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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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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 합당한 자(마10:34-39) 2023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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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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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6-25 23:44 조회 955 댓글 0
 

                         주께 합당한 자(마10:34-39)          2023. 6. 25 순교자기념주일

 

 

오늘은 1950년 6월 25일, 동족간에 한국전쟁이 벌어진지 73주년이 되는 날이다. 교회력으로는 순교자기념주일이기도 하다. 전쟁의 참상은 이루 다 설명할 수가 없다. 전쟁의 교훈을 생각하고 순교자와 순국자의 희생을 기억하는 것은 매우 합당한 일이며 마땅한 일이다. 사도행전 12장 2절에 보면 제자 야고보는 헤롯의 칼에 의해 죽임을 당한 초대교회 최초의 순교자이다. 장수하며 요한 복음과 요한 일이삼서와 요한 계시록 까지를 기록한 요한 사도 외에는 맛디아를 포함한 모든 사도가 순교 당하였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신32:7)라고 하였다. 맞다. 우리는 전쟁의 비극의 교훈을 기억해야 한다. 전쟁의 희생자과 유족들을 기억해야 한다. 전쟁을 도와 준 이웃 나라 군대의 헌신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중에 6.25의 실상을 기억하는 분들이 더러 계시다. 전쟁은 비참한 것이다. 6. 25 전쟁 사상자는 400만명에 이른다. 남한 군대는 말할 것 없고 유엔군 사망자만도 5만 8,000여명에 이른다. 미군은 178만 9,000명이 참전했다. 그 중에 33,686명이 전사했다. 96,134명이 부상당했다. 8,617명이 실종되었거나 포로로 끌려 간 후 생사를 알 수 없다. 지게로 전쟁터에 식량과 탄약과 생필품을 져서 나르던 이들을 지게부대라고 부른다. 유엔군은 이들이 보급품을 나르는데 쓰는 지게가 알파벳 ‘A’자와 닮았다며 ‘A형 부대(A Frame Army)’라고 불렀다. 지게부대는 10대 소년부터 60대도 끌려 가서 참여했다. 휴전 때까지 참전했던 지게부대원 숫자만 1만 3,000여 명이다. 확인된 희생자만 8,794명에 이른다. 그러나 군번이나 계급장 없이 참전했던 저들을 역사가 잊어서는 않된다는 목소리가 높아 지고 있다. 

 

오늘도 지구 저편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에는 지난해 2월 24일에 발발한 전쟁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쪽의 공식 사망자 수만도 2만 4천명이 넘는다. 세계은행의 발표에 따르면 올 3월 통계로 우크라이나 전쟁 복구 예상 비용만도 532조에 이른다. 이 전쟁이 언제 끝날지 예측할 수 있는 이들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우리나라는 휴전 상태의 전쟁 후유증을 떠 안고 여기까지 발전해온 근대사에 주목 받는 국가 중의 하나이다. 우리나라는 일제 식민지와 6. 25의 폐허를 딛고 오늘 날 세계 수출 6위, 수입 8위의 부강한 나라로 발전해 왔다. 

전쟁은 군인과 민간인 구분 없이 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앗아 간다. 기간 시설과 삶의 근거지가 폭파되고 폐허가 된다. 전쟁을 겪고 살아남아 있는 자들의 충격과 슬픔과 상처와 아픔과 후유증은 이루 설명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성경은 첫 인간 아담과 하와 사이에 태어난 큰아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형제 살해의 장면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일류의 역사는 개인과 개인 간의 증오와 갈등과 대립과 싸움으로부터 이웃 간에, 기업 간에, 민족 간에, 국가 간에 대립과 갈등과 위협과 보복이 끝없이 계속된다. 전쟁을 방불케 하는 위험은 언제 어디에나 도사리고 있다. 

 

며칠 전인 6월 23일 아침 7시, 경기도 광주시의 한 빌라에서는 주민 간에 주차 시비가 있었다. 77살 남성은 자기 집에 들어가서 길이 1m에 가까운 일본도를 들고 나와서 휘둘렀다. 55살, 피해 남성은 오른쪽 손목을 크게 다쳤다. 수원 아주대 응급팀의 닥터 헬기로 후송해서 치료를 받던 중에 과다 출혈로 사망했다. 칼을 휴두른 남성은 ‘노인검객’으로 소문나서 방송에도 여러 번 소개된 적이 있다고 한다. 예수께서 붙잡히시던 새벽에 베드로는 칼을 빼어 들어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어 냈다. 예수께서는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26:52) 라고 책망하셨다. 마음의 화와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면 우리 주변에 흉기로 둔갑할 수 있는 것들은 너무나도 많다. 

 

오늘 본문을 보자. 본문에는 37-38절에‘ 합당하지 아니하며’라는 강조가 세 번 나온다. 그러면 예수께서 이러한 강조를 통해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교훈하시나를 묵상하며 은혜를 나누도록 하자. 

 

 

주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분별하는 자.

본문 34-37절은 잘못 이해하면 예수께서 무슨 교훈을 말씀하시려고 하셨는가를 곡해하기 쉬운 난해한 말씀 중의 한 부분이다. 그렇지 않나. 평강의 왕으로 이 땅에 보냄을 받은 예수께서 “나는 세상에 검을 주러 왔노라”라고 말씀하고 계시니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이사야 9장 6절에 보면 장차 태어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는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라고 하였다. 예수의 탄생 장면이 기록된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라는 천군천사의 찬송 내용이 담겨 있다. 

 

맞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평화의 회복을 위해서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담긴 예수의 말씀은 그 반대의 말씀을 하시는 것 만 같다. 왜냐하면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10:34)라고 말씀하고 계시니 말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아들이 아버지와, 땅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가 집안 식구리라”라고 풀어 설명해 주셨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로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역행하여 왔다. 하나님은 구약의 짐승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와 화목을 기대하셨다. 그러나 송아지와 양과 염소의 피로 해결 할 수 없는 인간의 죄의 문제를 아신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로 보내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고향인 나사렛 사람들로부터도 배척을 받으셨다. 하나님을 잘 믿는 것 같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중심으로한 대제사장들로부터도 환영 받지 못하셨다. 결국은 그들의 미움을 받고 십자가에 처형당해 죽으셨다. 

 

예수 주변에는 이 땅에 계신 동안에 그를 싫어하고 미워하고 배척하는 이들로 넘쳐났다. 예수를 기다렸고 만나고 싶어하는 이들은 각색 병자와 그의 가족들 뿐이었다. 귀신 들린 가족을 고쳐 보려고 안타까워 하던 그들과 가족과 주변 사람들 뿐이었다. 

 

그러한 예수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에 이르기 까지 예수의 복음을 받아 들이는 과정에 엄청난 희생과 순교와 갈등이 계속되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 복음이 들어오기 까지 얼마나 많은 순교자가 있었나 모른다. 서울 신학대학 박명수 교수가 앞장선 연구 조사 팀은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를 결성하고 6. 25를 전후로 기독교인이란 이유 때문에 살해당하였거나 순교 당한 기독교인을 조사하였다. 1145명에 이른다. 논산군 성동면 우곤감리교회의 교인 73명은 1950년 9월 27-28일 기간에 집단 학살 당했다. 삽, 죽창, 몽둥이, 괭이에 살해 당했다. 도끼로 뒷 머리를 쳐서 학살했다. 교회와 온 마을이 피바다였다. 기독교인이란 이유로 공산당에 의해서 집단 학살 당한 것이다. 1km거리의 병촌성결교회 교인은 66명이 집단 학살 당했다. 그들 중에는 아기가 9명, 교회학교 어린이 22명이었다. 그 마을의 경주 김씨 집안 사람만 35명이 하루에 다 죽임 당했다. 그 들 중에는 젓먹이 어린 아기를 품에 안고 젖을 먹이던 중에 죽임을 당한 모자도 있었다. 

 

세상은 선과 악, 정의와 불의, 거짓과 진실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예수는 평화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셨으나 예수의 평화의 복음이 전파되기 까지에는 이처럼 해석하기 어려운 역사적인 비극과  슬픔과 아픔이 처처에서 계속되어 왔다.

 

하나님은 화평과 화목과 평강을 원하신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그 반대의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평화와 화평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설명하기 어렵고 이해하기 쉽지 않은 상황과 형편 가운데에서 타협이나 양보가 아닌 진리와 선과 정의의 승리를 향한 싸움과 투쟁과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그 배후에 수 많은 이들의 슬픈 희생과 순교가 있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검’은 악하고 죄 많은 세상에서 죄와 악을 척결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원한 평화와 구원을 이룩하기 위한 영적 전쟁을 위한 ‘검’인 것이다. 

 

그렇지 않나. 한 사람이 복음을 깨닫고 가족 간에 미움을 받고 배척을 받고 따돌림을 받아 가면서도 그 복음이 가족들에게 전해 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마음앓이를 해야만 하는가. 얼마나 오랜동안 외로운 영적 싸움을 계속해야만 하는가. 36절에서는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라고 하셨다. 복음을 깨닫고 나면 복음 안에서 복음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그 가치를 추구하게 마련이다. 그러하다 보면 37절의 말씀처럼 부모와 형제와 자식 간에라도 갈등이 빚어지고 오해가 쌓이고 때로는 대립하게 되지 않을 수가 없다.

 

마태복음 12장 46절 이하에 보면 하루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의 동생들을 데리고 예수를 찾아왔다. 한 사람이 집 안에 계신 예수께 이 사실을 전했다. 그 때에 예수는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라고 대답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와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12:50) 자기 부모와 형제와 자녀를 미워하고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다. 가족을 외면하고 등 돌리며 살라는 말씀도 아니다. 삶의 우선 순위를 어떻게 하고 살아가야 하나의 문제이다. 

 

예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피치 못할 갈등과 오해와 아픔과 슬픔이 없을 수 없다. 그런 세상을 향하여 주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라고 말이다. 주님이 원하시는 화평의 삶이 과연 무엇인지를 잘 생각하고 깨닫는 아침이 되길 소원한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자.

고대의 십자가는 사형틀이다. 사형에 해당하는 범인을 처리하는 처형 방법이 나무 십자가에 매 달아 죽이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사형제도는 목을 매다는 교수형인 것처럼 말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라 살아가기 위해서 겪는 고통과 시련을 말한다. 작게는 누군가로부터 무시를 당하거나 누가 예수 믿는 나를 깔보거나 조롱하거나 배척하는 경우로부터 크게는 죽음의 위험 앞에 노출될 수도 있다. 

 

예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라고 교훈하셨다. 그렇지 않나. 오늘 각 사람이 자기 자신을 보라. 내가 예수를 믿고 예수 안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날마다 내 몫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 하는 것들이 무엇일까. “내 건강, 내 시간, 내 경험, 내 재주, 내 역량, 내 은사, 내 재물, 내 취미, 내 욕망” 등등 그 무엇이든 내가 원하는 것만 추구하면서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 없다. 그런 경우란 없다. 불가능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 다하고, 내가 가고 싶은데 다 가고,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 다 만나고, 내가 먹고 마시고 싶은 것 다 먹고 마시고, 내가 쓰고 싶은만큼 다 쓰면서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제대로 살아가기란 불가능하다. 

 

그렇지 않나. 오늘날 우리 중에 누군가가 자기의 모든 것을 절제하고 검약하게 지내면서 주님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시간, 경험, 재주, 역량, 재물을 끊임이 없이 드리고 섬겨서 우리 공동체가 선교 중심의 교회로 여기까지 세워져 온 것이 아닌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자기 양보, 자기 헌신, 자기 희생”의 과정을 말씀하시는 것이니 말이다. 

지난 2천년의 기독교 역사를 보라. 지난 138년 동안의 한국 교회의 역사를 보라. 누군가가 자기 몫의 십자가를 지듯이 시간, 재주, 역량, 경험, 재물, 생명을 바쳐서 오늘날의 세계 선교와 한국 교회의 부흥을 이루어 온 것이 아닌가. 예배를 영어로 ‘worthship’이라고 한다. 이는 ‘worth + ship’이란 가치 있는 일이란 뜻이다. ‘-ship’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명사나 드물게 형용사에 덧붙여서 상태, 성질, 자격, 지위, 직위, 능력, 기능, 관계를 뜻한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Lordship, Discipleship 등의 단어의 의미를 보라. 

 

우리 각 사람은 예배를 통해서 치유와 회복과 평화와 안식과 기쁨과 감사와 만족과 보람과 힘과 능력과 지혜와 권능을 덧입는 은혜와 신비를 체험하며 살아간다. 그러므로 주를 따르고 섬기며 자기 몫의 십자가를 지는 생활은 얼마나 지혜롭고 보람된 일이며 각 사람을 향한 주의 부르심과 사명인지 모른다. 주 안에서 보람과 만족을 누리는 영생의 복이 선물로 주어지길 축원한다. 

 

339장 찬송 <내 주님 지신 십자가>를 함께 부르자.

 

1)내 주님 지신 십자가 우리는 안질까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2)내 몫에 태인 십자가 늘 지고 가리다

그 면류관을 쓰려고 저 천국 가겠네

(3)저 수정 같은 길에서 면류관 벗어서

주 예수 앞에 바치며 늘 찬송 하겠네

(4)저 천사소리 높여서 늘 찬송 할 때에

그 좋은 노래 곡조가 참 아름답도다

(5)그 면류관도 귀하고 부활도 귀하다

저 천사 내려 보내사 날 영접 하소서 아멘

 

 

주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잃는 자.

목숨 즉 생명이란 각 사람에게 주어진 일회적인 것이다. 윤회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 각 사람의 생명은 이 땅에 단 한 번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을 일생이라고도 한다. 한 번 주어진 생을 사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부끄러운 생을 살다가 간 이들도 있고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생을 살다가 간 이들도 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기대하신 삶을 살다가 간 이들도 있고 하나님이 실망하신 삶을 산 이들도 있다.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 사울은 40년간 왕이었다. 40세에 왕이 되어 80세에 죽었다. 그러나 사울왕의 나중은 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실 정도의 실망스러운 존재가 되고 말았다. 사무엘상 15장 35절에 나오는 내용이다. “여호와께서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예수께서 마태복음 10장 39절에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의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인 가롯 유다를 보라. 아무나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나. 아니다. 예수께서 친히 택하여 12중의 한 사람을 불러 세우신 것이다. 얼마나 영광스럽고 복되고 자랑스러운 자리인가. 그런데 가롯 유다는 왜 불행하게 되었는가. 왜 비참하게 생을 마쳤는가. 왜 주를 팔아 버리고 배반하고 떠나가 버렸는가. 

 

오늘날 우리 시대는 순교자의 시대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 각 사람은 이 세상을 순교자다운 태도로 살아가야 할 필요와 이유와 사명이 있다. 주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란 어떤 자인가. 당장 주를 위하여 순교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 날 우리 각 사람은 대개가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으로 세상의 향락을 즐기며 살아가는 중에서 선택 받은 하나님의 사람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의 가사를 보라.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이런 고백과 찬송에 부끄럽지 않은 매 순간을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9:24)

 

루마니아 푸로레스코 목사가 공산당에게 붙잡혀 옥에 갇혔고 온갖 고문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예수를 부인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그를 회유하려고 11살된 아들을 붙잡아 왔다. 아버지 목사가 보는 앞에서 아들을 발가 벗겼다. 밧줄에 거꾸로 매달았다. 끓는 물을 코에 부었다. 이 정도면 어떤 아버지가 더 이상 버틸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예수를 부인할 까 주저하고 있는데 아들이 캑깩 거리며 거꾸로 매달린 채 소리쳤다. “아빠 조금만 더 참으세요. 나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부인한 목사의 아들로 살아 남고 싶지 않아요.”

 

우리가 평온할 때 예수를 믿고 예수와 동행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생사의 갈림길에서 신앙의 위기를 겪을 때에도 예수를 부인하지 않고 내 한 목숨을 예수 안에서 예수와 더불어 예수를 위하여 바칠 수 있다면 그는 진정 예수의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전쟁의 비극을 교훈 삼으며 순교자의 피의 가치를 숭고하게 간직하며 굳건하게 자기 믿음을 지켜가는 상급 받을 만한 믿음의 주인공들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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