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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자 바울의 권면(롬12:1-8) 2023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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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9-11 06:22 조회 941 댓글 0
 

                          전도자 바울의 권면(롬12:1-8)               2023. 9. 10

 

 

로마서 1-8장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구원의 원리”에 대한 강조를 담고 있다. 9-11장은 아브라함의 자손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지 못하면 구원 밖의 백성이 된다고 경고한다. 그 뿐만 아니라 이방인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주로 영접할 때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는 것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다. 돌 감람나무와 참 감람나무의 접붙임의 비유가 이 부분에 담겨 있다. 오늘 본문으로 읽은 로마서 12장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교훈한 내용이다. 15장까지 그러한 강조가 이어진다. 

 

내년 연회 때에 목사 안수를 받을 전도사 특강을 11월에 맡았다. <기독교 윤리학>이란 과목이다. 기독교인이라면 기독교인다운 윤리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언행일치(言行一致), 신행일치(信行一致)의 삶을 살아야 한다. 성경을 많이 읽고, 성경을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경의 말씀에 근거해서 살아야 한다. 가르치기는 잘 가르치는데 본인은 그렇게 살아가지 않는다면 비윤리적이다. 남들에게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지적질하면서 자신은 그런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면 이율배반적이다. 

 

가정의 자녀들은 말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보고 배운다고 하지 않나. 공원이나 박물관 매표소에서 입장료 1,000원을 아끼려고 아들딸의 나이를 한 살 어린 나이로 속여서 말하면 자녀들이 그런 것을 보고 배운단 말이다.

 

성도도 마찬가지다. 예수 믿는 엄마 아빠, 예수 믿는 집안 사람, 예수 믿는 교회 학교 선생님, 예수 믿는 회사의 사장님, 예수 믿는 거래처의 그 누구, 예수 믿는 주변의 직장 선후배와 직장 동료들의 영향에 의해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전해져 가는 것이다. 

 

바울은 구원의 길이 무엇이며, 죄 사함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 무엇인지를 이론적으로만 깨달아 알고 전하는 일에 집중한 전도자가 아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11:1)라고 편지하였다. 사도 바울이야 말로 자신의 삶을 그 누구에게든지 어항 속의 물고기와 같은 인생으로 드러내 보이며 살만한 정직하고 성실하고 복음적인 생을 산 주인공이다. 

 

그렇지 않나.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 성도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가. 성도가 교회의 안과 밖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에 대하여 교훈하신 말씀이 오늘의 본문이다.

 

너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

본문 1절과 2절에 보면 “몸”이란 표현과 “마음”이란 표현이 이어서 나온다. 몸이 무엇이고 마음이 무엇인가. 몸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육체, 육신인 것을 알겠다. 그러면 마음이란 무엇인가. “몸은 마음을 담고 있는 그릇이다.”마음이 더러우면 몸도 더럽고 마음이 청결하면 몸도 청결하게 된다. 국어 사전에 보면“마음이란 1. 감정이나 생각, 기억 따위가 깃들이거나 생겨나는 곳 2.무엇을 하고자 하는 뜻 3.마음을 쓰는 태도”라고 설명되어 있다. 마음이란 어느 한 사람의 생각, 감정, 의지, 사상, 철학, 신념, 주장, 경험, 관심사, 취향을 담고 있는 영역이다.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사람의 말을 들어 보거나, 행동을 지켜보면 그 사람이 평소에 가지고 있는 생각이 어떠하며 추구하는 바가 어떠한지를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마음의 지배를 받는다. 몸을 지배하고 일상을 지배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다. 한 사람의 희로애락(喜怒哀樂)과 의지가 표현되는 바탕이 그 사람의 마음이다. “마음이 즐겁다, 마음이 아프다, 마음이 괴롭다, 마음이 슬프다, 마음이 무겁다, 마음이 상한다, 마음이 상쾌하다, 마음이 흡족하다, 마음이 섭섭하다, 마음이 만족하다, 마음에 든다, 마음에 않든다, 마음에 맞는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음에 새긴다, 마음에 둔다, 마음이 있다, 마음이 없다, 마음을 같이 한다, 마음을 쓴다, 마음이 강하다 혹은 마음이 약하다, 마음이 편하다, 마음이 타들어간다” 등등 끝 없는 표현에 마음을 담아서 사용한다. 

 

그래서 잠언 4장 23절에 보면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라고 교훈하였다. “너희 몸을 산 제물로 드르라”라고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이 나의 삶에 있어서 기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이다. 잔 칼빈은 “너희 몸이란 너희의 인격, 너희 자신을 뜻한다”라고 설명해 주었다. 1절을 보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한가.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살아 있는 제물답게 살아가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매 순간 대답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산 제물’이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영구적인 헌신이 수반되는 삶의 태도를 강조하는 표현이다. 어느 한 순간의 거룩이나 성결이 아니라 매 순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제물과 같은 인생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나 주님의 기쁨되기 원하네”라고 찬송만 따라 부르지 말고 그런 생을 살아가야 한다.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님”이라고 예배 시간에만 찬송하며 사람들 보기에 ‘거룩한 것’같아 보이는 정도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보실 때에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 과거 어느 한 때 거룩하게 살아보려고 노력한 옛날 이야기에 사로 잡혀 있지 말고 지금 매 순간 거룩한 삶을 살아야 산 제물 인생이 되는 것이란 말이다. 

 

바울 사도 당시의 도시 로마는 타락한 도시였다. 우상을 숭배하며 성을 매매하였다. 그와 같은 악습에 젖어 있는 로마 시민을 위하여 거룩한 삶으로의 변화를 촉구한 것이다. 이는 그 당시나 오늘날이나 마찬가지이다. 십계명으로 비추어 볼때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니라고 여겨지시는 삶의 모습은 노아의 시대나 소돔과 고모라의 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더 악랄하고 더 지능적이고 더 교묘한 범죄가 넘쳐난다. 

 

영국의 작가 로버트 스티븐슨이 쓴 단편 소설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주인공은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이야기다. 남에게 보여지는 모습이 나 자신의 전부가 아니다. 인간은 그 누구나 다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타락한 아담의 후손의 모습이다. 이런 것이 세상의 모습이다. 그런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은 이런 편지를 써서 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에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한 것인가. 바울 사도의 강조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성도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나타내 보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대단히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다. 맞다. 신앙 생활은 세상과 동 떨어진 생활이 아니다. 높은 담장 안에 갇혀서 세상과 단절하고 살아가는 수도원 생활이 아니다. 수도원에 갇혀 지낸다고 해서 저절로 거룩해지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2절에서 사도 바울은 무어라고 말씀하고 있나. 

 

여러분. 이 세대를 본 받지 마세요.

오직 마음을 세롭게 하세요.

변화를 받으세요.

하나님의 선하신 뜻, 기뻐하시는 뜻,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세요. 

 

라고 교훈하고 있다. 여기에 무슨 설명이 필요한가. 1988년에 우리나라에 소개 된 기독교 번역서 중에 미국의 로버트 펄검(Robert Fulghum)의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다 배웠다>라는 책이 있다. “그때 나는 의미 있는 삶을 사는 데 꼭 필요한 것을 내가 이미 알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게 그리 복잡하지 않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이미 오랫동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는 것과 아는 대로 사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이제 나의 신조를 소개한다. 어떻게 살 것인지,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에 대해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나는 유치원에서 배웠다. 지혜는 대학원의 상아탑 꼭대기에 있지 않았다. 유치원의 모래성 속에 있었다.”이런 식의 내용들로 가득 찬 책이다. 그렇다. 우리는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 헤겔의 철학 그런 것은 몰라도 좋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법을 익히고 실천하면 세상은 사람 살만한 세상이 될 것이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5장에서 가르쳐 주셨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교훈해 주셨다. 맛을 잃은 소금이 아니라 세상에서 제 맛을 내는 소금과 같은 인생으로 살라고 가르쳐 주셨다. 소금의 맛을 잃고 세상에 버려진 인생으로 사람들의 발에 밟히는 인생이 되면 안된다고 경고하셨다. 

 

세상의 어둠 속에 동화되지 말고 어둠을 이기는 세상의 빛이 되라고 교훈해 주셨다. 그 빛은 ‘너희 착한 행실’이라고 하셨다. 그 착한 행실로 인해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바울은 계속하여 권면한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마세요.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살아가란 교훈인가. 허망한 생각을 버리고 나만의 은사와 재주와 역량과 능력을 갈고 닦으라는 말씀이 아닌가. 바울은 이것을 “믿음의 분량”이라고 말한다. “지혜롭게 생각하라”라고도 교훈해 주고 있다.

 

믿음의 분량이 무엇인가. 어느 미국인이 대서양 바닷가에서 물고기를 낚시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물끄러미 바라다 보니까 큰 물고기는 버리고 작은 물고기만 망태에 담더란다. “왜 그렇게 하느냐”라고 물어 보니까 “우리 집에는 이처럼 작은 후라이팬 밖에는 없어서요”라고 대답하더란다.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마음과 신념이 문제이고 믿음이 문제이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믿음의 분량대로”라고 교훈하고 있다. 여기서 말씀하는 ‘믿음’이란 “주 안에서 새롭게 변화된 그리스도인의 영적 능력과 자질과 역량”을 의미한다.

 

우리가 아는 사도 바울은 누구인가. 그는 모세의 율법은 잘 알았지만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천국 복음은 모르던 자였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예수 믿는 이들을 박해하고 핍박했다. 찾아 다니면서까지 색출해서 죽여 없애려고 했다. 기독교는 박멸해야 한다는 신념에 사로 잡혀 있었다. 그런 그가 바뀌었다. 다메섹 체험 이후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의 믿음이 변했다. 그의 믿음의 분량이 달라졌다. 그가 오늘날 우리가 성경에서 만나는 초대 교회의 위대한 이방 전도자 사도 바울이다.

 

어제 음악회에 출연한 어린이 합창단원 15명은“나는 할 수 있어”라고 노래하였다. 맞다. “너 같은게 뭘해 ”라고 주어 박으면 안된다. “참 잘 했어요, 더 잘 할꺼에요.”라고 칭찬하고 격려할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이 기대하시는 어린이들로 자라나도록 도와야 한다. 주 안에서 인물로 키워내야 한다. 

 

이번에 키르키즈스탄에서 수요일 오후와 목요일 그리고 금요일 아침까지 함께 지낸 조영철 선교사는 30년 전에 미국 감리교회가 파송한 한인 연합감리교회 최초의 러시아 선교사였다. 그에게서 배출된 80여명의 목사들이 또 다른 후배들을 양성해서 오늘 날 유러시아 연회가 세워졌다. 그를 신학교에서 만난 이들 중에 감독도 탄생했다. 그 후배들이 자라나서 젊고 유능한 감리사도 자라났다. 20대의 총명하고 유능하고 은혜를 아는 복음적인 청년들이 처처에서 사역해 나가고 있다. 저지난 해 러시아에서 추방되었다. 키르기즈스탄으로 이주해서 사역해 가고 있다. 그는 선교를 위해서 젊음을 다 보냈고 내년이면 은퇴한다. 지난 해 동서 장로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유언을 따러서 15,000불로 그곳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사진에 보내드린 에드워드 전도사가 사역하는 교회이다. 평생 목회하고 은퇴하신 90이 훨씬 넘으신 부모님이 2만불은 마련해서 또 다른 곳에 교회를 개척하였다. 홀로 된 누이 동생도 다시 2만불을 헌금해서 또 다른 곳에 교회를 세웠다. 그의 지난 날의 사역을 통한 열매는 크게 자라난 겨자나무가 되었다. 처처에 복음의 씨앗이 번져 가서 숲을 이루고 있다. 

 

카자흐스탄의 옛 수도 알마티는 숲 속에 도시가 건설되어 있다. 길거리 가로수의 굵기가 장정 두 사람이 안아도 부족할 만큼 울창하다. 그 곳은 불법으로 한 그루의 나무를 베면 100그루를 심도록 하는 엄한 정책을 펼쳐 왔다고 한다. 그러하다 보니 도시를 건설하고 나무를 심은 것이 아니라 밀림 속에 빌딩을 지어 놓은 것과 같은 푸르른 도시로 지리매김 한 것을 보았다.

젓가락 같은 가늘고 작은 나무를 심었어도 누군가가 심고 물을 주면 세월과 함께 거목으로 자란다. 카자흐스탄의 옛 수도 알마티에 도착해서 삼일간 머문 숙소의 대각선 맞은 편에 키메프(KIMEP)대학교가 있었다. 한국인이 설립한 엘리트 대학교이다. 키메프는 카자흐스탄 경영. 경제. 전략연구소를 줄여 부르는 이름이다. 모든 과정의 모든 수업을 영어로 하는 것이 키메프의 강점이다. 학생 3,500명에 교수 170명이다. 해마다 한국인 유학생은 1% 조금 넘는 50여명 정도이다. 교수의 98%가 외국대학 박사 학위 소지자들이고 그중 53명이 외국인이다. 학비가 비싼 대신 학생의 60%가 장학금을 받는다. 카자흐스탄과 이웃 나라에서 우수한 입학생들이 몰려든다. 취업률은 100%다. 키메프의 설립자이며 재단이사장 겸 총장은 한국인 경제학자 방찬영(1936-) 박사이다. 올해 86세의 현직 총장이다. 그는 미국 샌프란시스코대 경제학 교수였다. 그는 소연방 붕괴로 카자흐스탄이 독립한 1991년부터 3년간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의장인 경제전문가위원회 부의장으로 사회주의경제를 시장경제로 바꾸는 대역사를 주도했다. 1994년 한양대 교수로 귀국했다가 이듬해인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로 부인과 아들과 딸을 한 순간에 모두 잃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그는 그런 참혹한 일을 당한 슬픔을 가슴에 묻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위로를 의지하며 카자흐스탄으로 돌아갔다.

 

그는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교육정책 고문으로 일하다 1998년 공산당 간부학교를 인수해 유럽공동체(EU)와 소로스 재단, 그리고 미국 대외원조처(USAID)의 지원금을 받아다가 세계에서 유례가 드문 엘리트 정예를 양성하는 대학으로 발전시켰다. 지금은 해외 지원은 끊기고 독립채산제로 대학을 운영한다. 인구 2,000여만 명의 카자흐스탄에서 키메프는 2003년부터 매년 600명의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우수한 인재를 배출하고 있다. 그들이 카자흐스탄의 각계 각 분야에서 지도층을 이루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교회는 그런 곳이어야 한다. 겨우 복음을 깨달아 알고 천국 소망을 갖고 사는 정도여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세상의 온갖 고난을 이기며, 슬픔을 이기며, 환난을 이기며, 가난을 이기며 딛고 일어나야 한다. 믿음의 분량만큼 지혜롭게 생각하며 열매 풍성한 삶을 살아가길 주님은 원하신다. 

 

 

주신 은혜와 은사를 따라 주를 섬기라.

우리 몸에는 많은 지체가 있다. 각기 기능이 다르다. 이처럼 우리들도 각기 자신의 은사와 역량을 따라서 주를 섬겨 가야 한다. 발이 손더러 무어라고 하면 안된다. 귀가 눈더로 무어라고 하면 안된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 12장에서 말했다.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고전12: 17) 눈이 손더러 쓸데 없다고 말하면 안된다. 머리가 발더러 쓸데 없다고 말하면 안된다. 몸이란 어디가 고통스러우면 온 몸이 그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이다. 그것이 몸이다. 몸의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다 같이 고통을 받는 것이다. 몸의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몸의 지체가 다 같이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다. 

 

초창기 오르간을 풍금이라고 했다. 커튼 앞의 무대에서 풍금을 연주하는 연주가가 있다. 그런가하면 커튼 뒤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풍금에 바람을 풍로질하는 이의 수고도 있다. 그 둘이 합하여 아름다운 연주가 가능한 것이다. 

혼자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혼자 할 수 있다는 것은 어리석은 교만이다. 더불어 하는 것이다. 연합하여 하는 것이다. 서로 서로 재주와 은사와 역량을 분담해서 하는 것이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12:27)라고 하였다. 

 

오늘 본문인 로마서 12장 6절에 보면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라고 하였다. 은혜와 은사는 같은 어원을 가진 단어이다. 사도 바울이 사용하는 ‘은혜’란 “하나님께서 값없이 부어 주시는 사랑”을 일컫는 말이다. ‘은사’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워 가도록 각 사람에게 부어 주신 능력”을 의미한다. 주변을 보라. 우리 교회 안에도 구석 구석에서 주께 은혜를 받고 다양한 은사를 따라서 끊임이 없이 주님의 몸된 교회와 성도들을 서로 섬겨 가는 이들이 있다. 그들을 통해서 교회는 교회다운 건강한 교회로 든든하게 세워져 가는 것이다. 

 

예언, 섬김, 가르침, 위로, 구제, 다스림, 긍휼의 실천이 각 사람에게 주어진 은사이다. <현대인의 성경>에 보니까 

 

“예언이라면 믿음의 정도에 맞게 하고

섬기는 일이면 봉사함으로, 

교사는 잘 가르침으로 하십시오.

권면하는 사람은 격려의 말로, 

남을 구제하는 사람은 후하게, 

지도자는 열심히,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기쁨으로 하십시오.”

 

라고 교훈하였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시작되었다. 엊그제 금요일이 벌써 백로(白露)이다. 이때가 되면 밤 기온이 뚝 떨어지고 풀잎 끝에 이슬이 맺힌다. 열매가 튼실하게 익어가는 계절이다.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를 사장하지 말고 갈고 닦아서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하여 충성되게 살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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