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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그러므로(롬5:1-8) 2023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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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3-06-18 22:27 조회 977 댓글 0
 

                               그러므로(롬5:1-8)                     2023. 6. 18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 오늘 본문에 있다.

 

로마서의 시작인 1-3장은 인간의 죄악상을 자세하게 거론한 후에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주의 은혜로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4장에서는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가면서 행위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믿음으로 인하여 의롭다 여기심을 받는 구원에 대한 진리를 교훈하였다. 5장이 시작되는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는 로마서 1-4장의 축약된 내용을 설명하는 접속사이며 로마서 4장 25절의 함축된 내용을 연결하는 접속사이다. 로마서 4장 25절을 다 같이 읽자.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 즉 성도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로마서 5장 1절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당시 이방인들은 “선행으로 구원을 받는다”라고 여겼고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는다”라고 여겼다. 그러나 구원의 진리를 깨달은 사도 바울의 강조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라는 것이었다. 자, 그러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라면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할까.

   

 

하나님과 화평(和平)을 누리자.

1절에서 말씀하는 화평이란 헬라어로는 ‘에이레네’이고 히브리어로는 ‘샬롬’이다. 이는 단순히 분쟁이 없고 평안한 상태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원래의 좋은 상태로의 완전한 회복을 의미한다. 경제적인 의미로는 완전한 보상을 뜻한다. 몸의 경우는 질병이 치유되고 건강을 회복한 상태를 말한다. 각 사람의 영혼육의 온전한 회복의 상태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화평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로 창조하셨다. 그러나 불순종으로 인한 범죄와 타락은 하나님과의 화평과 화목의 관계를 깨트리고 말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간과 하나님과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죄를 해결하셨다. 죄의 결박을 끊으셨다. 죄의 높은 담을 헐어 버리셨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실 때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 막고 있던 지성소의 휘장이 둘로 나뉘어 찢기어지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는 가리어져 있던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 신비의 세계가 그를 믿고 주로 영접하는 백성들에게 선물로 주어지게 된 것이다. 

 

우리가 요즘 읽는 성경인 <개역 개정 성경>에 ‘누리자’라고 되어 있으나 더 정확한 의미는 ‘누리도다’라고 해야 맞다. 왜냐하면 ‘누리자’라는 표현에는 인간의 노력이 요구되지만 ‘누리도다’라는 표현으로 하면 선물로 주어진 화평을 그야말로 누리는 혜택의 상태를 일컫기 때문이다. 성도인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 앞에 설명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말씀이 우리 각 사람에게 온전히 깨달아지고 믿어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 중보의 은총이 아니고는 결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로마서 3장 24절에서 명쾌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라는 말씀 말이다. 이 말씀을 좀 더 잘 이해하고 깨달으려면 그 앞 절을 주목하여야만 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라는 말씀 말이다. 그렇지 않나.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타락한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이로 말미암아 그를 믿는 인간의 죄를 속량하신 것이다. 우리는 그 속량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게 된 것이다. 이것은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인한 선물이다.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구원을 받고 행함으로 의롭다고 인정 받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받게 된 것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라고 하였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2) 라고 설명해 주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 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증거하였다.  

 

신앙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가. 당신의 요즘 신앙생활이 어떠하냔 말이다. 찬송가 412장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의 3-4절을 함께 부르자.

 

내 영혼에 평화가 넘쳐남은 주의 큰복을 받음이라

내가 주야로 주님과 함께 있어 내 영혼이 편히 쉬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 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이 땅 위에 험한 길 가는 동안 참된 평화가 어디있나 

우리 모두 다 예수룰 친구 삼아 참 평화를 누리겠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 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이런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주인공들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자.

2절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들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은 영광의 본체이시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인간과 천사와 모든 피조물로부터 하나님만이 받으실 수 있는 경배와 찬양을 의미한다.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아담과 하와가 창조될 당시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인간 속에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고 말았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가게 된 구원의 사실은 놀라운 선물이며 특권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남의 집에 손님으로 방문하면 모든 것이 조심스럽다. 그러나 아들딸은 장성한 후에도 아버지의 집에 가면 아무 침대에나 벌렁 드러누울 수도 있다. 화장실 출입에도 전혀 긴장하지 않는다. 냉장고를 하루에 열 번 스무 번을 열고 닫아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자녀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녀의 권세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라고 하였다. 우리가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신앙을 고백하고 나면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구분하기 위해서 물 세례를 행하며 문답한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개인적으로 주님을 찾아 왔던 니고데모에게“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다”고 가르쳐 주셨다. 

 

돼지는 비단 옷을 입혀도 돼지일 뿐이다. 그러나 왕자는 허름한 거지 옷을 입어도 왕자이다. 신분적으로 왕자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형편, 어떤 처지, 어떤 상황, 어떤 여건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이 주를 믿는 각 사람에게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딸이 된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갈 줄 알아야만 한다. 그러므로“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는 로마서 8장 24절 말씀처럼 성도인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소망하며 사는 정도의 인생이 절대로 아니어야 한다. “바라고 원하고 기도합니다.”라고 찬송하는데 “요즘 무엇을 바라고 원하고 기도하며 소망하며 사십니까”성도인 우리의 소망은 당장 눈에 보이는 소망 정도를 소망하는 것에 매여 있으면 안된다. 우리의 소망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소망이어야 한다. 그 소망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할 줄 아는 소망이어야 한다. 

 

<웨스트민스터소요리문답>에 보면 첫 질문은“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이다. 그 대답은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이다. 

 

여기서 사용한 ‘즐거워 한다’는 뜻 중에는 ‘영광스럽게 여긴다’ 혹은 ‘자랑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로마서 2장 17절에 보면 ‘하나님을 자랑하며’라는 표현이 나온다. 어린아이들은 엄마 아빠를 자랑스러워한다. 어린 아들딸들은 아빠가 자기를 어깨 위에 태워 주기만 해도 아빠를 엄청나게 자랑스러워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어저께 전도 현장에서 4살 정도 귀여운 사내아이를 만났다. 엄마 아빠는 저만치 뒤에서 걸어 오는데 앞에서 손잡이가 있는 킥보드를 탄 사내 어린이가 내게로 쏜살같이 다가왔다. 잠시 후 엄마 아빠가 가까이 도착했다. 그 꼬마는 나를 향하여 자기 엄마 아빠가 지켜 보고 있는 가운데 “아저씨가 예수님이에요. 아저씨가 십자가에 죽었어요.”라고 중얼거렸다.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젊은 아빠가 나서서 “으응 아저씨는 예수님을 소개하는 거야. 아저씨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전하는거야”하고 설명해 주면서 아들의 손을 잡고 눈인사를 꾸뻑하면서 현장에서 멀어져 갔다. 아마도 그 어린 사내아이는 엄마 아빠와 늘 교회에 다니고 예배를 드려왔기 때문에 그동안 들은 풍얼을 가지고 무슨 설명을 나름대로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여러분은 어떤가. 나는 어떠냐는 말이다.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교훈하고 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라면,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은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할 줄 알아야 한다”는 강조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상태도 노력이나 의지가 아니라 누름 그 자체여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상태도 의지와 노력의 차원이 아니라 마냥 즐거워하는 그 즐거움의 상태 자체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은혜를 사모하는 각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소망 중에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자.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끊임이 없는 환난이 있다. 바닷가에 가 보면 파도가 밤낮없이 계속하여 치는 것처럼 이 세상에는 크고 작은 환난이 계속된다. 이는 개인, 가족, 직장, 사업체, 사회, 나라, 민족 간에 끊임이 없다. 환난(患難)이란 ‘들립시스’는 “괴롭히다 에워싸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는 마음에 겪는 고통이나 괴뇌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 겪는 질병이나 고통이나 핍박도 포함하는 말이다. 자신에게 물어 보라. “예수를 믿으면 만사형통한가”아니다. 우리는 만사형통하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게 아니다. 마태복음 10장 22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택하신 12제자에게 하신 말씀이다. 우리가 세상을 대강 대강 타협하며 살아간다면 몰라도 예수의 부르심에 합당한 제자다운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면 할수록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다시 제자들에게“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라고 교훈하셨다. 

 

성도인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하였다. 이 소망은 성도인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한다. <공동번역>, <새 번역성경>에서는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현대인의 번역 성경>에서는 “이 희망은 우리에게 실망을 주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렇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고 잘 참고 견디며 연단을 감내하는 이유는 때가 되면 소망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 소망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각 사람에게 부어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물 붓듯이 부어 주시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는 ‘말미암아’라는 표현이 세 차례 반복되었다. 1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2절에 “또한 그로 말미암아”, 5절에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라고 하였다. 그렇다. 신앙생활이란 ‘말미암아’의 신앙이다. ‘말미암아’라는 이 단어는 열쇠와 같은 것이다. 열쇠가 없이는 잠긴 상태를 열 수 없다. 열쇠가 있어야 잠긴 문을 열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열쇠와 같고 문과 같은 분이시다. 6-8절은 우리 마음에 물 붓듯이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사랑인가를 설명해 준 것이다. 

 

우리는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있는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기억한다. “그러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된 일상을 살아가는 나에게 과연 성령의 열매가 어떻게 맺히는 삶을 살아 가고 있는가”를 확증하여야 할 것이다. 

 

사랑/희락/화평/오래참음/자비/양선/온유/절제

 

이러한 성령의 열매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가 더불어 우리 마음 속에 물 붓듯이 부어져야 한다는 요구이다. 이것이 구원의 상태이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 진리를 깨닫기 이전의 상태를 언급하는 표현이 몇 번 이어진다. 6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경건하지 않은 자”라고 했다. 8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라고 하였다. 맞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김을 받고 믿음으로 구원의 진리를 깨닫기 전에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성령의 임재 밖에 있던 연약한 자요 경건하지 않은 자요 죄인이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확증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소망 중에 하나님의 그 크신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아 알고 믿고 살아가는 것이 성도된 우리 각 사람의 특권이며 혜택이며 자랑인 것이다. 

 

우리가 손양원(1902-1950) 목사님 이야길 자주 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아무나 그 분처럼 할 수 있겠는가. 손양원 목사님은 공산당에 의해서 두 아들을 잃었다. 그런데 자기 두 아들을 죽인 그 공산당 청년을 양자로 삼았다. 그 분이 목사이니까 그렇게 한 것인가. “목사이니까 그래야 한다는 평가를 후대에 듣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인가” 아니다. 한국 기독교 역사 중에 손양원이란 한 그리스도인에게 그런 하나님의 확증한 사랑이 그의 마음 속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손양원은 장로인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 자라났다. 경상남도 함안 출생이다. 13살때에 보통학교 학생인데 궁성요배를 거절하여 퇴학을 당했다. 그 나이때에 이미 분명한 자기 신앙이 있었다. 선교사 맥레이(Macrae, L.)의 항의로 복교되었다.  아버지는 3·1운동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마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학업을 중단한 후 19살 때에 일본으로 건너가 스가모 중학교(巢鴨中學校)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경남성경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여러 곳에서 전도사로 사역하였다. 초량교회의 목사 주기철(朱基徹)과 친교를 맺기도 하였다. 여수의 나병환자 요양원인 애양원(愛養院)의 교회에서 섬긴 것은 잘 알려 져 있다. 그 당시에도 여전히 신사참배의 강요를 거부하다가 1940년 체포되었고 광복이 되어서야 겨우 살아남아 옥에서 풀려 났다. 그 뒤 애양원교회에서 다시 일하다가 45살 때인 해방 다음 해인 1946년에야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런데 1948년 10월 여수·순천반란사건 당시 두 아들이 공산당 청년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계엄군에 의하여 공산당원 안재선이 체포되어 처형되려는 순간에 구명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렇게 해서 두 아들을 죽인 공산당원 안재선을 양자로 맞아 들인 것이다. 2년 후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손양원 목사는 공산군에 체포되어 미평에서 그들의 총탄을 맞고 순교하였다.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초월적이고 자발적이고 영원한 십자가 사랑을 말씀하는 것이다. 6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말하고 있다. 7절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의인을 위한 죽음이나 선인을 위한 차원의 죽음이 아니라 죄인인 천하만민을 구원하기 위한 사랑의 죽음이었음을 선포하고 있다. 8절은 하나님이 확증하신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가치에 대하여 선포하고 있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이를 통해 확증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설명으로 설명될 수 있는 차원의 사랑이 아니다. 이는 아들 예수의 몸을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 준바 되었고 삼일 만에 부활하게 하심으로 영원히 확증하신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 그것을 대신 할 수 있는 것인 이 세상에 그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그 사랑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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