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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전도자의 복음 전파(행10:34-43) 2022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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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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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2-04-26 22:19 조회 5,019 댓글 0
 

                      전도자의 복음 전파(행10:34-43)        2022. 4. 24



오늘 읽은 사도행전 10장은 성령 받은 베드로가 욥바 지역에 선교 여정 차 체류하던 때에 가이사랴에 주둔하던 백부장 고넬료의 초청으로 그의 집에 찾아간 내용이다. 베드로는 고넬료가 불러 모은 그의 친척과 친구들에게 예수의 부활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는 성령께서 하신 일이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땅끝까지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시는 과정의 시작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히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라고 하였다. 그 당시에는 스페인이 땅끝이라고 여겼다. 


우리는 일주일 전에 부활 주일을 맞았다. 성도의 신앙의 바탕은 부활 신앙이다. 예수의 부활이 아니었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예수의 부활이 아니라면 세상 그 어느 종교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우리의 믿음의 바탕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부활시키신 이 부활 사건이 없었다면 우리의 믿음은 다 헛것이다. 단지 도덕과 윤리를 강조하는 그 어느 수양 종교의 하나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개와 죄 사함과 거듭남과 구원의 선물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장차 천국에 들어갈 백성일 뿐만 아니라 이미 예수를 믿는 이들은 이 땅에서부터 영생하는 하나님의 아들딸의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라고 하였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라고 하였다.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도착한 베드로는 무슨 설교를 했는가. 사도행전 10장의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의 성령 충만을 받은 베드로이다. 이전에 비겁하게 도망다니고 숨던 베드로가 더 이상 아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베드로의 모습에서 배워야 할 것이다.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떤 상태인가. 은혜를 넘치도록 받고, 성령 충만을 받고 변화되어서 불철주야 예수의 부활 복음을 전파할 만한 복음 전파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예전의 베드로처럼 여전히 비겁하게 모른다고 하고 곤란하면 피하고 도망 다니는 연약한 나는 아닌가. 


성령 충만을 받은 베드로는 요한 사도와 함께 날마다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였다. 성전 미문 곁에서 구걸하던 걷지 못하는 병자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행3:6)고 선포한 것도 성령 충만을 받은 이후였다.


사도행전 10장의 베드로는 이스라엘의 국경을 넘어 욥바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기도와 환상의 사람이었던 고넬료는 기도 중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게 되었다. 고넬료는 그 당시 가이사랴에 주둔하던 이달리야 군대의 백부장이었다. 그는 경건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온 가족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갔다. 고넬료는 군대 장교의 뻔한 월급을 가지고 늘 많은 사람을 구제하며 살았다. 아내가 협조하지 않았다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항상 기도생활을 계속하였다. 어느 날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환상을 보았다.  구시란 오늘 날 오후 3시다. 그런 시간에 현역 군인이 환상을 볼 정도로 기도했다는 것은 그가 평소에 얼마나 기도 생활을 간절히 했는가를 입증하는 장면이다. 사도행전 10장 22절에 보면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요 유대 온 족속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사람이요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그런 은혜의 사람 고넬료와 그의 친척과 친구들을 위해서 성령 충만한 복음의 사도 베드로를 고넬료의 가정에 부흥사로 보낸 것이다. 오늘 읽은 내용은 고넬료의 집에 도착해서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증거한 베드로의 설교 내용이다. 


우리가 요즘 매주일 지난 주일의 설교 내용을 글로 받아 읽지 않나. 지난 주일은 외부 강사의 설교 시간이었기에 2015년에 설교한 설교문을 실었다. 글의 힘이란 그런 것이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 목사는 1703년에 나서 1791년 하나님께로 돌아갔다. 그는 300년 전의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펜으로 잉크를 찍어서 쓴 일기문과 설교문들이 지금도 수 천페이지 분량으로 후세대에게 전해진다. 말의 힘도 무섭지만 글의 힘은 이처럼 대단한 것이다. 2000년 전에 사도 베드로가 욥바에서 가이사랴에 초대를 받았다. 그리고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서 부흥회를 열었다. 그 내용이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오늘 날까지 읽혀지고 있다. 놀랍지 않나. 그러면 그 당시 베드로는 고넬료와 그의 가족과 그의 친척과 그의 친구들에게 무슨 말씀을 전했을까.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받으시는가.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은 각 나라 중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다 받으시다.

하나님은 하나님 안에서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신다.


세 가지 내용을 먼저 전했다. 내가 아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육체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영이신 하나님은 인간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시다. 그 사람이 키가 크냐 작으냐. 몸이 퉁퉁하냐 호리호리하냐. 피부가 희냐 검으냐. 얼굴이 잘생겼느냐 아니면 그냥 그렇게 생겼느냐. 걸음걸이가 어떠냐. 하나님은 그런데 관심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단지 그 사람의 마음을 보신다. 


사무엘상 16장에 보면 사울 왕에게 실망하신 하나님이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을 찾으시는 장면이 나온다. 하나님은 선지자 사무엘을 베들레헴에 보내셨다. 하나님은 이새의 가정에 사무엘을 보내셔서 그의 여덟 명의 아들 중에서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자를 만나게 하셨다. 가장 먼저 만나게 된 아들은 엘리압이었다. 키가 크고 용모가 준수하였다. 보는 순간 사무엘은 너무나 마음에 들어 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순간에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우리가 기억하는 그 유명한 말씀이 여기에 나온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사람의 외모를 먼저 본다. 첫 인상에 비중을 많이 둔다. 얼굴 생김새와 그 사람의 외모가 풍기는 인상에 마음을 쓴다. 그러나 외모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다. 물론 그 사람의 생각이나 마음 가짐이나 평소에 품고 지내는 의식이 그의 얼굴 표정이나 외모에 배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나. 외모에 자신감이 없어 보이고 남의 눈치를 보며 심약해 보이는 사람이 있다. 반면에 너무 지나치게 자신 만만하고 오히려 교만해 보일 정도로 씩씩해 보이는 사람도 있다. 아무말도 하지 않는데 겸손해 보이는 사람이 있고 별말 하지 않는데도 웬지 상대방을 깔보거나 무시하는 듯한 눈빛과 표정이 읽혀 지는 사람도 없지는 않다. 보기면 해도 명랑해 보이고 매사에 긍정적일 것 같은 사람이 있고 보기만 해고 깐깐해 보이고 매사에 부정적일 것 같은 사람이 있다. 보기만 해도 체할 것 같은 표정의 사람이 있고 보기만 해도 편안해 보이는 사람이 있다. 그런 이유는 우리는 눈에 비치는 상대방의 얼굴 표정이나 외모에서 풍기는 인상을 통해서 뭔가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상대방으로부터 나에게 전해지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이 상대방의 인상이나 외모에 대하여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점일 수 있다. 동서고금에 사람은 외모를 본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로 그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인간을 영적 존재로 보고 영적 상대로 보시지 인간의 얼굴 생김새나 외모로 보지 않으신다. 더군다나 하나님은 유대인이냐 아니냐. 백인이냐 흑인이냐 황인종이냐의 피부색으로 차별하지도 않으신다. 남자냐 여자냐의 성별로 차별하지도 않으신다. 어른이냐 어린아이냐의 나이로 차별하지도 않으신다. 건강하냐 병약하냐로 차별하지도 않으신다. 왕족이냐 방백이냐 평민이냐의 신분으로 차별하지도 않으신다. 하나님은 많이 배웠느냐 못 배웠느냐. 명문 대학 출신이냐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다녔느냐로 구분하지도 않으시다. 부자냐 가난하냐는 경제적인 형편으로 구분하지도 않으신다. 사회생활에 능력이 있느냐 그렇지 못하냐로 차별하지도 않으신다. 


오직 하나님은 어느 나라의 어는 민족이든지 어떤 혈통을 가진 어느 시대의 그 어떤 사람이든지 불문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냐 혹은 하나님 안에서 불의를 버리고 의를 행하며 살아가는 자이냐”의 문제로 인생을 보신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렇지 못했다. 항상 자신들은 하나님께 선택 받은 민족이라는 우월의식과 선민의식이 강했다. 그래서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과 자신들을 늘 구별하였다. 사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하여 이미 분명히 말씀하였다. 신명기 10장 17절에 보면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라고 하였다. 


그러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누가 과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인가. 우리는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욥바 체험에 대하여 안다. 베드로는 고넬료 백부장이 보낸 하인 둘과 부하를 만나기 직전까지도 유대인의 우월의식 속에서 지내던 이였다. 이미 성령을 받고 방언도 하고 각기 난 곳 방언으로 기도하는 성령 충만의 현장을 체험한 그였지만 늘 그의 생각은 한결 같았다. 유대인은 타 민족들과 다르다는 구별의식이었다. 그런데 욥바에 머물며 낮 12시에 욥바의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서 옥상에 올라가 기도할 때에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베드로는 정오의 기도 시간에 황홀한 신비를 체험하였다.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왔다.  큰 보자기 같아 보이는데 네 귀퉁이를 매어 땅에 늘어 트리는 장면을 보았다. 그 안에는 땅의 네발 가진 짐승들과 기는 것들과 공중의 새들이 뒤 섞여 있었다. 그 환상을 보고 있는데 하늘에서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하는 주님의 음성이 들렸다. 베드로는 대답하였다. “주님 저는 평소에 속되고 깨끗하지 않은 것을 결코 먹은 적이 없습니다.”세번이나 같은 일이 반복 된 후에 보자기가 하늘로 들려 올라 갔다. 그런 신비한 체험 바로 직후에 백 부장 고넬료가 보낸 두 하인과 경건한 부하 한 사람이 베드로를 찾아 가서 만났다. 베드로는 체험한 신비한 환상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데 성령이 “너를 찾아와서 만나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으니 어서 내려가서 그들을 만나서 의심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가라”고 말씀하였다. 


베드로 사도는 그런 체험 후에 고넬료가 보낸 이들을 따라서 욥바에서 가이사랴 까지 찾아 간 것이다. 그리고 부흥회에서 말씀을 전하며 그 첫 주제의 말씀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신다”라는 내용을 정한 것이다. 


맞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신다. 베들레헴의 이새의 집에까지 찾아간 선지자 사무엘은 다윗의 형들 중에서 외모가 멋있고 키도 큰 이들 중에서 이스라엘의 차기 왕의 후보를 찾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일곱 아들을 차례대로 아니라고 하셨다. 그리고 들에서 양을 치던 여덟 번째 막내 아들 다윗을 불러 오게 하셔서 그에게 기름을 붓도록 하셨다. 다윗은 들에서 늘 양떼와 함께 지내셔 얼굴이 햇볕에 검붉게 탄 모습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다윗이 장차 이스라엘을 블레셋에서 구원할 왕이 될자라고 하셨다. 다윗은 그렇게 시작해서 블레셋의 골리앗을 물매 돌 하나로 물리쳤다. 일순간에 사울왕의 사위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서 장인 사울 왕이 사위 다윗을 죽여 없애려고 하였다. 다윗이 인기가 치솟자 다윗을 제거해 버리려고 한 것이다. 블레셋의 골리앗 장군을 죽인 후에 이스라엘에는 여인들마다 즐겨 부르는 노래가 새로 생겨났다. 사무엘상 18장에 보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 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의 각 성에서 몰려 와서 왕 사울을 맞이하였다. 여인들마다 노래를 부리고 춤을 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축제를 벌였다. 사울 왕을 환영하는 것 같은데 정작 가사는 그렇지 않았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18:7)


그 노래 가사를 들은 사울 왕은 불쾌하여 심히 분노하며 지냈다. 그 날 이후로 사울은 늘 소년 다윗을 죽어 없앨 궁리만 하였다. 사울은 마음에는 없었지만 다윗을 곁에 두어야 죽일 기회를 찾을 것 같아서 다윗에게 천부장의 직급을 맡겼다. 당시 군대의 높은 계급을 소년 다윗에게 부여한 것이다. 성경을 읽다가 보면 “다윗이 그의 모든 일에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삼상18:14)는 말씀을 대하게 된다. 


부활 신앙이 무엇인가.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였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 장사 지낸바 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무덤에서 살려내신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과 늘 함께 살아가는 신앙이어야 한다. 성도는 하나님 안에서 사망을 이긴 부활 영생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과의 싸움이 아니다. 우리는 공중 권세를 잡은 영 즉 사탄과 싸우는 것이다. 아니 예수께서는 이미 세상을 이기셨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그 앞에 보면 예수께서는 사랑하시던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뿔뿔이 흩어질 것을 예고하셨다. 그리고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요16:32-33)라고 하셨다. 


부활 신앙의 특징은 평안이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해 주신 첫 말씀도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20:21)라는 말씀이셨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는 성도는 외모에 매여 살지 말고 나의 마음을 아시고, 나의 생각을 아시고,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안에서 불안과 염려와 근심을 떨쳐 버리고 매 순간마다 평안하게 살아가야 하겠다. 늘 하나님을 경외하고 불의를 멀리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로운 행실의 사람들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런 은혜가 늘 함께 하시기를 축원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 예수 그리스도.

베드로 사도가 고넬료의 집에서 전한 두 번째 설교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에 관한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유의 주이시다. 모든 것의 주인이시다. 로마서 10장 12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라고 하였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의 주님이시다. 아니, 그를 주로 시인하지 아니하는 세상 사람들의 생사화복과 길흉화복을 주관하시는 주님이시다. 우리가 <만유의 주재>라는 32장에서 그렇게 찬송하지 않나. 


“만유의 주재 존귀하신 예수 사람이 되신 하나님 

나 사모하여 영원히 섬길 내 영광되신 주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화평의 복음을 전하셨다. 러시아의 푸틴은 요즘 날마다 전쟁의 소식과 살상과 파괴와 핵의 두려움의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악의 화신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화평의 복음을 온 천하 만민들에게 전하고 또 전하시는 평화의 왕이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아들 예수를 보내주셨다.

하나님은 세례 요한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세상에 널리 알리셨다.

하나님은 나사렛에서 자라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이 하셨다.

예수는 두루 다니며 선한 일을 행하셨다. 그렇지 않나. 각색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 내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다. 나사로나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이나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아들이라도 살려 내셨다. 배 고픈 광야의 무리에게 풍성하게 먹고도 남게 하셨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신 증거였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천 번 만번 말하고 또 말하여야 할 것이다. 누구에게나 말하고 언제나 말하여야 할 것이다. 나라 안에서도 말하고 국경을 넘어가서도 말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하긴 해야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말하고 또 말해야 할 것이다.  


증인된 자의 증언.

39절부터 43절까지의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39절과 41절에 보면‘증인’이란 표현이 반복된다. 42절과 43절에 보면 ‘증언’이란 표현이 반복된다. 42절에 보면 ‘전도’라는 표현도 나온다. 증인(證人)은 어떤 사람을 말하나. 성경이 말씀하는 증언(證言)이란 누가 무엇에 대하여 하는 말을 증언이라고 하나. 베드로는 예수의 증인이다. 그는 예수의 제자였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보다 예수의 모든 면모를 더 잘 아는 증인이었다. 왜냐하면 변화산에 올라가실 때에도 예수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가셨다. 마지막 밤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가실 때에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만을 데리고 가셨다. 이처럼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다른 예수 체험을 가진 예수의 증인 중에 증인이다. 


그런 베드로가 증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39절에 보면 “우리는 그가 행하신 모든 일의 증인이라.”라고 증언했다. 한 때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하고 배반하고 도망다니고 숨어 지내던 베드로였다. 그런데 오늘 여기 고넬료의 가정 부흥회 내용을 보면 담대해졌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과 부활 후에 자기를 만나 주시고 갈릴리 해변에서 새벽에 떡과 생선을 구워 먹게 하시던 그런 체험들을 일일이 증언하고 있다. 

42절에 보면 베드로는“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게 하셨다”라고 증언하였다. 그러면 그 증언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라고 증언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증언이 무엇인가.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 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라는 내용이다. 이 설교를 할 때에 베드로를 통해서 복음의 말씀을 듣던 고넬료와 그의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에게 성령이 임하였다. 저들도 방언을 말하였다. 다 같이 하나님을 높였다. 그 자리에서 물로 세례를 받았다. 은혜를 풍성히 받은 저들은 베드로 사도에게 며칠 더 머물면서 계속해서 말씀을 전해 주기를 간청하였다. 


우리 가운데 복음의 말씀을 듣고 또 듣기를 고넬료와 그의 친척과 친구들처럼 사모하는 간절함이 있기를 축원한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각 사람도 베드로처럼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복음을 증언하는 증인의 삶을 계속하여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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