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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광채(고후4:3-6) 2024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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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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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4-02-12 22:42 조회 554 댓글 0
 

                         복음의 광채(고후4:3-6)              2024. 2. 11

 

 

오늘은 예수께서 변화산에서 변화되신 것을 기념하는 변화 주일이다. 마태복음 17장을 비롯해서 마가, 누가 복음에 골고루 기록된 장면이다. 하루는 예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와 요한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변형되셨다.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났다.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말씀하셨다.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제자들은 두려워 심히 떨었다. 예수께서는 “일어나라 두려워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 땅에 와서 계시던 예수의 생애에 가장 영광스럽고 빛나는 변형의 모습을 세 제자가 목격한 순간이었다. 

 

그날 베드로는 그 곳에 초막 셋을 짓고 싶어 했다. 산에서 내려 올 때에 예수는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에 대하여 다시금 말씀하셨다.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의 상태는 흑암과 혼돈과 공허였다. 하나님은 세상 창조 첫째 날에 빛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곧 빛이시다. “말씀이신 하나님은 곧 생명이시고 그 생명은 곧 사람들의 빛이다”라는 선포가 요한복음의 시작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 

말씀이신 그 분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 

이 생명은 곧 사람들의 빛이었다.

이 빛이 어둠에 비치었지만 어둠이 깨닫지 못하였다.(요1:1-5)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를 일컫는 말이다. 예수의 탄생과 삶과 고난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 그 모든 과정 속에 담긴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한 뜻을 깨달아 알고 믿고 전하며 살아가는 것이 복음의 삶이다. 복음에는 광채가 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의 어둠을 이기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예수의 성화에 보면 거의 모든 성화들이 예수의 얼굴에서 비치어지는 광채를 묘사한다. 왜일까. 예수 자체가 광채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광채란 해와 달과 별들의 광채를 다 합한 것보다 더 밝은 광채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이 땅의 어둠을 이기는 빛으로 오셨다. 예수를 만나는 이들마다 빛나는 인생으로 변화하였다. 각색 병자들이 그러하고 귀신 들렸던 이들이 그러하였다. 생각하여 보라. 귀신 들려 물과 불 가운데 쓰러지고 무던 사이에서 지내며 쇠고랑이라도 끊던 심각한 상태의 인생이 귀신의 압제에서 풀려났다. 새 삶을 살게 되었다. 동굴과 같은 어둠에서 광명한 빛으로 그 삶이 변한 것 아닌가. 베데스다 못가의 병자가 얼어나 걷게 되었다.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함을 받은 순간이 아닌가. 12해 혈루병 여인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며 예수의 옷자락을 잡았는데 그의 병이 나았다. 어둠에 갇혀 있던 12년 세월을 뒤로 하고 빛이 임하는 복된 순간이 아닌가. 빛이신 예수를 만나니 앞을 못 보던 이가 보게 되었다. 못 듣고 말 못하던 이들이 듣기도 하고 말하게 되었다. 나면서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던 성전 미문 앞의 40살 쯤 된 앉은뱅이 거지가 걷고 뛰게 되었다. 이처럼 예수 만나면 그 인생이 어둠에서 빛으로, 흑암에서 광명으로 바뀌게 된다.

 

예수는 모든 광채의 본질이시다. 예수는 창조의 본질이며 우주삼라만상을 보존하고 지탱하고 유지하고 영원으로 이끄시는 광채의 본질이시다. 예수는 치료의 광채, 회복의 광채, 위로의 광채, 격려의 광채, 능력의 광채, 새로운 힘의 광채, 생명의 광채이시다. 오늘, <복음의 광채>라는 제목의 말씀 묵상에 은혜가 임하길 바란다.

 

그리스도의 영광.

복음의 빛은 가리워 질 수 없는 것이다. 만약에 복음의 그 빛이 누군가에게 가리워졌다면 그것은 복음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을 대하는 그 사람의 문제이다. 3절 말씀이 그런 내용을 담고 있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라고 하였다. 그렇다. 진리는 빛과 같아서 가릴 수가 없는 법이다. 진리의 발견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예수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라고 교훈하셨다. 

 

인류는 아주 오랫동안 지구가 원형인 것을 몰랐다. 즉 구형(球形)인 것을 몰랐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 C. 384-322)는 주전 4세기 때의 사상가요 철학자요 과학자였다. 그의 영향은 물리학, 정치학, 윤리학, 수사학 분야에 다양하게 뿌리내려 왔다. 그는 삼단논법에 근거한 형식 논리학과 과학철학의 대가였다. 플라톤과 쌍벽을 이루는 그의 철학과 과학 사상은 주후 17세기 이후까지도 무려 2천년이 넘도록 서양 철학의 근거가 되었다. 

 

그는 이미 주전 3세기에 지구의 모양에 관심을 가졌다. 지구의 위도에 따라 그림자의 길이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림자의 길이가 변하는 원리로 지구의 둘레를 계산해 냈다. 지구의 자전축이 0.45도 오차범위라는 것 등을 계산해 낼 정도였다. 그는 먼바다에 나갔던 배가 되돌아 올 때에는 뱃 머리인 돛대부터 조금씩 보이는 이유를 예로 들어서 지구가 둥굴다 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높은 산에 올라가서 보면 먼바다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배를 더 먼저 발견할 수 있는 이유 등을 예로 들어서 지구 구형설을 주장하였다. 또 달을 가리는 지구의 그림자에 의해서 달의 모양이 날마다 바뀌는 이유를 들어서 지구 구형설을 설명하려고 하였다. 동쪽으로 갈수록 해가 뜨는 시간이 빨라지는 것을 깨달은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였다. 남반구나 북반구의 별자리 모양이 다른 것도 그런 유를 밝히는 근거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지구가 어떤 모양으로 생겼는지를 오늘날처럼 명확하게 입증하기 까지 에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려야 했다.

 

이처럼 진리의 발견, 복음의 깨달음이란 것은 가히 놀라운 은혜요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고린도후서 4장 2절의 ‘진리’(眞理), 4장 3절의 ‘복음’(福音)이란 것이 그런 것이다. 오늘 날 우리 각 사람이 이 복음의 진리를 깨달아 믿고 살면서 예배자로 살고 이 진리의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는 것이 놀라운 은혜이다. 왜냐하면 21세기인 오늘날에도 복음을 거부하는 이들이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세상 사람들이 복음을 거북하는 이유를 4절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이 세상의 신’이란 ‘사탄, 마귀’를 일컫는 말이다. <현대인의 성경>에 보면 “이 세상의 신인 사탄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모습인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기쁜 소식의 빛을 볼 수가 없습니다.”라고 명쾌하게 번역해 놓았다. 그렇다. 이 세상 80억이 넘는 인류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한 부류는 성령을 인정하는 부류이고 다른 한 부류는 사탄의 지배 속에 있는 부류이다. 

이 땅에 그리스도의 영광이 복음의 광채로 비친 것을 처음으로 깨달은 이는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이다.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함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잉태한 것이다. 마리아는 베들레헴에서 아들 예수를 낳음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이 이 땅에 탄생한 것을 목격하였다. 남편될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아내가 될 마리아의 잉태 사실을 알고 관계를 정리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0-21)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예수의 잉태와 탄생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 위에 나타내시는 과정이라는 설명이다. 그렇다. 예수는 영광의 본체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영광이 이 세상 천하 만민에게 보이는 영광으로 드러난 것이다. 예수의 영광이란 곧 하나님의 영광이시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을 때의 사울은 하나님의 영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였다. 그러나 다메섹 체험 이후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증언하는 일을 사명으로 여겼다. 그 한길을 갔다. 이것이 진리를 발견한 자의 모습인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광채 즉 복음의 빛을 발견한 사람의 모습인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 복음의 광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깨달아 알고 나면 예수를 위해서 살고 예수를 전하는 일을 사명으로 삼게 마련이다.

 

<마귀들과 싸울지라>라는 348장 찬송가의 가사를 주목하여 보라. 그 후렴 가사가 무엇인가 “영광 영광 할렐루야(X3) 곧 승리하리라”그렇다. 우리는 고린도후서 4장 4절의 교훈처럼 사탄, 마귀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는” 그런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늘 예로 들지만 인간의 몸에 해로운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병이 든다. 죽기도 한다. 이처럼 사탄 마귀의 악한 궤계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라고 하였다.

 

자기 자신과 예수를 믿지 않는 주변 사람들을 비교해 보아라. 차이점이 무엇인가. 같은 집에 같이 살고 같은 음식을 함께 먹고 같은 이불 속에 누워도 다른 것은 다른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리스도의 영광의 임재 가운데 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는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무엇인가의 엄청난 인생의 간극(間隙)을 느끼게 된다. 그럼으로 영혼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복음을 담대하게 전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말했다. 우리는 우리는 전파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을 전파하는 것이다.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을 전파하는 것이라”라고 하였다. 그렇다. 사도 바울이나 그의 곁의 실라나 디모데나 디도나 바나바나 그 누구이든지 그리스도 예수를 전파하기 위하여 잠시동안 사람의 종 노릇을 하는 것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님이신 것을 전파하기 위해서 종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복음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것이다. 예수를 주님으로 믿고 따르며 섬기는 성도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만을 증거하고 전파하는 것이다. 

 

찬송가 80장, <천지에 있는 이름 중>의 가사의 고백을 주목해 보라.

 

“주 예수께서 영원히 어제나 오늘이나 

그 이름으로 우리게 참 복을 내리신다 

주 앞에 내가 엎드려 그 이름 찬송함은

 내 귀에 들린 말씀 중 귀하신 이름 예수”(4절)

 

그렇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이 그를 믿는 자들의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것을 전파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사상, 우리의 주장, 우리의 경험, 우리의 신념, 우리의 그 무엇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성도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님이신 것을 전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주도 한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4:5-6)라고 고백하였다. 맞다. 성도는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엡4:4)라는 깨달음 가운데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을 주님으로 믿고 전파하며 살아가는 자들이어야 한다. 

 

 

우리 마음에 비추신 빛.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다. 성령의 임재 가운데 살아간다. 주님께 늘 기도하며 살아간다. 예배를 드리며 살아간다.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파하며 살아간다”라는 것은 우리 각 사람의 마음에 비추어진 구원의 빛이 있기 때문이다. 6절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지난 날을 회상하듯 말하고 있다. 그렇지 않나. 그는 다메섹 체험 이전까지는 예수가 누구신지 몰라서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이들을 박해하였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1:13)라고 하였다. 그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라는 고백도 하였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4장 6절에서 인용하는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창1:3)라는 말씀은 창세기 1장의 천지 창조의 장면을 인용하는 말씀이다. 빛의 창조 이전의 이 세상의 상태란 “혼돈, 공허, 흑암”이었다. 하나님의 천지 창조의 시작은 빛의 창조로 부터이다. 그 빛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빛”이며 곧“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인 것이다. 

 

이 빛이 임한 인생은,

 

사방으로 육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는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는다.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않는다.

거꾸러트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다.(고후4:8-9)

 

그 이유는 “우리가 이 보배를 질 그릇에 가졌기 때문이다”(고후4:7), “예수의 생명”(고후4:10, 11, 12)이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1452-1519)은 38살 때인 1490년에 “최후의 만찬”을 그렸다. 이탈리아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에 소장되어 있다. 전해져 내려오는 일화에 그는 시장 거리를 지나다가 예수와 같은 온화한 표정의 행인을 화실로 초대해서 그를 주인공으로 예수상을 그렸다. 시간이 흐르고 가롯 유다를 그리려고 길거리에서 적합한 모델을 찾고 있었다. 그런 인상의 한 사람이 눈에 들어 왔다. 그를 화실에 초대해서 그를 보고 가롯 유다의 인상을 그렸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얼마 전의 예수상을 그렸던 모델의 그 주인공이 폐인이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인간은 다 부족하고 약한 존재다. 다만 그 복음의 광채가 나에게 비추이고 나의 삶을 사로잡고 나의 삶을 이끌어 갈 때에라야만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법이다. 나를 자랑하지 말라. 나를 드러내려 하지 말자. 섯다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였다. 매 순간 겸손하게 나의 삶을 은혜와 축복의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복음의 광채를 의지하며 살아가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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