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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어느 한 사도의 권면(롬12:9-13)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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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1-08-27 23:40 조회 18,409 댓글 0
 
친구 목사가 간에 직경 1.5 센티미터의 암이 발견되어서 암과 함께 간을 거의 다 절개하여 내고 아들의 간을 이식받는 대 수술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지난주에 계획했던 수술이 미루어지고 말았다. 사연인 즉은 25살 난 아들이 아버지에게 간을 이식해 드리기 위해서 함께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심리적인 불안정으로 설사를 계속하고 몸에 열이 몹시 나서 보름 후로 수술 계획이 미루어졌다고 한다. 아들은 간 전체의 30%만 남기고 70%크기의 간을 잘라서 아버지에게 드리는 수술이라고 한다. 인체의 신비가 참으로 놀랍고 하나님의 창조 섭리가 참으로 신기하다. 그렇게 많은 분량의 간을 잘라서 누구를 주더라도 건강한 사람은 2개월 정도가 지나면 전체 간의 80% 정도가 정상적으로 회복되어 다시 자라난다고 한다. 간이식수술은 1963년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국내에서는 1988년 처음으로 시행되었다. 1980년대 이후 효과적이고 안전한 면역억제제의 개발과 다양한 기술의 발달 등에 힘입어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어서 요즘은 대개가 성공적으로 수술이 이루어지고 있다. 성인은 말기 간경화증이나 간암의 경우에 그리고 소아는 선천성 간경화나 담도폐쇄증이나 대사성 간부전 환자들이 수술 대상이 된다. 아무리 수술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왔다고 할지라도 수술은 수술이다. 간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나 그 간을 이식 받는 환자나 심리적으로 부담이 되기는 누구나 다 마찬가지이다. 간을 누구에겐가 이식해 준다는 말은 무엇인가. 사랑을 주는 것이요 생명을 주는 것이다.

미국 알칸소 주에 사는 시각 장애인인 어머니가 있다.  그의 아들 크리스토퍼 군은 기회가 될 때마다 어머니의 눈이 되어 주던 아들이었다. 그런데 그만 15살 때에 교통사고를 당하여 하늘나라로 갔다. 홀로 살던 어머니의 슬픔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었다. 교통사고로 숨진 아들의 시체를 검진한 담당 의사는 아들의 시신경이 손상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는 어머니에게 아들의 눈을 이식할 것을 권했다. “아마도 효자로 살던 아들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일지도 모릅니다.” 의사의 이런 강력한 권면을 받아 들여서 어머니는 아들의 눈을 이식 받고 광명을 보게 되었다. 눈을 떠서 세상을 보게 된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아들 크리스토퍼는 평소에 늘 자신은 어머니의 눈이 되어 드리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말하고는 했는데 자신의 눈을 나에게 주고 하늘나라고 가다니 믿어지지 않는다.”고 설명하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오늘 본문인 로마서 12장은 그리스도인 된 성도들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할지에 대하여 교훈하는 말씀들로 가득하다. 성도는 세상을 본받지 말고 자신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한다는 거룩한 선언이 있는 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곧 이어서 성도의 은사 생활에 대한 교훈이 나오고 본문에서 구체적인 생활 강령을 권면하고 있다. 다메섹 노상에서의 부르심을 체험한 이후로 평생을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는 성숙한 기독신자의 길을 걸었던 사도 바울의 마음을 담은 권면이 구구절절이 이어진다.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가라는 말씀인가.

사랑의 실천이다.

요즘은 다분히 사랑이 상업화 되고 퇴색되고 본질에서 멀리 떠나 있다. 결혼조차도 흥정하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다. 신부의 경우에는 재산 많은 가정의 외아들을 선호한다고 한다. 시 부모가 연금을 안정되게 받아 생활할 수 있는 가정이어서 결혼 후에도 시부모를 경제적으로 모실 부담에서 벗어 날 수 있는 신랑감을 골라서 만나려고 한다고 한다. 세상은 점점 이기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사랑의 타락과 변질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담의 가정에 태어난 두 형제인 가인과 아벨이 함께 하나님께 제사 드린 후에 제사의 응답을 받지 못한 한 풀이로 동생을 죽인 가인의 이야기는 창세기의 유명한 이야기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최초의 가정이 아담의 가정에 이 같이 사랑이 식어 버린 끔찍한 범죄 사건이 일어난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사랑의 본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다.

9절과 10절에서 말씀하는 사랑의 실천 강령을 보라.

거짓이 없는 사랑
악을 미워하는 사랑
선에 속한 사랑
형제를 사랑하는 사랑
서로 우애 있는 사랑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 하는 사랑

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자세한가.

‘거짓이 없는 사랑’이 무엇인가. 진실한 사랑인 것이다. 여기서 사용된 표현은 연극  배우가 연극으로 표현하는 형식적인 사랑, 가식적인 사랑, 위선적이고 외식적인 사랑을 해서는 안 된다는 강조이다.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의 사랑에 비교해서 위선적인 가증한 사랑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성도의 사랑이 순수하고 순결하고 마음이 담긴 진실한 사랑이어야 한다면 세상의 많은 사랑은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사랑에 병들어 가고 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그렇다. 하나님께서 아들 독생 성자를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서 이 땅에 보내주신 그 사랑은 그 무슨 말로도 다 설명할 수 없는 지고지순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절정이다. 거기서 시작해서 골고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이어지고 부활하신 사랑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전 생애는 한 마디로 거짓이 없는 사랑인 것이다. 9절과 10절은 ‘거짓이 없는 사랑’에 대한 설명이라고 할 것이다. 14절의 강조도 마찬가지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는 말씀은 거짓이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진실하게 사랑해 주라는 선언이다. 이 어찌 쉬운 말인가.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격하며 살아간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로마서 구석구석에서 그런 마음을 찾아 볼 수 있다. 로마서 5장 5절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라고 했다. 5장 8절에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다. 로마서 8장 35절에서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고 선언한 후에 39절에 가서,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을 늘 구체적으로 체험하며 산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로마서 15장 30절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 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달라고 부탁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바울은 매사에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성령의 사랑을 의지하며 기도하며 살아갔던 사랑의 사도였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고 권면하였다. 악에 가담하지 말고 선에 속한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다. 바울의 표현은 대단히 심오하고 구체적이다. 악을 미워하되 그냥 막연하게 마음속으로 미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겉으로 악에 대한 미움과 증오심을 표현하여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그 악으로부터 벗어나라는 강조이다. 속으로 우물쭈물하면서 악에 대하여 주저하지 말고 겉으로 악에 대한 반감과 못 마땅한 것을 표현하여 물리치라는 강조이다. 악에 대하여 소극적으로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악을 적극적으로 증오하고 미워하고 완전히 벗어나는 노력을 보이라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 얼마나 독사의 소굴처럼 우글거리는 악이 있는가. 그 악에 대하여 적극적인 태도와 마음가짐으로 반응하라는 말이다. 그것이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는 길이다. 찰스 콜슨의 책, <순전한 믿음>의 겉표지에는 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의 모습을 그린 성화가 있다. 여러 마리의 굶주린 사자 떼가 깊은 구덩이에 던지어진 다니엘의 주변을 맴돌고 있고 다니엘은 빛이 내려 비추이는 저 높은 곳의 창문을 바라다보면서 의연한 태도로 뒷짐을 쥐고 있다.

다니엘이 누구인가. 느브갓네살 왕과 그 주변의 악한 고관대작들 앞에서 한발치의 양보도 없이 하나님 신앙을 굳게 지켜 나가던 바벨론의 총리가 된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가. 세월은 흐르고 흘러서 벨사살 왕의 때를 거치고 메대 나라가 세워지면서 다리오 왕이 62살에 왕이 되었다. 하나님을 모르고 믿지도 않던 다리오 왕 조차도 다니엘이 사자 굴에 던져지게 된 상황을 너무나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당시의 메대 나라는 120명의 고관 위에 세 명의 총리를 세워서 전국을 통치하고 있었는데 그 중의 한 인물이 다니엘이었다. 결국 총리와 고관들의 시기 질투에 밀려서 사자 굴에 던져지게 된 다니엘의 죽음을 다리오 왕 조차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명령을 어길 수 없어 다니엘을 사자 굴에 던져 처형하게 된 다리오 왕의 마지막 말이 의미심장하다. “네가 항상 섬기는 너의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단6:16) 결국 다니엘을 던져 넣은 사자 굴의 입구는 큰 돌로 막고 임금과 귀족들의 도장을 찍어 인봉해 놓았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왕궁으로 돌아온 임금 다리오는 밤새도록 잠도 자지 않고 먹지도 않고 금식하면서 오락을 금하고 숙연하게 그 밤을 보내었다. 이튼 날 새벽같이 일어난 다리오 왕은 다니엘을 던져 넣은 사자 굴 앞으로 달려갔다. 다나엘이 사자에게 뜯겨 죽지 않고 멀쩡하게 살아 있는 것을 보고 다리오 왕은 깜짝 놀랐다.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는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리지 않고 죽음이 올지라도 하나님의 사랑 거역하지 않고 살겠다는 다니엘과 같은 고백의 삶이 아닌가.

사도 바울은 좀 더 구체적으로 그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언급한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며”라고 했다. 이에 무슨 설명이 필요할 것인가. 이것이 주님이 기대하시는 사랑이다.

근면한 생활을 하여야 한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고 했다. 그렇다. 성도는 부지런한 생활을 하여야 한다. 게으른 것은 죄다. 잠언 12장 24절에,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고 했다. 또, “게으른 자는 그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아니하나니 사람의 부귀는 부지런한 것이니라”(잠12:27)고도 했다.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나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잠13:4)고 했다.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 울타리 같으나 징직한 자의 길은 대로니라”(잠15:19)고도 했다. 더 재미있는 표현이 잠언 19장 24절에 나온다. “게으른 자는 자기의 손을 그릇에 넣고서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 이 말씀은 잠언 26장 15절에 반복하여 나온다. 잠언 21장 5절에 보면,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라고 했다.

20년 전에 부목사 시절에 강남구 신사동의 어느 가정에 심방을 갔더니 개인 주택 응접실에 ‘근자치인’(勤者治人)이라고 쓴 붓글씨 현액을 본 기억이 난다. “부지런한 사람은 남을 다스리는 지도자가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 한때 아침 형 인간 혹은 새벽 형 인간이라는 말이 유행 했듯이 부지런하면 성공하고 부지런하면 승리하는 생을 살 수 있다. 물론 부지런하다는 의미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떤 경우에는 밤을 새워 가며 공부하거나 연구하거나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작곡을 하거나 장사를 하거나 일하고 해가 뜨기 시작하는 아침 시간에 잠자리에 드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낮에 일하느냐 밤에 일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부지런 하냐, 게으르냐, 열심히 있느냐, 무관심하냐의 질문 앞에 대답할 자기 답변이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예수를 믿고 주를 섬기는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부지런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란 별로 없다.

여기서 바울 사도가 강조하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그 다른 무엇 말고 주님을 섬기는 일에 부지런하냐를 묻고 있다. 신앙생활에도 부지런함이 있어야 한다. 부지런함이란 다른 말로 하면 성실한 것을 말한다. 주를 믿는 성도라면 날마다 일정한 분량의 음식을 끼니마다 먹듯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생활에 적용하는 생활을 성실하게 하여야만 한다. 그것이 곧 말씀에 대한 부지런함이다. 기도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늘 자기 생활 중의 일정한 시간과 장소를 구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영적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자기 관리를 하여야만 한다. 그것이 주의 일에 부지런한 성도의 모습이다. 전도 생활, 봉사 생활, 구제하고 돌보고 섬기고 나누고 주변을 돌아보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살펴보며 살아가는 생활이야 말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않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는 생활이다. 그 곳이 학교이든 직장이든 사업의 어느 현장이든지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주를 섬기는 마음으로 누군가를 섬기는 생활 말이다. 예수께서는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한 것이 곳 주께 한 것이고 칭찬하였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의 교훈이 바로 그것이다.

한 주간 동안 세상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부지런히 사업도 하고 장사도 하고 직장 생활도 하고 그래서 깨끗한 돈도 많이 벌고 주님의 거룩한 사업을 위하여 아름답게 헌신 할 수 있다면 그것도 열심을 품고 부지런히 주를 섬기는 생활 모습 중의 하나이다.

여기서 말씀하는 부지런함이란 자기 자신 만을 위한 이기적인 생활에서 누군가 무엇인가를 위한 이타적이고 남을 위한 삶을 살 줄 아는 사람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는 말씀이 무엇인가. 이와 같은 주의 말씀에 순종해서 세계의 오대양 육대주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며 자원하고 누군가를 섬기고 돌보며 가난과 질병과 고통 속에 살고 있는 이웃 나라의 수많은 영혼들을 가슴에 품고 끝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나아가는 이들이 적지 않다.

세상일에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않고 열심인 것도 좋지만 주의 일에 그러하라는 강조이다. 사도 바울도 과거에는 주님이 누구인지 몰라서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몰라서 핍박하고 훼방하던 자였다. 그런 그가 주의 일에 열심을 갖고 섬기는 일꾼이 된 것은 성령으로 인한 것이었다. 어원적인 뜻에도 “열심을 품고”라는 뜻에 “성령으로 인한 열심을 품고”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성령으로 인한 열심이어야 지치지 않는다. 성령으로 인한 부지런함이어야 게을러지지 않을 수 있다.

일상생활을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명령형으로 되어 있지만 얼마나 의미심장한 교훈들인가.
사람이 언제나 늘 즐거운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살다 보면 기쁘고 즐거운 일보다는 힘겹고 답답하고 어려운 일이 더 많을 수 있다. 그러나 주를 믿는 성도들은 소망이 있기에 소망 중에 즐거워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 중에 사랑이 제일이지만 장래를 향한 소망이 없다면 사랑도 식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여야 한다. 그 이유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이다.(롬5:3-4)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고 살아서 잘 못된 인생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 가사 그대로이다.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주 나의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488장 1절)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 믿음 생활이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살아가노라면 주께서 사랑하시는 성도들을 견고한 놋 성벽 같게 해 주실 것이다.

예레미야 15장에 보면 기도하며 부르짖던 예레미야에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온다. “내가 너로 이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리니”라는 말씀이다.  세상을 살면서 무슨 일을 만날 지라도 주께 부르짖고 기도하고 간구하며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일일이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소망 중에 즐거워하여야 한다. 환난을 당할 지라도 참고 또 참아 내야 한다. 항상 기도에 힘쓰며 살아가다가 보면 어느 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여리고 성을 돌때에 꿈처럼 그 거대한 성벽이 무너져 내리듯이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역사하실 줄로 믿으라.

12절 말씀이 성도들의 내적인 신앙생활의 성숙해져 가는 모습이라면, 13절 말씀은 그 외적인 면을 말씀하는 것이다.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매우 구체적인 언급이다. 구제나 봉사가 구원의 필수 방편은 아니지만 지난 이천년간 교회는 꾸준히 섬김과 봉사와 구제의 실천을 강조해 왔다. 이는 이미 모세부터 계명과 율례와 법도로 강조하신 사랑의 실천 덕목이다. 홀로 사는 가난한 여인들이나 부모 잃은 고아와 나그네를 외면하지 말라는 것이다.(신10:18-19) 왜냐하면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고 교훈하신다.

성도 간에도 마찬가지이다. 있는 자는 없는 자를 모른 척 하지 말라는 교훈이다. 뿐만 아니라 손님을 대할 때에도 대접을 잘하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지나가는 나그네 세 사람을 잘 대접해서 나이 100세에 아들 이삭을 낳은 것처럼 말이다. 보아스는 나오미의 홀로 된 자부 룻을 선대하며 자기의 추수가 끝난 밭에 와서 이삭을 줍게 하던 중에 저를 아내로 맞아들여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스러운 가문을 세워 나갔다.

나그네나 지나가는 손님에게라도 대접하기를 인색하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마태복음 25장 35절과 36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비유의 말씀을 통해서 이렇게 교훈하셨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지 말고 손과 무릎과 발로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거듭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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