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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부모에게 이렇게 하라(잠23:22-26) 20220508어버이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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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2-05-09 22:28 조회 78 댓글 0
 

                     네 부모에게 이렇게 하라(잠23:22-26)      2022. 5. 8 어버이주일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은 십계명 중의 하나이다. 여섯 가지 인간관계에 대한 계명 중의 그 첫째 계명이 부모 공경에 관한 내용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

 

라고 부모 공경을 명령하시고 상급으로 누릴 복을 말씀하셨다. 그렇다. 아들딸로서 자기를 낳아 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이다. 기독교와 성경을 잘 모르고 함부로 비판하는 세상 사람들중에는 “기독교인은 늘 하나님 하나님 하면서 제 부모에게 제사도 드리지 않고 불효한다.”고 헐뜯는 말을 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도 모르고 부모를 진심으로 공경하는 기독교인의 참모습도 모르고 하는 비판의 말일 뿐이다. 성경은 제 부모를 공경할 것을 명령한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은 모세의 가르침이 아니다. 모세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계명의 말씀이다. 

 

성경에는 효자나 효부에 관한 일화로 가득하다. 예수님도 효자이셨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효도하는 아들이었다. 아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자기를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께 번제물로 바치려 할때에도 거역하지 않고 순종하였다. 이삭의 아들 야곱도 아버지 이삭에게 효도하는 아들이었다. 고향을 떠나 처가살이하던 야곱은 늘 아버지 이삭을 그리워하며 지냈다. 에서와 야곱은 이삭의 쌍둥이 아들이었다. 그러나 큰아들 에서는 어머니 리브가와 아버지 이삭에게 근심이 되는 아들이었다. 창세기 26장 34-35절에 보면 에서는 사십 살에 하나님을 모르는 우상 숭배 민족인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깃을 아내로 맞았다. 뿐만 아니라 연이어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도 아내로 맞아 들였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의 두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아버지 이삭이나 어머니 리브가의 축복 가운데 이루어진 일들이 아니었다. 창세기 26장 35절에 보면 에서의 결혼은“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라고 하였다. 

 

자, 그러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길일까. 오늘 읽은 잠언 23장에 보면 몇 가지의 가르침을 깨달을 수 있다.

 

 

청종하고 존귀히 여기라.

22절을 <새번역 성경>에서는 “너를 낳아 준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늙은 어머니를 업신여기지 말아라.”라고 하였다. 너를 낳아 준 아버지의 말씀이나 의견이나 교훈이나 가르침에 대하여 거역하지 말고 순종하라는 말씀이다. 뿐만 아니라 연세 들어가는 늙은 어머니를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였다. 

 

그렇지 않나. 아들딸 낳아서 키워 내려면 얼마나 애쓰고 수고하여야 하나. 밤을 낮 삼고 눈 코 뜰새 없이 돌보고 또 돌봐야 한다. 그래야 겨우겨우 젖을 떼고 걷고 뛰고 의젓한 아들딸로 자라나는 것 아닌가. 십대의 사춘기를 보내기는 또 얼마나 어려운가. 이 세상에 스스로 대소변을 가리고, 자기 스스로 제 앞가림을 다 하여 어엿한 성인이 되고 사회인이 된 경우가 있는가. 그런 경우란 없다. 그런 불세출의 영웅이 태어나서 자라난 이야기는 공산주의 국가에서 한 인물을 우상처럼 신격화할 때에 지어낸 이야기이지 절대로 그런 경우란 없다. 아니면 이단이나 사이비의 교조를 신격화할 때에나 통하는 허황된 이야기이다.

 

지난 어린이 주일에 묵상한 잠언 4장 3절의“나도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으며 내 어머니 보기에 유약한 외아들이었노라.”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누구나 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통해서 태어나고 자라난 어린 아기의 때가 있었다.

 

물론 세상에는 태어난 아기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비정한 엄마도 있다. 제 자식을 죽이는 패륜한 아빠의 사건 소식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세상 부모가 다 그렇게 악하지만은 않다. 세상에는 자기 아들딸을 제대로 잘 키워 내려고 노심초사하고 헌신을 다하는 마음 따뜻하고 훌륭한 엄마 아빠들이 훨씬 많다. 그래서 하나님은 잠언 기자를 통해서 이렇게 교훈하시는 것이다. 

 

“너를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라고 말이다. 부모가 내게 대단한 유산을 물려주지 못하고 다른 또래들처럼 금수저의 환경에서 태어나지 못했더라도 자기 어머니 아버지를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도록 낳아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내가 잘 낫든지 혹은 덜 잘 낫든지, 유능하든지 그렇지 못하든지, 건강하든지 혹은 건강하지 못하든지 내 생명이 이 세상에 주어진 것만으로도 어머니 아버지에게 감사할 조건이 충분하다.

 

“어머니 왜 날 낳으셨어요. 아버지 왜 날 기르셨어요”하고 자신의 생을 비관한다든지 혹은 “불효자는 웁니다”그렇게 처량하게 살아가면 안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자라나던 시절에는 “금수저, 흙수저”그런 표현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말들이 너무 쉽게 통용되고 있어서 아쉬움과 씁쓸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부모는 나무의 뿌리와 같은 것이다. 이 세상이 뿌리가 없는 나무가 자라날 수가 있는가. 그 어떤 나무이든지 뿌리 없는 나무는 없다. 나무줄기가 틈실하게 자라나고 나무의 가지가 번성하고 그 나무의 가지마다 잎이 자라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풍성하게 맺으려면 그 나무의 뿌리가 건강해야 한다. 뿌리가 병들거나 뿌리가 약해지면 결국은 그 나무는 시들거나 말라서 죽고 만다.

 

그러므로 뿌리가 중요하다. 나를 낳아 준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나를 키워 준 늙은 어머니를 업신여기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구약 룻기의 내용을 잘 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와 운명을 같이 하였다. 모압 여인 룻의 시댁은 시아버지 엘리멜렉과 룻의 남편 말론과 시동생 기룐이 차례대로 기근을 피해 먹고 살아 보려고 찾아 간 땅 모압에서 다 죽었다. 집안에 남자란 남자는 다 죽었다. 동서 오르바는 남편이 죽은 후에 동족인 모압의 친정으로 돌아가 버렸다. 불쌍하고 연세 많은 시어머니 나오미와 남편 잃은 젊은 며느리 룻만 남았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곁에 남아 있는 며느리 룻에게 “너도 동서처럼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룻은 친정으로 가 버린 동서 오르바와는 달랐다. 룻은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룻1:16-17)라고 말했다.  

 

말이란 생각이고 말이란 마음이고 말이란 그 사람의 의지의 표현이다. 룻의 그런 말이 그의 운명을 이끌어가는 말의 씨앗이 되었다. 룻은 늙어 가는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자기 나라 모압의 국경을 넘어서 가본 적이 없는 낯선 이스라엘 땅 베들레헴으로 찾아갔다. 시어머니 뒤를 따라 찾아간 낯선 시댁 마을 사람들은 그 어느 누구도 룻의 고부간의 일상을 돌아 보아주지 않았다.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룻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추수가 끝난 남의 밭에 가서 떨어져 있는 밀 이삭과 보리 이삭을 주워다가 비벼서 빵 한 조각씩을 구워 먹으며 연명하였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모시며 날마다 낯선 나라, 낯선 마을 베들레헴의 이 밭과 저 밭을 넘석 거리며 추수가 끝난 남의 밭에서 먹을거리를 찾아야 하는 처량한 신세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모압 여자 룻을 그 마을 베들레헴의 대지주 보아스의 아내가 되게 하셨다. 보아스는 룻을 통해서 오벳이란 아들을 낳았다. 오벳은 나중에 이새라는 이름의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 이새가 장성하여 장가갔고 여덟 아들을 낳았다. 우리가 아는 다윗 왕은 이새의 여덟 번째 아들이다. 룻기는 읽다 보면 마지막 부분인 4장 21-22절에서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으니라”는 내용을 끝으로 룻기의 기록이 끝난다. 

 

여기서 만나는 이름 ‘살몬’이 누구인가. 여리고성 정탐꾼 중의 하나였다. 그는 나중에 자기 일행을 지붕 위로 피신시켜 주고 삼대에 감추어 주었던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과 결혼하였다. 여호수아 2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 당시 기생이란 몸을 팔던 천한 여인을 말한다. 그런 그녀가 믿음의 사람 살몬을 만나 여호와의 사람 곁에서 남편의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룻의 남편이 된 보아스이다. 생각하여 보라. 다윗의 조상이 금수저인가. 아니다. 살몬도 보아스도 오벳도 이새도 결코 금수저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기를 선택했던 믿음의 사람들을 통하여 다윗과 같은 역사적인 인물이 태어나고 자라나는 신앙의 명문가가 되게 하셨다. 부모 공경은 십계명 안에 포함된 명령이다. 다시 부모 공경에 대한 십계명의 말씀을 듣자.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 이런 은혜와 축복과 간증의 주인공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기쁘고 즐거워하시도록 해라.

23절의 “진리와 지혜와 훈계와 명철을 돈을 주고 사되 팔지 말라”는 말씀이 무슨 말씀일까. 진리를 소중하게 여기라는 교훈이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잠언에는 얼마나 많은 지혜롭게 하고 명철하게 하는 훈계의 말씀들로 가득한가. 그 많은 진리의 교훈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지 말라는 말씀이다. 가슴에 새겨서 삶에 적용하고 실천하고 준행하라는 가르침이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배우고 깨닫고 알게 된 신구약 성경의 그 많은 말씀대로 준행하고 살았는데 잘못된 인생이나 잘못된 가정이 있는가. 그런 경우란 없다. 하나님은 망하게도 하시고 흥하게도 하신다. 인간의 흥망성쇠(興亡盛衰)와 길흉화복(吉凶禍福)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하고 하나님이 은혜 주셔야 하고 하나님이 형통하게 해 주셔야 하는 것이다. 사람의 노력이 필요하긴 하지만 하나님이 그 가는 길을 막으시면 아무리 힘을 쓰고 애를 써도 소용없는 법이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 요셉에 관한 말씀을 대하였다. 요셉은 어머니 라헬이 일찍 돌아가셨다. 동생 베냐민은 낳지 마자 베들레헴의 길가에서 숨을 거두었다. 요셉의 아버지 야곱은 아내 라헬의 죽음을 슬퍼하며 베들레헴 길가에 묘지를 마련해야 했다. 그런 여건에서 파란만장한 생을 살던 요셉이 나중에 아버지 야곱을 돌아가실 때까지 애굽 땅 고센에 잘 모시고 효도하는 효자로 자리매김하였다. 아버지 야곱은 죽은 줄 알았던 아들 요셉을 21년 만에 만났다. 가나안의 흉년이 아니었다면 연세 많던 야곱이 130세 되던 때에 애굽에 내려 갈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처절한 대 기근은 사람 뿐만 아니라 그 많은 양과 소와 염소 떼가 몰살할 지경이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이 찾아 간 땅 애굽에서 죽은 줄 알고 지내던 아들 요셉을 만나리라고는 상상한 적이 없었다.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요셉으로서도 21년 만에 어버지 야곱을 만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가나안 지역의 대 기근은 아버지 야곱과 아들 요셉의 역사적인 상봉이 가능해 지도록 인도하였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아버지 야곱과 아들 딸 며느리 손자등 70여명이 요셉의 도움을 받고 애굽의 아름다운 땅 고센에 정착하여 맘껏 목축을 하며 만족스런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죽은 줄 알았던 아들 요셉은 아버지 야곱에게 공경을 다했고 효도를 다했다. 요셉은 자기를 팔아 버렸던 10명의 형들과 꿈처럼 만난 동생 베냐민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여 배려하고 돌보았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에게 효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나안의 기근으로 죽을 운명에 있던 70여명의 가족들을 돌보고 번성하게 한 크고 넉넉한 손길의 주인공으로 살아갔다.

 

요셉은 130세 된 늙은 나이에 아들을 만난 아버지 야곱에게 기쁨이요 즐거움이요 자랑이었다. 오늘 본문으로 읽은 성경, 잠언 23장 25절은 말씀한다.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이런 은혜와 간증이 늘 계속되는 행복한 가정, 평화로운 가정을 가꾸어 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아들딸이 의인의 삶을 살아가고, 지혜로운 자식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하였다. 24절의 말씀이다. 여기서 말씀하는 의인이란 지혜와 명철을 얻기 위해서 힘쓰며 하나님의 진리의 교훈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 잠언 10장 1절에 보면 “솔로몬의 잠언이라.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라고 교훈하였다. 우리는 지혜의 왕 솔로몬의 나중 타락한 모습을 통해서 반면교사를 받고 정신을 차려 어머니 아버지의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되는 효자와 효녀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주의 말씀 안에서 마음을 다하라.

오늘 본문인 잠언 23장 26절에 보면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라고 하였다. 아들이 마음을 어머니 아버지께 드리는 것이 무엇일까. 마음이란 곧 그 사람 자신을 일컫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집에서든 직장에서든 사회생활의 그 어디에서든 혹은 교회 생활 중의 그 무엇이든지 ‘마음’이 중요하다. 마음만 있으면 오리를 가자고 하는 이 곁에서 십리라도 동행 할 수 있다. 마음만 있으면 속옷을 달라고 하는 이에게 겉옷이라도 줄 수 있다. 이것이 마태복음 5장의 산상 수훈에서 교훈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닌가. 

 

지난 5월 5일에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신 우리 김정순 권사님이 그런 분이셨다. 이제 돌아가셨으니 간증할 수 있다. 생존에 계실때에 그 분 간증을 하면 시기하거나 질투 할 수 있으니 간증 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 김정순 권사님은 주님의 품에 안긴 천국 입성의 선배가 되었으니 간증할 수 있다. 여전히 교회 안에서는 조심스럽지만 코로나 이후로 다시 부흥회에 어디든 초청받을 기회가 있다면 “나의 목회 사역 38년 중에 만났던 믿음의 여장부 김정순 권사님의 신앙 이야기”를 자세하게 간증할 것이다.

 

김정순 권사님은 로마서 16장에서 바울이 말하는 바울 곁의 뵈뵈와 같은 분이었다. 아굴라의 아내 브리스길라와 같은 분이었다. 로마서 16장 13절의 “주 안에서 택하심을 받은 루포의 어머니”와 같은 분이었다. 사도 바울은 “루포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라.”라고 간증할 정도였다. 여기 김희숙 사모, 김희남 전도사, 김정학 형제, 김래경 집사의 어머니 김정순 권사님은 곧 나의 어머니였다. 여기 김헌 목사의 장모님 김정순 권사님은 곧 나의 어머니였다. 여기 김지용 군의 할머니는 곧 나의 어머니였다. 

 

김정순 권사님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어떻게 섬겼는지를 간증하기에는 여전히 조심스럽다. 주의 종인 담임 목사와 종의 가정을 어떻게 대하여 왔는지를 간증하기에는 여전히 조심스럽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며칠 전 주님의 품에 안기신 김정순 권사님은 예수의 십자가를 졌던 구레네 사람 시몬의 아내이며 루포의 어머니와 같은 분이셨다. 그가 곧 바울의 어머니였던 것처럼 곧 나의 어머니였다. 

 

우리 교회 안에 또 다른 김정순 권사님과 같은 분들이 있느냐고 물어 보라. 더 계시다. 더 많으시다. 누구냐고 물어 보라. 바로 당신이다. 바로 당신어어야 한다. 바로 당신이 그런 삶을 살기를 주님은 원하신다.

 

아들이 마음을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드릴때에 그것이 공경이며 그것이 효도였듯이 믿음의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던 김정순 권사님은 주님의 몸된 교회에 마음을 드리셨던 분이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든든하게 세워오기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하며 오늘까지 온 마음을 주께 드리고 싶어 했던 분이셨다. 

 

오늘 날 우리 각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사회의 한 귀퉁이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마음이 중요하다. 마음이 소중하다. 마음이 전부이다. 힘이 없고 능력이 없고 재력이 없고 경험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없는 것이 문제이다. 마음만 있다면, 마음만 드릴 수 있다면 기적이 일어난다. 역사가 일어난다. 변화가 일어난다. 마음이 시작이다. 마음이 문제다. 마음이 전부다. 

 

예수께 향유 나드 옥합을 깨어 부어 드린 마리아는 값이 비싼 향유를 부어 드리기 이전에 예수께 그녀 자신의 마음을 드린 것이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께 마음을 드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름 뿐인 제자였다. 그러하다 보니 결국은 사단이 그 마음을 빼앗아 버렸고 예수를 팔아 버린 것이다. 마음을 지켜야 한다. 마음이 시작이다. 

 

그렇지 않나. 조국을 위하여 마음을 드린 자들이 애국자이다. 기업 발전을 위하여 마음을 드린 자들이 그 기업의 중심인물이 되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 복음을 위하여 마음을 드린 자들이 기독교 2천년 역사의 주인공들이다. 지난 2천년 교회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마음을 드리고 마음을 바친 이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가정이나 교회나 다 마찬가지이다. 주님의 몸된 교회에 마음을 드려 보라. 나를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신 어머니 아버지께 마음을 드려 보라. 마음이 우선이다. 마음이 전부이다. 마음이 중요하다. 마음만 있으면 지구 저편까지라도 갈 수 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보다 누구와 같이 가느냐가 더 중요하다”라고 말한다. 

 

부모 공경이 그런 것이다. 효도가 그런 것이다. 날 낳아 주시고 날 길러 주신 어머니 아버지께로 향한 진심이 있다면 그것이 곧 효도다. 그것이 곧 부모에게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뭘 잘 해드려서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되는 경우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보다 우선은 마음이다. 마음만 있다면 천리라도 함께가고 만리라도 함께 가는 것이다. 마음만 있다면 눈이라도 빼어 드리고 신장이라도 떼어 드리고 간이라도 잘라 드리는 것이다. 

 

<현대인의 성경>은 잠언 23장 26절을 이렇게 번역하였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나에게 주고 내 길을 지켜보아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부모를 공경하며 살아온 부모라면 그 부모의 살아가는 길을 지켜보아야 한다. 그리고 나도 나의 부모에게 마음을 쏟아 드리며 나의 어머니 아버지의 가시는 그 길을 지켜볼 줄 알아야 한다.

 

아브라함도 부족하고 이삭도 완벽하지 못하고 야곱도 허물 투성이였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하나님을 사랑하던 믿음의 선조들이었다. 저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소중하게 여겼던 언약의 조상들이었다.  저들은 언제나 여호와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고 싶어 했던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지금 어떤 형편 가운데 살아가고 있을지라도 믿음의 선진들을 주목하자. 그리고 특히 하나님을 믿는 나의 아버지 어머니라면 더욱 더 나의 부모에게 마음을 드리자. 그리고 나의 부모의 가시는 그 길을 지켜 보자. 하나님은 결단코 믿음의 가정과 그의 후손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장 2-3절에서 이렇게 교훈하였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화창한 가정의 달 5월, 날 낳아 주신 부모에게 공경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을 가꾸어 가는 믿음의 주인공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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