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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백성아 들으라(시50:7-15) 2023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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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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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6-12 10:22 조회 923 댓글 0
 

                           내 백성아 들으라(시50:7-15)               2023. 6. 11

 

 

오늘 읽은 본문의 시작인 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말하리라.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내 백성아”라고 부르시면서 “들을지어다”라고 명령하고 계시다.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시는 걸까.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아브람을 선택하셨다. 그리고 그에게 거창한 복을 약속하셨다. 우리가 아는 창세기 12장 서두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스라엘 백성이란 사천년전에 부름받은 한 사람 아브람의 후손을 일컫는 말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람과 그의 후손에게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의 삶을 살기를 기대하고 언약하셨다. 

 

시편 50편은 아삽의 시이다. 아삽은 다윗 때의 성가대 지휘자이다. 오늘 날 우리나라에 국립합창단이 있는 것처럼 그 당시 다윗 왕정의 중심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국가적인 성가대가 운영되었다. 아삽은 레위인이었다. 요즘 40대 중반의 젊은 목사 손정민이 쓴 가사에 곡이 붙여져서 수 많은 찬양으로 불리는 것처럼 그 당시 아삽은 이와 같은 수려한 고백이 담긴 가사를 썼다. 

 

1-6절은 우주만물을 통치하시고 심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고 있다. 1절이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라는 표현이 평범한 표현인 것 같으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 공간에 뜨고 지는 태양의 움직임 가운데 하루가 시작되고 하루가 기울어가는 시간의 흐름과 역사의 순환이 느껴지지 않나. 지구도 크지만 우주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요즘 캐나다 동부의 산불은 우리나라 면적의 삼분의 일 정도를 불태웠다고 한다. 계속하여 불길이 번져 가고 있다. 뉴욕은 물론이고 워싱턴DC의 하늘까지 그 연기가 날아가고 있다. 유럽 하늘에 까지 캐나다의 불길로 인한 연기가 뒤 덥고 있다고 한다. 두렵지 않나. 무서운 생각이 들지 않나. 3절에 보면 하나님 앞에는‘삼키는 불과 광풍’이 있다고 했다. 

 

5절에 보니까 하나님은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고 명령하고 계시다.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하나님을 믿는 백성인 성도들을 주 앞으로 모으라고 명령하시는걸까. 하나님은 계속하여 말씀하고 계시다.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그러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무슨 말씀을 들으라고 하시는걸까.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의 하나님이신 것을 듣고 알고 깨닫고 믿고 따르고 순종하라는 초청이시다. 이게 무슨 말씀인가. 출애굽기 20장 2절에 보면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고 하셨다. 이것이 십계명에 첫 계명이다. 오늘 본문 7절의 이 말씀의 가치를 이해하려면 출애굽기 3장 14절을 다시 묵상해야만 한다. 모세가 팔십살이던 해의 그 어느날 그는 여느 날처럼 한결같이 늘 하는 목축을 위해서 호렙산 허리에 머물고 있었다. 모세는 그 나이까지 장인 미디안 사람 이드로의 양떼를 치고 있었다. 여호와의 사자인 천사가 떨기 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모세에게 나타났다. 신비한 장면이다. 모세는 궁금해서 떨기 나무 가까이 다가가려 하였다. 왜냐하면 떨기 나무의 한 가운데서 불이 붙는데 나무는 타지 않는 신비한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에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모세야 모세야”하고 두 번 그의 이름을 부르셨다. 모세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고 대답했다. 

 

그 날 거기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서 동족을 구원하라”고 명령하셨다. 그 때에 모세는“내가 동족인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고 말하면 그들이 나에게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을텐데 그럼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대답할까요”라고 하나님께 질문하였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대답해 주셨다. 여기 “스스로 있는 자”라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설명하신 이 표현이 심오한 표현이다. 한자로 말하면 ‘자존자’(自存者)라는 뜻이다. 영어 성경에 보면 “I am who I am”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피조세계와 상관 없이 완전히 독립적이고 초월적이고 영원한 존재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피조물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우주만물보다 먼저 계신 창조의 주인이시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해와 달과 별들과 이 땅의 만물을 창조하셨다. 우리는 그 분을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그 분에게 예배하고 그 분에게 기도하고 그 분에게 찬송을 올려 드린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지으셨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시다. 우상 숭배와 타락한 생활에 빠져 있으면서도 회개할 줄도 모르고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도 않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심히 분노하셨다. 21절에 보면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라고 책망하고 계시다. 16절 이하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례를 전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입에 두고 살면서도 정작은 하나님의 교훈을 미워하였다.” 17절에 보면 “내 말을 네 뒤로 던졌다”라고 지적하셨다. 도둑과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와 동료가 되고 입을 악에게 내어 주고 혀로 거짓을 꾸민다고 책망하고 계시다. “둘러 앉아서 형제를 공박하고 어머니의 아들을 비방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계시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엄히 경고하셨다.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내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시50:21) 하나님은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고“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며 이처럼 낱낱이 하나님의 백성의 죄악성을 지적하며 책망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강조하셨다.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라”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사랑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 진리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 악을 미워하고 선을 행하는 자를 주목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참회하고 하나님을 믿고 경배하는 백성다운 삶을 회복하라고 촉구하시는 말씀이시다. 

 

 

감사(感謝)함으로 네 서원(誓願)을 갚으라.

14절에 보면“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라고 촉구하셨다. 8-13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감사의 마음을 담은 제사이지 수소의 고기나 염소의 피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산과 들과 하늘의 그 많은 짐승들과 가축들과 새들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 왜 하나님이 구태여 “네 집에서 수소나 염소를 가져 가겠느냐”라고 단언하셨다. 생각해 보라. 그렇지 않나. 하나님이 무엇이 아쉬우셔서 나의 집의 소와 양과 염소와 비둘기를 원하시겠는가. 그러므로 번제의 근본 정신은 제물이 아니라 제사드리는 사람의 하나님을 향한 태도이다. 

 

이것을 깨달은 율법학자요 바리새인이었던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1-2절에서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그렇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자의 태도, 하나님이 찾으시는 성도의 삶이란 이런 것이다. 하나님은 나의 시간, 나의 경험, 나의 재능, 나의 재물, 나의 그 무엇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통전적으로 드려진 하나님의 사람답게 세상을 살아가길 원하시는 것이다. 

 

주차장 설교 영상 옆에 몇 주 전부터 네 컷짜리 만화 십여 편을 싣고 있다. 그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나는 목사님 설교를 들은 날은 잠이 잘 오질 않아” “그래? 오늘 은혜를 많이 받았나 보구나” “아니 그게 아니라 설교 시간에 잠을 너무 충분히 자서 그런지 밤이 되도 잠이 오질 않아” 뭐 이런 대화가 이어지는 만화다. 

 

당신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당신에게 있어서 예배란 무엇인가. 당신에게 있어서 주일날은 어떤 날인가. 당신에게 있어서 헌금과 헌신은 어떤 의미인가. 하나님은 자신의 삶을 돌아 보아 회개하고 하나님이 찾으시는 성도가 되고 하나님이 찾으시는 백성이 되길 원하신다. 그러나 만약에 하나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기고 거역하면 21절 후반부에 보니까“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라고 경고하고 계시다. 22절은 더 엄중하게 경고하셨다. 읽기조차 두렵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요즘 새벽 묵상 중인 예레미야애가의 내용을 보라. 어떻게 하다가 유다가 바벨론의 침략으로 폐허가 되었는가. 어떻게 하다가 예루살렘 성이 불 바다가 되었는가 말이다. 신앙 생활이 무엇인가. 5절을 다시 보자. 성도가 누구인가.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하나님의 말씀이시다. 우리 각 사람인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제사로 언약한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소의 고기와 염소의 피에만 관심을 두지 말고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아는 성도다운 성도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하나님은 감사로 드리는 제사를 원하신다. 지존하신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서의 서원을 실천하는 믿음의 사람을 찾으신다. 시편 50편 마지막 절인 23절을 다 같이 읽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50:23)

한 해의 절반이 이렇게 하루 하루 지나가고 있다. 점점 더워 지는 날씨 가운데 몸과 마음이 강건하여 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살아가는 예배자들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환난(患難) 날에 나를 부르라.

기도를 주제로 교훈한 성경 구절들 가운데 우리가 요절처럼 기억하는 말씀이 바로 시편 50편 15절에 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이 세상에 환난이 없는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환난이 없는 때와 날도 없다. 

 

룻기의 초반에는 세 남자와 세 여자 이야기가 나온다. 사사시대 말기의 이야기이다. 베들레헴에 살던 엘리멜렉이 흉년을 피하여 먹고 살기 위해서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모압 나라로 이주하였다. 거기서 살다가 엘리멜렉은 일찍 죽었다. 아내 나오미는 두 아들인 말론과 기룐을 현지 여성과 결혼하게 하였다. 그런데 차례대로 두 아들도 죽고 말았다. 가정에 남자란 남자마다 죽어 떠나는 슬픔이 찾아왔다. 괴롭고 슬프고 외롭고 답답한 처지가 된 환란의 여인 나오미는 홀로 된 두 며느리에게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작은 며느리 오르바는 친정으로 가 버렸다. 시어머니 나오미와 큰 며느리 룻만 남았다. 가난하고 외롭고 슬프고 쓸쓸하였다. 사는게 사는게 아니었다. 그야말로 환란이 겹치고 겹친 것이다. 나오미는 남아 있는 며느리 룻에게 “내 딸아 너도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룻을 달랐다.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1:16-17)

 

시간이 흘러 시어머니 나오미는 마음을 다 잡고 모압의 며느리 룻과 함께 이스라엘 땅 베들레헴에 가서 살기 시작했다. 며느리가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고 남의 들판에 나가서 이삭을 주어다가 떡을 만들어 끼니를 해결했다. 그런데 그 마을의 대 지주 노 총각 보아스가 룻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룻은 보아스의 청혼을 받고 베들레헴 대 지주 보아스의 안방 마님이 되었다. 오벳이란 아들을 낳았다. 나오미가 무릎에서 내려 놓지 않고 키웠다. 마라의 여인이 나오미가 되었다. 쓴 물의 여인이 단물의 여인, 기쁨의 노년기를 살게 되었다. 마을의 여인들이 룻과 나오미를 축복하였다. “여호와께서 오늘 당신에게 기업 무를 자를 주셨군요. 이 아이가 이스라엘에 유명해 지기를 바랍니다.  이 아이가 생명의 회복자가 되고 노년의 봉양자가 될 것입니다. 일곱 아들이 있으셨다 해도 비교할 수 없는 귀한 며느리 룻이 아들을 낳았군요.”그러면서 룻이 보아스에게 낳은 아들의 이름을 동네 여인들이 ‘오벳’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 오벳이 이새를 낳고 이새가 다윗을 낳았다. 룻은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었다. 환난의 날을 뒤로 하고 하나님은 룻과 보아스를 위로 하셨다. ‘오벳’이란 ‘아바드’란 말인데 ‘섬기는 자, 봉사하는 자’란 뜻이다. 실로 오벳의 후손 다윗은 민족을 섬기고 이스라엘을 위대하게 섬기는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환난 중에 탄식하지 말고 기도하자. 기도하면 들으신다.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기도하면 역사가 바뀐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신다. 기도하면 들어 주신다. 기도하면 영화롭고 영광스럽게 하신다. 

 

 

​찬송가 345장을 부르자. 

 

시편 65편을 읽다 보면 다윗의 이런 고백을 만나게 된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65:4)

 

오늘도 주의 전에서 나의 간절한 기도 제목을 주께 아뢰는 백성들마다 주님이 그 형편을 돌아 보아 주시고 감싸시고 힘 주시고 위로하시고 해결해 주시고 새길로 인도해 주실 줄로 믿는다. 

 

예수께서 약속하셨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2)

 

주님은 사도 바울을 통하여 이렇게 약속하고 격려하셨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트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4:8-9)

 

어제 성동광진지방 선교대회의 개회예배 때에 그 지방 감리사의 개회 설교가 먼저 있었다. 르완다 선교사였다. 다취슈르 선교사의 고아원 30여명이었다. 이웃의 한 젊은 여인이 2살짜리 딸을 데리고 유복자를 낳고 죽었다. 고아원에서 챙기게 되었다. 고아원의 루스가 기도했다. “하나님 아기의 분유를 주시고 2살 동생에게 줄 인형을 주세요.” 다음 날 어디선가 택배가 왔다. 이러 저런 구호품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함참을 이것 저것을  꺼내는데 분유통이 나왔다. 그 밑에 예쁜 인형도 있었다. 루스는 너무 기뻐하고 행복해 하였다. 하나님이 자기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고 좋아 했다. 하나님은 환난 당한 자의 기도를 들으신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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