 났으나 수양 동우회 사건으로 재수감되었다. 나중에는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서 점점 허약해졌다. 윤치호가 앞장서서 계속하여 석방을 탄원하였다. 도산 안창호는 58살에 병보석으로 풀러 나서 경성제국대학 부속 병원에 입원했다. 엄청년 병원비를 윤치오, 김성수가 책임졌다. 그러나 결국은 다음 해인 1938년 3월 10일, 59살에 페렴과 간경화로 눈을 감고 말았다. 

 

누가 과연 복 있는 사람인가.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주변의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하나님 앞으로 초청하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인생으로 초청할 때에 각 사람은 마치도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철을 따라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그 잎사귀도 마르지 아니하게 될 것이다. 그 하는 모든 일이 점점 형통하게 될 것이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亨通)하게 될 것이다.”(whatever he does prospers) ‘prosper’ 라는 영어 단어의 뜻은 “번영하다 발전하다 성공하다”이다. <현대인의 성경>에 보니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과실을 맺고 그 잎이 마르지 않는 것처럼 하는 일마다 다 잘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무엇이 형통인가. 무엇이 잘 되는 길인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번영하는 길인가. 시편 1편의 절반인 4, 5, 6절은 악인의 나중에 대하여“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 악인들의 길은 망한다”라고 경고한다. 어른이나 어린이나 노인이나 젊은이나 그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 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리할 때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답게 선한 영향력을 주변에 미치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 다 각 사람이 내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세상을 일깨워 나가는 계몽(啓蒙)의 주인공들이 될 수 있기를 소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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