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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이르시되(마17:1-9) 2023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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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2-19 22:51 조회 1,466 댓글 0
 

                            주께서 이르시되(마17:1-9)                2023. 2. 19

 

 

교회력으로는 오늘이 ‘변화 주일’이다. 변화 주일이란 예수께서 변화산 위에서 변형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이다. 오늘 본문인 17장 1절은 ‘엿새 후에’라고 했다. 무슨 일이 있은지 엿새 후란 말씀인가. 마태복음 16장 21절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장차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 만에 살아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이것을 ‘예수의 첫 번째 수난 예고’라고 한다. 장차 당하실 고난과 죽음과 이룩하실 부활에 대하여 처음으로 말씀하신 내용이다. 

 

그 날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항변했다. “주님, 그럴 수 없습니다.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그 날 그 때에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심하게 책망하셨다. “사탄아, 썩 물러가거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이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다.”그리고 제자들에게도 이런 말씀을 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자기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생명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사람이 자기 생명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내가 천사들과 함께 아버지의 영광으로 올 것이다. 그때 내가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 주겠다.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여기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죽기 전에 내가 하늘나라의 왕으로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마16:24-28, 현대인의 성경)

 

이런 일이 있었던 그 엿새 후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이 세 제자만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 성경 학자들은‘헐몬산’이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헐몬산은 해발 2,800여 미터 높이의 참으로 높은 산이다. 산에 올라 가신 예수께서는 그 날 세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변형되셨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다. 그는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고 탄생되었으나 예수는 사람이며 곧 하나님이시다. 예수의 변화 산 위에서의 변형이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성의 차원에서 해석해야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부활 이후의 승천도 인간적인 면에서는 쉽게 이해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비에 속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비가 내포되어 있다. 예수의 이런 면을 요한은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라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교훈해 주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맞다. 예수는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셨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요한복음 1장 2절의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라는 말씀이 그런 의미이다. 

 

하나님이시며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활동하시던 중에 어느 날 변화산 위에서 세 제자가 보는 앞에서 변형되신 것이다. 예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났다. 입으신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 그 곁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대화하는 장면이 목격되었다. 감격한 베드로는 세 초막을 짓겠다는 제안을 하였다. 그 순간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구름 위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빛난 구름이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다. 

 

열왕기상 8장에 보면 솔로몬의 때에 예루살렘 성전을 완공 한 후에 성전 안으로 여호와의 법궤를 옮기는 장면이 나온다. 지성소에 여호와의 법궤를 모시고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성전이 가득하매”(왕상 8:10)라고 하였다. 그 다음 절인 열왕기상 8장 11절에 보면 설명이 나온다.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함이었더라.”라고 하였다. 이처럼 구름이란 여호와의 영광스러운 임재의 상징이다. 

 

출애굽기 19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 출애굽한 지 세 달이 지났다. 그들이 시내 광야에 도착하였다.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온 백성들이 장막을 쳤다. 모세는 시내 산에 올랐다. 하나님은 산 꼭대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19:4-6)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이틀 동안 온 백성들은 옷을 빨고 여인을 멀리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게 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렇게 준비하면 셋째 날에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이 시내 산에 강림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드디어 하나님이 약속하신 셋째 날이 다가 왔다. 출애굽기 19장 16절은 그 날의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셋째 날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강림과 임재의 장면을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라고 설명해 주고 있다. 신비한 광경이 아닌가. 이처럼 성경 신구약은 여러 곳에서 구름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에 대하여 기록해 주고 있다.

 

자, 그러면 빛난 구름 가운데 하나님은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이 시간 하나님이 말씀하신 내용을 묵상하며 은혜를 나누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이런 말씀의 내용을 대하면 언제 장면이 생각나는가. 하나님은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던 그날도 이와 똑같은 말씀을 하셨다. 마태복음 3장 17절에 보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는 말씀을 하셨다. 시편 2편 7절에 보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는 말씀이 있다. 아들이 누군가. 세상 사람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들을 낳기 위해서 새 부인이라도 맞아들이려고 한다. 요즘은 좀 문화가 달라지긴 했지만 과거에는 아들을 낳지 못하면 며느리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래서 어떤 가정에서는 딸의 이름을 ‘득남’이라고 지은 집도 보았다. 득남 즉 아들을 얻었다는 이름을 딸에게 붙여서 다음에는 꼭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이름 지어 부르는 집도 있었다. 반드시 다음에는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해서 ‘필남’이라고 하는 집도 보았다. 

 

요즘 사무엘 상을 묵상하고 있다. 사무엘 상의 시작이 무엇인가. 자식이 없던 한나가 실로의 성막에 갈 때마다 하나님께 아들 낳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간구해서 아들을 낳게 되었다. 그 아들이 이름이 사무엘이다. 젖 떼기가 무섭게 아들 사무엘을 성막에서 자라나게 하였다. 얼마나 보고 싶었을텐데 꾹꾹 참으며 키웠다. 나실인으로 자라나길 기도했다. 그 아들이 자라나서 우리가 아는 이스라엘 역사의 사무엘이 되었다. 한나에게 있어서 얼마나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아들인가. 아들 딸이 다 귀하지만 아들이란 존재는 그런 것이다. 

 

예수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났고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품 안에서, 요셉의 무릎 위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그는 곧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하나님께 사랑받는 아들이셨다. 요즘 아들딸을 학대하고 자식을 학대하는 못된 애비 못된 에미 이야기가 가끔 씩 뉴스에 나온다. 그러나 정상적인 가정의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한다. 끔찍이 사랑한다. 왜냐하면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이니까. 

 

우리가 아는 인천 상륙 작전의 영웅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 장군은 첫 번째 부인과는 결혼 생활 7년 후에 자녀 없이 헤어졌다. 8년간 홀로 지내던 중에 57살 때인 1937년, 재혼한 제인 페어클로스Jean Faircloth와의 사이에 외아들을 낳았다. 그의 아들 아서 맥아더 4세(Arthur MacArthur IV)는 음악을 좋아했고 뉴욕에서 색소폰 연주가로 활동하였다. 아들은 세상이 다 아는 유명한 아버지 맥아더의 그늘을 벗어나 평범하게 살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더글라스 맥아더는‘아들을 끔직이 위하는 아빠’(doting father)였다. 

 

그는 태평양전쟁 초기에 ‘A Fathers Prayer’(아버지의 기도)를 썼다. 이 기도문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가르친 지혜가 담겨 있다. 맥아더는 가족이 자신을 군인이 아니라 기도하는 아버지로 기억하기를 늘 바랐다. 

 

내게 이런 자녀를 주옵소서.

약할 때에 자기를 돌아볼 줄 아는 여유와

두려울 때에 자신을 잃지 않는 대담성을 가지고

정직한 패배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태연하며, 

승리에 겸손하고 온유한 자녀를 내게 주옵소서!

 

생각할 때에 고집하지 않게 하시고,

주를 알고 자신을 아는 것이 지식의 기초임을 아는 자녀를

내게 허락하옵소서!

 

원하옵나니,

그를 평탄하고 안이한 길로 인도하지 마시옵고

고난과 도전에 직면하여 분투 항거할 줄 알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폭풍우 속에선 용감하게 싸울 줄 알고,

패자를 관용할 줄 알도록 가르쳐 주옵소서

그 마음이 깨끗한 그 목표가 높은 자녀를!

 

남을 정복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자녀를,

장래를 바라봄과 동시에 지난 날을 잊지 않는 자녀를 내게 주옵소서!

 

이런 것들을 허락하신 다음 이에 대하여

내 아들에게 유머를 알게 하시고 생을 엄숙하게 살아감과 동시에

생을 즐길 줄 알게 하옵소서!

 

자기 자신에게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게 하시고 

겸허한 마음을 갖게 하시어 참된 위대성은 소박함에 있음을 알게 하시고

참된 지혜는 열린 마음에 있으며,

참된 힘은 온유함에 있음을 명심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나 아버지는 어느 날 내 인생을 헛되이 살지 않았노라고 

나직히 감히 말하겠나이다!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큰 사랑을 받으셨듯이 이 땅의 모든 아들딸들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이 세상의 소외된 가정, 결손 가정, 홀부모 가정, 친가나 외가의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손에 맡겨져서 자라나는 어린이들일지라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받는 자녀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고아원과 탁아 시설에서 자라나는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라나기를 기도한다. 전쟁과 지진을 비롯한 재난 가운데 난민으로 지내야 하는 어린이들이 누군가의 보호와 사랑 가운데 자라나길 기도하자. 이 땅에 학대 받거나 방치된 어린이가 없는 세상이 되도록 주변을 돌아 보며 아름다운 세상을 가꾸어 가자. 이것이 예수를 향하여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라고 말씀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기대이시다. 

 

 

내 기뻐하는 자니.

성경에 기록된 인물들은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한 부류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부류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 이들이다. 가령 에서와 야곱은 이삭이 아내 리브가를 통해서 낳은 쌍둥이였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생으로 살았지만 형 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에서는 그의 어머니 아버지에게도 근심거리였다. 창세기 26장 35절에 보면 “에서는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에서가 사십 살에 헷 족속의 딸들 중에서 두 여인을 동시에 아내로 맞이한 사건 때문이었다. 

 

예수의 제자들 중에 베드로도 주님을 배반했고 가롯 유다도 주님을 배반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회개하고 주께 돌아와 성령 충만을 받은 초대교회의 훌륭한 전도자요 순교자의 생을 살았다. 그러나 가롯 유다는 회개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불행한 길로 가고 말았다. 베드로는 주님의 기쁨이 되는 생을 살았고 가롯 유다는 예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떠나가 버렸다. 

 

어찌 보면 사랑받는 것도 선택이다. 나를 자녀로 택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고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믿음의 사람답게 살아가자. 우리는 오늘, 지금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게 질문해 보아야 한다. “나는 요즘, 나는 지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라고 말이다. 예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들이었다. 예수는 고난의 길을 가고 있고 십자가의 죽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출입과 범사는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이었다.

 

“나 주님의 기쁨되기 원하네”라는 찬양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만한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자.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를 찬양하자.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새 부대가 되게 하여 주사 주님의 빛 비추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겸손히 내 마음 드립니다 나의 모든 것 받으소서

나의 맘 깨끗게 씻어 주사 주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만한 삶을 살아가고 주변 사람들이 기뻐할만한 이웃으로 살아가자. 가족들이 기뻐할만한 가족 구성원 중의 한 사람답게 살아가자.

 

 

부활 이전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베드로는 너무나도 예수의 변형에 감격한 나머지 초막 셋을 지어서 예수와 모세와 엘리야을 위해서 바치겠다고 말했다. 모세는 누구이며 엘리야는 누구인가. 율법의 상징이 모세이고 선지자의 상징적인 인물이 엘리야가 아닌가. 그런데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었고 그 빛난 구름 사이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 왔다. 그 중의 하나가 무엇인가.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라는 것이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땅에 엎드려 심히 두려워했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 곁에 다가가셔서 손을 대시며 말씀하셨다.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그 순간에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니 모세와 엘리야는 보이지 않았고 오직 예수만 보였다. 무슨 말씀인가. 오직 예수면 족하다는 것이다. 모세나 엘리야를 통해서 주셨던 그 많은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이 오직 예수 안에서 통일되고 오직 예수 안에서 온전케 되리라는 교훈을 말씀하시는 장면인 것이다. 산에서 내려 올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마17:9)

 

예수께서 함구령(緘口令)을 내리신 것이다. 예수께서 함구령을 내리신 이유 중의 하나는 예수의 변화 체험 현장이 세상에 소문이 나면 이스라엘의 통일과 주권 회복을 소망하는 백성들 가운데 소요가 일어날 것을 염려하셨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한가지는 예수의 변화 체험이 정치지도자들에게 소문이 나면 그 어떤 죄목을 씌워서 예수와 제자들을 박해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예수께서는 여러 차례 함구령을 내리신 적이 있으셨다. 마태복음 8장 4절에 보면 나병 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그를 고치신 후에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라고 하셨다. 마태복음 9장 30절에 보면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 지르는 두 맹인을 고쳐 주신 후에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라고 하셨다. 마태복음 12장 16절에 보면 한쪽 손이 마른 환자를 안식일에 고치셨다. 그 외에도 예수께 나아오는 여러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그리고는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라고 경고하셨다. 마태복음 16장 20절에 보면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라고 제자들에게 경고하셨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장차 때가 되면 예수가 누구신지를 세상이 알아볼 날이 다가올 것을 아셨고 미리 너무 소문을 내지 말라고 경고하셨던 것이다. 예수의 변형은 하나님의 아들의 신비를 세상에 드러낸 표징이 되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현장의 목격자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소문 내지 말라고 경고하셨다.

 

예수께서는 이런 날들을 시작으로 그에게 옥죄어 오는 가진 온갖 시기와 모함과 배척과 핍박 가운데서도 구원을 온전히 이룩할 그 날의 그 순간을 향하여 굳굳하게 참고 견디며 이겨 나가셨다.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로마의 백부장과 예수의 십자가에서 숨을 거둔 현장을 지키던 로마 병사들은 심히 두려워 하며 이렇게 외쳤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27:54)

 

이제 며칠 후면 시작될 사순절 기간 동안에 주님의 말씀과 행적을 묵상해 가는 중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지며 그 교훈이 깨달아지는 나날이 되길 바란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기사와 이적과 그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날들이 우리 각 사람에게 교훈하는 절기의 가르침을 깊이 깨닫는 은혜의 나날이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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