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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부르심(행9:1-9) 2023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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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3-07-09 11:46 조회 1,236 댓글 0
 
                                   부르심(행9:1-9)                    2023. 7. 9


사울의 회심과 변화를 다룬 오늘 본문 내용은 웬만한 기독교인이면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부르심’이라고 정했다. 여러분도 이 시간 자신에게 물어보아라. “내가 언제 주의 부르심을 체험하였는가”라고 말이다.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120여명의 성도들이 성령을 받은 것이 예루살렘 교회가 탄생된 시작이다. 그 후로 저들 가운데 성령 충만을 받은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통하여 하루에 삼천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역사적이 일이 생겼다. 사도들을 비롯한 성령 받은 성도들은 날마다 기도를 계속하였다. 악기를 다루는 음악 전문가들은 날마다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성악가들도 날마다 자기 목소리를 가다듬어 나간다. 이는 운동 선수들도 마찬가지이다. 미술은 어떠한가. 미켈란젤로의 역사적인 세가지 조각상이 며칠만에 완성되었겠는가. 그는 십자가에서 내려진 아들 예수의 시체를 무릎 위에 안고 오열하는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를 조각한 피에타와 4m 높이의 수려한 다윗상과 모세상을 조각해 내기 위해서 어떤 시간, 어떤 세월을 보냈겠는가. 이처럼 이미 성령을 받은 성도라고 할지라도 날마다 기도와 말씀에 충실하는 삶을 이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과거 어느 순간에 성령을 체험한 그 과거의 사건만 가지고 지금의 나의 영적 상태와 영적 실상을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은 많은 이들에게 잘 알려진 익숙한 본문이지만 다시 차근차근 대하는 중에 은혜가 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복음의 대적자 사울.
우리는 주변에서 살기 등등한 폭력적인 기질과 악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을 더러 대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 당시 사울은 그런 정도, 그런 차원을 뛰어넘는 자였다. 1절의 ‘위협과 살기’라는 말은 “금방이라도 사람을 죽일 듯이 달려들며 위협을 느끼게 하는 심각한 상황”을 설명하는 말이다. 그 당시 사울의 상태가 그랬다. 사울이 대제사장에게서 받아 낸 ‘공문’이란 것은 합법적인 ‘체포 영장’과 같은 문건이다. 우리는 질문하게 된다. “아니 ‘다메섹’은 이방 도시인데 무슨 여러 회당이 있었단 말인가” 라고 말이다. 다메섹은 창세기 14장 15절에도 그 도시 이름이 소개될 정도로 오래된 수리아의 고대 도시이다. 

예루살렘에서 다메섹은 20km 거리이다. 그 곳에는 그 당시에 4만여명의 유대인들이 흩어져 살았고 30-40여개의 회당이 있었다. 예루살렘 안에 있었던 기독교인들에 대한 핍박으로 인해서 이미 다메섹에까지 흩어져서 사는 기독교인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 이 때가 A.D 34-35년 경이니까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지 불과 몇 년이 지난 때였다. 이러한 핍박은 계속되었고 역사학자 요세프스(Josephus)의 기록에 의하면 나중 A.D 66년에는 네로 황제에 의해서 기독교인 1만명 이상이 학살 당하였다.

기독교의 복음 전파 초기에 악명 높던 핍박자가 사울이었다. 성경은 사도행전 9장의 사울의 회심 사건 기록을 통해서 하나님은 아무리 복음에 대한 핍박과 방해와 훼방이 크더라도 하나님의 섭리와 방법에 의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신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사울이 핍박하고 잡아다가 죽여 없애려는 대상은 분명하였다. 2절에 언급된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이 색출 대상이었다. 공산당은 “기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기독교인을 타도하는 것이 저들의 체제를 유지하는 제 1의 목적 중의 하나이다. 이처럼 초대교회 당시에 공회인 산헤드린 의원들이나 대제사장을 비롯한 제사장들과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들은 똘똘 뭉쳐서 예수 믿는 이들을 박멸하려 하였다. 그런데 그런 저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앞장서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이 바로 ‘사울’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1장 13절에서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라고 자신이 회심하기 이전의 상태를 간증하고 있다. 그렇게 악랄(惡辣)했던 사울이 변화된 것이다. 

하나님은 하시면 얼마든지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법으로, 원하시는 계획과 섭리를 이루신다. 그 증거 중의 하나가 핍박자 사울의 변화이다.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다.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이지 수양의 종교가 아니다. 도덕과 윤리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 기독교의 복음의 힘이요 성령의 역사이다. 

그 증거 중의 하나가 사울의 회심과 변화 사건이다. 사도행전 8장 1절에 보면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도 마땅히 여기던 자였다. 이런 기록들을 지나치면 안된다. 사도행전의 기록자 누가는 이와 같은 꼼꼼한 기록을 통해서 그렇게 악랄하고 율법에 사로잡힌 악당이었던 사울의 변화 장면을 자세하게 기록해 주고 있다. 

나 자신을 비롯해서 내 주변에 쉽게 변화되지 않는 그 누군가가 있는가. 소망을 버리지 말라. 왜냐하면 하나님이 변화시키시면 일 순간에 새 사람으로 변화시키실 수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흔히 한국 교회 역사 초기에 변화 받은 깡패 김익두(金益斗, 1874-1950)의 변화를 예로 든다. 맞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변화시키셔서 쓰시길 원하신다. 황해도 신천의 시장 골목 사람들이 벌벌 떨던 깡패 김익두는 변화 받고 평양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다. 그는 16살에 과거 시험에 낙방한 후에 장사하면서 돈을 좀 벌다가 실패한 후에 청년기를 방탕하게 지냈다. 그러나 스왈렌(Swallen,W.L.) 선교사의 ‘영생’이란 제목의 설교를 듣고 변화되어 아내와 어머니와 함께 스왈렌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한국 초대 교회 역사에서 김익두 목사를 빼어 놓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를 변화시켜 사용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76살 때인 1950년 10월 14일 새벽, 평생을 목회하던 신천교회에 들이닥친 공산당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는 “50여 년 동안 목회하며 국내와 일본 및 시베리아 지방 등 여러 곳을 다니면서 776회의 부흥집회를 인도했다. 150여 곳에 교회당을 세웠다. 2만 8천여 회의 설교로 수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다.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를 통하여 병 고침을 받는 은혜 체험을 하였다”라고 한국교회사는 기록하고 있다. 

모세는 40살에 왕궁 밖에 나갔다가 동족 히브리인과 다투는 애굽 사람을 쳐 죽였다. 우리가 아는 모세는 40살에 살인의 경력이 있는 살인범이다. 그런 그가 그 다음 날 또 다시 왕궁 밖에 나갔다가 동족 간의 싸움을 말리려 했다. 동족간의 싸움에 끼어들려 한 것이다. 그런데 어저께의 살인 사건이 이미 다 소문 난 것을 알았다. 그 날, 모세는 왕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미디안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살인범이요 도망자의 신세로 미디안에서 40년을 지냈다. 거기서 장가들고 거기서 두 아들을 낳았다. 모세는 40년 세월이 지났지만 사람을 죽인 살인범임에는 분명하다. 살인자 모세의 미디안 생활 40년은 감옥과 같은 곳이었다. 살인은 모세의 기억 속에 지워지지 않는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를 호렙산 떨기나무에 불이 붙는 듯한 환상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이 부르셨다. 그리고 그 부르심 앞에 응답한 모세를 통해서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로 이끌어내는 선봉에 세우셨다. 그리고 120살에 죽기까지 40년을 모세를 사용하셨다. 

오늘 날 우리 각 사람도 마찬가지다. 처지와 형편과 탄생 환경과 성장 배경과 사회 경험이 서로 다르지만 하나님이 우리 각 사람을 나름대로 변화시켜서 사용하고 계신 것이다. 다 신학교 가고, 다 목사가 되고, 다 선교사가 되자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하나님의 방법대로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나라 복음의 전파자로 사용하시기를 원하신다. 
 

빛 가운데 임한 예수의 음성.
사울이 체험한 신비 체험은 두 가지이다. 강한 빛과 주의 음성이다. 3절에서 말하는 ‘홀연히 하늘로부터 임한 빛’은 평범한 빛이 아니다. 일상생활에서 체험하는 빛이 아니다. 우리가 한낮에 체험하는 태양의 빛과 비교할 수 없는 그 어떤 빛이다. 사도행전 22장 6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그날의 체험을 “오정 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라고 간증하였다. 

맞다. 주님은 태양 빛과 비교할 수 없는 강하고 큰 빛의 체험으로 사울을 부르셨다. 뿐만 아니라 땅에 엎드러진 사울에게 주님이 친히 말씀하셨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주님은 사울의 이름을 두 번 반복하여 부르셨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대개 이처럼 반복적이었다. 창세기 22장 11절에 보면 모리아 산꼭대기에서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리려던 아브라함의 빼어 든 칼을 하나님이 멈추게 하셨다. 그 때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자인 천사를 동원하여“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라고 부르셨다. “모세야 모세야”, “사무엘아 사무엘아”이처럼 하나님이 누군가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실 때에 반복해서 그의 이름을 부르신 것을 본다. 

이는 예수께서도 마찬가지였다. 누가복음 10장 41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동생 마리아의 도움을 요청하는 마르다에게 “마르다야 마르다야”라고 그의 이름을 두 번 반복하여 부르셨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라는 그 말씀을 하시던 그날 말이다. 누가복음 22장 31절에도 보면 예수께서는 “시몬아 시몬아”라고 베드로의 원래 이름을 두 번 반복하여 부르셨다. 그날 예수께서는 장차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고 배반할 것을 예언하시며 심각한 경고의 말씀을 하셨다.
 
사울의 이름을 두 번 반복하여 부르신 예수께서는 사울의 교회 핍박은 곧 예수를 핍박하는 일이라고 거론하셨다. 맞다. 누가 교회나 성도를 조롱하거나 폄훼하거나 박해하거나 주의 일을 훼방하는 것은 곧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것과 같다. 예수께서 이를 분명하게 하셨다. 그 동안 사울이 교회를 박해하고 예수 믿는 이들을 핍박하고 스데반 집사의 죽음도 마땅히 여기고 하는 처사를 다 알고 계시던 예수께서 사울에게 말씀하셨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하여야 한다. 교회나 성도를 조롱하거나 박해하는 것은 곧 예수를 박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와 성도는 예수의 몸이며 예수는 성도와 교회의 머리이시기 때문이다. 골로새서 1장 18절에 보면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라고 하였다. 고린도전서 12장 27절에 보면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몸과 지체로서의 자긍심을 가지고 세상을 담대하게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예수의 질문 앞에 사울은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반문하였다. 예수는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대답하셨다. 사울은 예수를 직접 만난 적이 없다. 그러데 예수께서는 분명하게 문제 삼으셨다. 교회와 성도를 박해하는 일은 곧 예수를 박해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셨다. 


신비 체험과 부르심.
예수께서는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묻는 사울에게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다메섹 도상의 사울을 강한 빛과 주의 음성으로 부르신 분명한 목적을 담고 있는 내용이다. 

하나님은 각 사람을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따라 부르셔서 쓰신다. 이것이 성경의 역사이며 곧 지난 2천 년의 기독교 역사이다. 

사울이 다메섹 성안에 들어가려던 목적은 분명했다. 예수의 부활의 도를 가르치는 자를 색출해서 대제사장 앞으로 끌고 가서 처형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 날 그를 부르신 것이다.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게 다메섹을 향하던 사울인데 그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앞을 못 보게 된 상태에서 다메섹 성 안으로 들어갔다. 사흘간 앞이 보이질 않았다. 사흘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예수께서는 다메섹 성의 아나니아 선지자를 통해서 사울을 찾아가서 안수하게 하였다. 직가의 유다라는 사람의 집에 머물고 있던 사울을 만난 선지자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하였다. 사울이 앞을 못 본지 사흘 째 되는 날이었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사울의 부르심의 장면이다. 사도행전 9장 15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아나니아를 통해서 사울의 회심과 변화를 통한 부르심과 사명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할 자다.
-이 사람은 내가 택한 나의 그릇이다.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많은 고난을 받을 것이다.  

맞다. 사울은 예수께서 이방 선교를 위해 택하신 주의 그릇이었다. 사울은 유대식 이름이고 바울은 헬라식 이름이다. “사울은 큰자이고 바울은 작은 자다” 그런 해석은 엉터리 해석이다. 히브리 이름의 ‘사울’이란 히브리어‘사알’에서 온 이름인데 ‘간구하다, 기도하다, 간청하다’라는 뜻이다.  로마 시민권자로 태어난 사울이 유대인 사회에서 활동할 때에는 히브리식 이름인 ‘사울’로 사용되었고 이방 선교 현장에서는 헬라식 이름인 ‘바울’로 사용된 것 뿐이다. 예수께서는 로마 시민권자로서 헬라 말과 히브리 말에 능숙했고 율법에 능통했던 사울을 부르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셔서 초대 교회 이방 선교의 존귀한 사도로 사용하신 것이다.  

아나니아는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 사울을 찾아가 안수하였다.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사울은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고 힘을 되찾았다. 주님은 그날 그 순간에 사울에게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셨다. 사울은 그날부터 여러 날을 머물면서 다메섹의 회당마다 찾아 다니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전파하며 다녔다. 듣는 사람마다  이전의 사울이 누군지 알아보고 놀라워했다. 사울은 점점 힘을 더 얻었다. 가는 회당마다에서 “예수는 그리스도라” 증언하며 다녔다. 듣는 사람들마다 당혹스러워했다. 여러 날 이런 일이 계속되자 다메섹 성 안에 살던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공모하였다. 그 소문이 사울의 귀에 들렸다. 유대인들은 공모해서 다메섹 처처의 성문을 지키며 사울을 죽이려고 했다. 결국 사울의 곁에 함께하던 이들의 도움을 받아 밤 중에 사울은 광주리를 타고 성 밖으로 도망쳐 나갔다. 사울은 몰래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는 다메섹 방문 중에 예수의 부르심을 체험하고 돌아온 사울을 환영할 리가 없었다. 사울의 다메섹 체험을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나 성도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와 성도들은 자기들의 곁으로 다가 오는 사울을 두려워 하였다. 그 답답한 정황을 파악하고 사울의 변화와 부르심을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와 성도들에게 설명하며 나선 이는 바나바였다. 하나님은 바나바를 통해서 사울의 변화 받은 부르심의 소식을 예루살렘교회 안에 널리 알려지게 하셨다. 

남은 헐몬산 새벽 기도회와 더불어 각 사람이 부르심에 순종하며 성령 충만함으로 나날이 나를 통해서 주의 복음이 확장되면 믿는 자의 수를 더해가게 하는 복음의 통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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