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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예수의 분부(요20:19-23) 20240331 부활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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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4-03-31 23:07 조회 257 댓글 0
 

                 부활하신 예수의 분부(요20:19-23)           2024. 3. 31 부활주일

 

 

 

예수가 골고다로 끌려가자 11제자들은 모두 흩어졌다. 한 자리에 모여 문을 닫아 걸고 숨어 있었다. 저들은 두려움과 불안 가운데 갇혀 있었다. 그런 저들에게 예수의 부활 소식을 전한 자들이 있었다.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몇몇 여인들이 예수의 빈 무덤을 보고 가서 전한 것이다. 예수의 빈 무덤을 현장에 달려가서 목격한 베드로와 요한 조차도 다시 다른 제자들과 함께 문을 닫아 걸고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 날 저녁에 예수는 저들 11제자들을 찾아 가셨다. 19절의 ‘저녁 때에’라는 시간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날 오후에 글로바와 또 다른 한 제자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엠마오까지 함께 걸으셨다. 그리고 엠마오에 도착하여 어느 가정에 차려진 저녁 식탁에서 음식을 앞에 두고 감사 기도 하신 후에 저들 곁을 떠나셨다. 그리고 찾아 가신 곳이 11제자가 숨어 있는 그 곳이었다. 저녁 때였다.“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라고 했다. 제자들이 두려워 한 대상은 산헤드린 공회원들이었다. 저들은 그 당시에 그 누구든지 유대 사회에서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있으면 출교를 결정하던 때였다. 출교란 오늘 날로 하면 공민권을 박탈하는 것이다. 공민권이 박탈되고 나면 유대의 율법이 정하는 그 어떠한 보호도 받을 수 없는 배교자가 되고 만다. 그걸 두려워 한 것이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태어날 때부터 앞 못 보던 이를 예수께서 고쳐 주신 적이 있다.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서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라고 하셨다. 말씀대로 순종했는데 두 눈을 뜨고 보게 되었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다. 이 소문을 들은 바리새인들이 격하게 반응하였다. 왜 안식일에 그런 기적을 행하였느냐는 것이다. 이 일로 분쟁이 일어났다. 바리새인들은 “네 눈을 뜨게 한 자가 누구냐”라고 물었다. “선지자니이다.”라고 대답했다. 바리새인들은 그의 부모를 불러서 물었다. “누가 네 아들의 눈을 뜨게 하였느냐”그러나 그의 부모는 분명하게 대답하질 못했다. “아들이 장성했으니 직접 본인에게 물어 보라”라고 대답하는 정도였다. 요한복음 9장 22절에 보면,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라는 말씀이 나온다.

지금 문을 닫아 걸고 두려워하는 11제자들의 두려움의 원인이 그런 것이다. 십자가에 처형당해 죽은 예수로 인해서 자기들에게도 불이익이 올까 봐 두려워 해서 숨어 지낸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 곳에 찾아 가셨다. 그리고 11제자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부활 주일 예배 시간에 예수께서 하신 그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평강(平康)이 있을지어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불안과 두려움의 연속이다. 질병과 사고와 사건과 죽음의 두려움과 불안과 슬픔이 끊임이 없다. 우리는 하루 하루 순간 순간 이 세상의 복잡다단한 우여곡절 속에서 살아간다. 부활절을 맞았지만 지구 저편에서는 전쟁이 끊임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숨어 있던 11제자를 찾아가셔서“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인사하셨다. 평소에 늘 하시던 인사이지만 이 날은 달랐다. 이 때는 달랐다.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여 초조하게 문을 닫아 걸고 한 곳에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찾아가신 예수께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문안하신 것이다. 평소대로 “샬롬”(שלום)하고 인사하신 것이다. ‘샬롬’이란 인사는 영 혼 육과 사회적인 모든 관계의 통전적인 온전의 상태를 일컫는 인사말이다. 이는 사람과 하나님,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모든 관계와 여건에서 주어지는 온전한 평화의 상태를 문안하는 인사법이다. 

 

닫힌 문과 폐쇄된 공간 안에 문을 통과하지 않고 예수께서 그 곳에 찾아 가셨다는 것이 부활하신 예수의 부활체에 대한 입증이다. 이것이 부활의 신비이다. 예수의 부활체(復活體)는 그 어떤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영체(靈體)이셨다. 이 장면을 곡해 하는 이들은 예수의 부활을 ‘환영설’로 주장한다. 이는 예수의 부활을 실체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환상으로 잘 못 본 것이라는 주장이다. 

 

예수께서는 부활 하신 그 날 저녁에 11제자를 만나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문안하셨다. 누가복음 24장 37절에 보면,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라고 하였다. 제자들조차도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본 후에 놀라워 하고 무서워하면서 자신들의 눈 앞에 나타나신 예수를 ‘영’(靈)으로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다 두려움과 불안 가운데 갇혀서 살아간다. 이것은 에덴 동산에서 타락한 아담과 하와 이후 인간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불순종으로 타락한 후에 평강을 잃어 버렸다. 두려움과 불안에 갇혀 지내게 되었다. 그러하다 보니 심지어는 평안할 때 조차도 ‘ 이 평안이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는 불안과 두려움이 인간의 평안을 금가게 하고 깨트리고 있다. 그래서 성 어거스틴은 “인간이 주님의 품에 안기기 전에는 진정한 평안을 얻을 수 없다”라고 고백하였다.

 

생각하여 보라.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평강이란,

 

첫째, 죄 사함을 받은 자가 누리는 평강이다.

아담과 하와 이후로 죄 범한 인간을 결박하고 있는 것은 지은 죄로 인한 두려움이다. 그러나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죄에서 자유함을 받은 기쁨과 감사와 소망과 평강이 마음 속에 가득하게 된다.

 

둘째, 두려움을 극복하는 평강이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각기 형편이 다를 뿐 누구나 다 두려움에 갇혀 지낸다. 질병에 대한 두려움, 사고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자신이 지은 죄가 세상에 알려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등에 갇혀 지낸다. 믿음은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다. 부활 신앙의 열매는 두려움을 이기는 것이다. 두려움으로부터 떠나 평강과 안녕과 평화와 위로와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 날의 한 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라고 <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라는 370장 찬송 2절에서 찬송하지 않나.

 

셋째, 빼앗기지 않는 평강이다.

성도가 누리는 평강은 절대로 빼앗기지 않는 평강이다. 빼앗길 수 없는 평강이다. 로마서 8장 35절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라고 하였다. 로마서 8장 39절에 보면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라고 하였다. 그렇다. 성도가 누리는 평강은 빼앗기지 않는 평강이다. 빼앗기지 않는 사랑이다. 끊어지지 않는 사랑이요 끊어지지 않는 평강이다.

 

예수께서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말씀하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런 평강을 누리며 증거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샬롬’으로 문안 인사를 시작하신 예수께서는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다. 손목의 못 자국, 옆구리의 창 자국을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를 보고 기뻐하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두려움 가운데 있던 제자들에게 기쁨이 찾아 왔다. 예수께서는 다시 한 번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재차 문안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라고 사명을 말씀하셨다. 

 

신앙 생활은 사명을 수행하는 생활이다. 우리는 12제자를 사도(使徒)라고 한다. 사도(使徒) 즉 ‘아포스톨로스’(ἀπόστολος)란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12제자 만이 사도가 아니다. 예수의 복음을 깨달은 이 땅의 모든 믿음의 형제 자매들은 한 사람 한 사람 누구나 다 보냄을 받은 자의 사명을 준행하여야만 한다. 

 

요한 사도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분이란 사실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요3:34)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요5:36)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요7:28-29)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요13:20)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요17:8)

 

우리는 이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것처럼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나 다 보내심을 받은 사명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점 말이다. 

 

사엘리스 해머드 샤프(Alice Hammond Sharp, 史愛理施, 1871-1972)선교사는 캐나다 출신의 선교사다.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 교역자로 일하다가 1903년 31살 나이에 한국으로 선교하러 왔다. 그녀는 한국 이름인 사애리시(史愛理施)란‘역사적으로 예수의 사랑과 이치를 베풀자’라는 뜻이다.

 

천안과 공주, 강경, 연산, 은진, 노성을 순회하면서 영아 육아원과 학교(공주 영명여학교)를 세워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유관순, 이순길)에 그 씨앗을 뿌렸다. 그녀는 공주에 복음을 전한 스크랜톤, 스웨러, 맥길 선교사의 뒤를 이어서 공주 선교사역을 감당하였다.

 

과거 조선말 시대는 한양과 공주가 대도시에 속했다. 그는 메리 스크랜턴 부인과 평일에는 이화학당 교사와 순회전도자로 주일에는 상동교회 주일학교 교사로 사역했다. 1903년 정동제일교회와 배재학교에서 사역 중이던 남편 로버트 아서 샤프 선교사(Robert Arthur Sharp, 1872~1906)를 만나 결혼한 후 1904년부터 충남 공주에 머물면서 최초의 서양식 벽돌 양옥집을 짓고 살며 선교를 시작하였다.

 

엘리스 샤프 부인은 허조셉 전도 부인을 교사로 하여 두 명의 학생을 데리고 명선여학당(영명여학교)설립하게 된다. 남편 샤프 선교사가 발진티푸스 감염으로 사망하자 1906년 우리암(W. E. C. Williams)선교사가 뒤를 이어 공주로 와서 영명고등학교 전신인 영명학교를 설립하며 인재를 양성하였다. 

 

엘리스 샤프 선교사는 유관순 열사를 수양딸로 삼고 영명학교에 입학시켰다.  유관순이 3.1운동의 중심인물로 자리 잡게 도왔다. 사애리시 선교사는 우리가 잘 아는 독립 운동가 유관순, 이순애, 인덕 대학교의 설립자 박인덕, 중앙대학교의 설립자인 임영신 총장, 한국 최초의 여성 경찰서장 노마리아, 한국 최초의 여성 목사 전밀라, 한국간호학교의 설립자 박한나 등 어려운 가정의 소녀들을 교육하였다. 엘리스 샤프 선교사는 논산 읍내에 1909년 영화 여학교와 진광남학교를 설립하여 복음을 전했고, 그 후 1928년에는 예배당을 세웠다. 강경과 연산, 은진, 노성 지방을 순회하면서 사회복지 활동가로 20곳의 학교와 7곳의 유치원을 설립하였다. 그녀는 복음을 전하다가 중일 전쟁, 태평양 전쟁 때에 일제가 1939년 그녀를 강제 추방하여 미국에 돌아가게 되었다. 사애래시 선교사는 캘리포니아 파사데나 은퇴 선교사 요양원에서 지내며 103년을 장수하다가 주님의 품에 안겼다. 

 

엘리스 샤프 선교사는 유관순을 양녀로 삼고 이화여학당에 유학을 시키면서 복음 전도자로서 키웠고 그 외에도 이순길 같은 독립운동가를 키워냈다. <유관순, 일제 통치에 저항한 독립운동가>라는 책에 보면, 뉴욕타임즈 신문에 실린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유관순이 1020년 3월에 남긴 말 중에,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으깨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다”

 

라는 기록이 있다. 엘리스 샤프 선교사의 양녀 유관순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예수 사건을 알리는 3.1 운동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다음 주일에 우리 교회가 그 동안 후원하고 중보기도 해 온 선교지의 선교사 9가정이 예배에 참석하게 된다. 저들은 모두가 다 보냄을 받은 사도의 명령의 준행하는 삶을 살아 온 이들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19-20)

 

 

성령(聖靈)을 받고 서로의 죄(罪)를 용서(容恕)하라. 

우리가 아는대로 11제자를 비롯하여 충원된 제자 맛디아와 120여 성도가 성령을 받은 것은 예수께서 승천하신지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날 저녁에 11제자에게 “성령을 받으라”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장차 임하게 될 성령 임재의 보증이며 약속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지난 이천년 교회로 교회되게 하는 힘은 성령의 임재였다. 예수의 부활과 성령의 강림이 교회 탄생의 바탕이었다. 그렇지 않나. 만약 예수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이 땅에 교회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의 부활을 부정하고 예수의 부활 복음 전파자들을 박해하던 사울이 다메섹 성 앞에서 변화되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는 예수의 음성과 강한 빛 앞에서 사울은 눈이 어두워지고 땅에 엎드러졌다. 삼일 후에 새 사람이 되었다. 변화된 사도 바울의 부활 증언은 13편분량의 신약 성경의 기록자가 되게 하였다. 순교자의 길을 마다하지 않게 하였다.

 

부활 이후 예수께서는 40일간 이 땅에 머물러 계시며 수 많은 이들을 만나셨다. 그리고 승천하셨다. 때가 되면 재림주로 다시 오실 것이다. 이 땅에서 살아가며 생명 있는 동안에 성령 충만을 받고 부활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는 부활 복음의 증인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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