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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은혜(고후12:7-10) 2021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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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1-11-16 13:37 조회 3,566 댓글 0
 

                         오직 은혜(고후12:7-10)             2021. 11. 14

 

 

저지난 주일인 10월 31일 주일에는 히브리서를 중심으로‘오직 그리스도’라는 제목의 말씀을 묵상하였다. 지난 주일에는 마태복음 8장의 칭친 받음 백부장의 믿음을 중심으로 ‘오직 믿음’에 대하여 묵상하였다. 오늘은 기도하던 사도 바울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인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말씀의 배경을 중심으로 ‘오직 은혜’이런 제목의 말씀을 나누려고 한다. 앞으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그리고 ‘오직 성경’이런 주제의 종교 개혁 5대 강령을 골고루 묵상해 가려고 한다.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바리새인을 대표할 정도의 주목받던 인물이 사울이었다.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이들을 박해하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의 부르심을 체험하였다. 사울은 그 후에 이방에 예수의 부활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 바울로 변화되었다. 우리가 아는 사도 바울은 제 1, 2, 3차의 전도 여정을 소화해 나가는 동안 그 자신은 육체적으로 몹시 쇠약해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본래 건강한 신체 조건을 가진 인물이 아니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몸에 있는 질병이 낫기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드리고는 하였다. 바울은 자신의 몸에 있는 질병을 ‘육체의 가시’라고 표현했다. 여기 가시라는‘스콜로포스’의 원 뜻은 ‘말뚝, 뾰족한 창’이란 의미이다. 고대 전쟁 당시에 땅에 뾰족한 창처럼 말뚝을 깎아 다듬어서 거꾸로 박아 놓는 전쟁 무기가 있었다. 오늘날로 하면 일종의 지뢰 설치 같은 것이었다. 그걸 상대편 군대가 밟으면 발바닥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어서 전쟁이 불가능한 장애를 입고 만다. 걸을 수 없는 무기력한 군대를 만드는 것이다. 바울은 그의 몸에 있는 질병을 ‘육체의 가시’라고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살아가게 하려고 남겨 두신 ‘사탄의 사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마치도 욥기 1장에 사탄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서 욥을 괴롭히는 내용과도 흡사하다.

 

살다 보면 몸이 약해질 수도 있고 병들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바울 사도는 자기가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는 몸의 질병은 하나님이 자신의 몸에 남겨 두신 ‘사탄의 사자’인 ‘육체의 가시’라고 깨달은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처음으로 14년 전의 자신의 영적 체험을 간증하였다. 셋째 하늘에 들려 올라간 경험을 말하고 있다. 4절에서 언급하는 ‘낙원’(樂園)이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 즉 하나님의 나라를 말한다. 그런 영적 체험으로 인해서 사도 바울은 간증하기로 하면 얼마든지 남들 앞에서 우쭐할 만한 영적 신비를 체험한 인물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자신을 자고하거나 자랑하지 않게 하시려고 육체에 가시를 남겨 두셨다고 고백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육체의 질병으로부터 고침을 받기 위해서 세 번을 주께 간구했다고 했다. 이것은 세 차례라는 의미라기 보다는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기도해 왔다는 의미가 더욱 크다. 우리도 그렇지 않나. 우리 몸에 쉽게 해결 되지 않는 병이 있다면 그 병에서 고침을 받기 위해서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니겠나.

 

잘 아는 큰 교회 목사 한 사람은 몸에 가려움증이 심해서 고생을 많이 한다. 좋다는 피부병약을 써도 해결이 되지 않는다. 용하다는 피부과 의사를 만나 보아도 시원한 치료법을 아직 찾지 못했다. 교회는 날로 부흥하고 매년 크게 부흥하는데 자신이 몸은 속 옷에 여기 저기 피가 배어 날 정도의 가려움 증으로 고생을 한다. 그런 지경이 되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하겠나. 그런데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데 자신의 피부의 가려움 증이 고쳐 지질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병 낫기를 위해서 기도 부탁을 해 오는 교인들의 질병을 위해서 기도하면 이런 병, 저런 병에서 고침을 받았다. 나았다는 간증을 들을 때가 많은데 정작 자신은 자기의 몸에 고통의 그림자를 달고 살며 매어 달려 간구하고 또 간구하는데 시원한 응답이 없다는 것이다. 그 정도 지경이 되면 매 순간 하나님 앞에 주의 도우심을 구하면 은혜와 자비와 긍휼을 구하고 또 구하지 않겠나. 불쌍히 좀 여겨 달라고 매어 달리고 또 매어 달리지 않겠나.

 

지난 이천 년의 교회 역사 동안 바울을 연구한 성경학자들은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사탄의 가시’란 간질 혹은 안질 혹은 우울증, 편두통, 말라리아와 같은 질병에 시달렸지 않았겠는가 라고 입을 모으기도 한다. 여하튼 바울은 몸에 해결 되지 않는 질병을 달고 살았다. 그 병이 바울로 하여금 자고하거나 자랑하지 않고 늘 겸손하게 주님이 분부하신 이방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는 계기가 되게 하였다는 고백일 수 있다. 

 

오늘 읽은 본문에 보면 바울은 자신이 ‘사탄의 가시’라고 표현하는 육체의 고통 가운데 깨달은 은혜를 구체적으로 간증하고 있다. 

 

 

은혜 중에 임하는 온전한 능력.

우리가 아는대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이후의 지난 2000년 교회 역사 기간 중에 가장 위대한 사역을 감당한 복음 전파의 사람이었다. 신약 성경 27권 중에서 거의 절반에 가까운 13편의 그의 편지가 성경에 포함될 정도이니 말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도 행전을 중심으로 그의 서신서에서 대하는 대로 그는 실로 그를 대신할 사람이 없을 정도의 성령과 지혜와 능력이 충만한 복음의 사람이었다. 바울을 한 마디로 말하라면 “주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 그 때에나 오늘 날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 각 사람이 주님의 일을 하려고 하면 무엇보다 먼저 은혜를 알아야 한다. 아니 은혜를 받아야 한다. 주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은 적이 없이 주의 일을 하겠다고 하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다. 은혜 받고 신학교에 들어가야 한다. 은혜 받고 나서 주의 일에 열심을 내야 한다. 은혜 받은 경험이 없이 내 의욕만 앞세워서 주의 일을 하려 하거나 교회의 그 어떤 사역을 하려고 하면 그처럼 위험한 일이란 없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역은 돈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학력으로 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사회적인 지위로 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세상적인 지위가 있고 세상 권력이 있고 세상 재물이 있고 세상 학식이 뛰어난 상태에서 은혜를 받으면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 그러나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은혜 받는 일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나. 은혜 받은 경험이 없이 성가대를 할 수 있나, 교사를 할 수 있나, 속회를 제대로 섬길 수 있나 아니면 교호의 어느 부서, 어느 기관에서 그 무슨 일인들 성실하게 덕스럽게 할 수 있느냔 말이다. 

 

은혜를 모르고 교회 생활하면 십중 팔구는 ‘끼리 끼리’의 집단과 친목 동아리 중심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은혜가 우선이다. 은혜를 받아야 영적 능력이 능력 다워진다. 내게 주어진 신앙적인 능력과 힘이 흩어지거나 내 자랑이 되거나 교만에 빠지지 않고 온전해 지려면 매 순간 주님의 은혜를 의지할 줄 알아야만 한다.

 

간혹 주님께 존귀하게 쓰임 받던 교회의 인물 들 중에서 사탄의 밥이 되어 무너지는 이들을 보게 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10장에서 광야 생활 중의 모세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리석음과 교만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교훈하고 있다. 광야 백성들은 우리가 잘 아는대로 같은 음식 같은 물을 먹고 마시며 살아야 했다. 만나와 메추라기 그리고 하나님이 반석에서 물을 공급해 주셔야만 물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었다. 사도 바울은 그 반석을 그리스도라고 해석하였다. 사도 바울은 그런 광야 생활 중에 멸망 당한 백성들의 예를 들고 있다. 

 

그 첫째는, 우상숭배이다. “우상 앞에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는 인용은 출애굽기 32장의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기던 사건을 언급한 것이다.

그 둘째는 음행이다. 광야에서 음행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은 23,000명을 예로 들고 있다. 

셋째는 주를 시험하다가 불뱀에 물려 멸망한 사건을 예로 들고 있다. 

넷째는 원망하다가 주께 심판을 받아 멸망 당한 이들을 예로 들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구체적인 교훈을 언급하면서 고린도전서 10장 11절에서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라고 교훈해 주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교훈한 말씀이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이 말씀이다.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 가고 싶은가. 은혜를 유지해야 한다.

 

요즘 우리에게 낯설은 ‘요소수 대란’을 겪고 있다. 우리는 대가 휘발유 차량에는 휘발유, 디젤 차량에는 디젤 연료만 보충하면 차량 운행이 가능한 것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요소수’는 디젤 차량의 ‘배출가스 저감장치’인 SCR(Selective Catalyst Reduction)에 사용하는 촉매제이다. 대기 오염의 원인이 되는 질소산화물(NOx)을 환경에 해롭지 않은 질소(N2)와 물(H2O)로 환원하는 작용을 한다. 질소산화물은 자동차 배기가스나 공장, 항공기 등에서 방출되어 산성비를 만드는 오염물질이기 때문이다.

 

요소수는 요소와 증류수인 물을 섞어 만든다. 요소수에서 요소가 차지하는 비율은 30%를 약간 넘는 정도다. 요소는 암모니아(NH3)가 희석된 형태로 열을 가하면 다시 암모니아로 변한다. 암모니아는 질소산화물과 화학반응을 일으켜서 질소산화물을 질소와 물로 환원한다. SCR 장치는 이 원리를 응용해 자동차에서 발생한 질소산화물을 정화시킨다. SCR 장치를 통해 줄어드는 질소산화물은 약 70~90%이며 매연이나 일산화탄소 등의 유해가스를 저감하는 매우 중요한 효과가 있다.

 

은혜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성경의 은혜라는 이 표현은 다른 것으로 대신 표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요소수 중국 의존도가 지난해는 80%, 올해는 97. 6%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은혜 의존도가 100%가 되어야만 한다. 창세기 6장에 은혜라는 표현이 성경 최초로 나온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6:8)고 했다. 그 당시 세상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과 모든 계획이 악함을 보신 하나님이 한탄하시고 근심하셨다. 그러나 그런 패역한 세상에서 노아만은 여호와께 은혜를 입고 살아갔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요 늘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노아는 그에게 명령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다 준행하였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사람에게 은혜를 구하면 안 된다. 나보다 더 나은 지위, 더 나은 재력, 더 나은 능력, 더 나은 경험, 더 나는 지식, 더 나은 신분을 지녔다고 해서 사람에게 줄서기 하면 낭패를 보고 만다. 사람 눈치만 보고 사람 비위만 맞추려다 보면 그나마 내게 머물던 은혜마저 떠나가 버릴 것이다. 사울 왕이 그런 어리석은 길을 간 장본인이다. 지혜의 왕으로 출발했던 솔로몬 왕에게서 여호와를 향한 은혜가 떠나자 그는 이방 여인을 처첩으로 거느리고 이방 여인들이 섬기는 우상을 따라 섬기는 패역한 왕이 되고 말았다. 

 

열왕기하 18장에는 히스기야 왕에 대한 일화가 담겨 있다. 히스기야 왕은 25살에 남 유다의 왕이 되었다.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였다.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연합했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다. 모세 때 주신 여호와의 계명을 지켰다. 그가 왕이 된 지 14년 되던 때에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남 유다에 쳐들어 왔다. 산헤립은 남 유다의 처처의 견고한 성읍들을 쳐서 점령하였다. 히스기야는 라기스에 사신을 보내서 화친하려 하였다. 산헤립은 은 300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를 요구하였다. 다급해진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을 있는대로 다 퍼주었다. 뿐만 아니라 성전 문의 금과 기둥에 입혔던 금까지 껍질 벗기듯이 벗겨내서 앗수르 왕에게 바쳐야 했다. 큰 불행과 위가가 닥친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히스기야에게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서 책망하셨다. 히스기야의 몸에는 죽을 병이 들었다. 히스기야는 병 낫기를 간구하였다. 15년만 더 살게 해 달라고 매달렸다. 임금이든 평민이든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야 한다. 은혜를 모르면 교만해지고 자고해지고 어리석은 범죄에 빠지고 만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지속적으로 자신의 은혜의 수위를 점검해야 한다. 은혜의 강수가 넘쳐 흐르도록 사모하여야 만 한다. 에스겔이 에스겔 47장에서 본 환상처럼 은혜가 발목, 무릎, 허리 정도에 머물지 않고 은혜가 사천 척의 강을 이루어 그 은혜의 강에서 헤엄치는 그런 은혜 생활을 유지해야만 한다. 

 

에스겔은 너무나 분명하고 선명하게 보고 들었다. 성전 문 앞면 동쪽 문지방으로 흐르기 시작해서 성전 오른쪽 남쪽으로 흘러 내리기 시작했다. 그 물의 양이 늘고 늘어서 나중에는 4,000척 깊이의 깊은 강물을 이루었다. 주께서 에스겔에게 물으셨다. “인자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에스겔은 강 좌우편에 심히 많은 나무를 보았다. 주께서 또 말씀하셨다.“그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 나리라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또 이 강 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그 진펄과 개펄은 되살아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겔47:8하-12)

 

우리 예수사랑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어른 아이,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주의 은혜로 이미 받은 능력이 점점 온전해 지는 은혜 충만한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은혜를 아는 자의 기쁨.

바울은 몸은 비록 약하고 해결 되지 않는 질병을 달고 살았으나 그에게는 빼앗길 수 없는 큰 기쁨이 있었다. 9절에 보면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은”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바울은 늘 자신의 몸의 병을 고쳐 달라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데 주님의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한결 같은 대답 뿐이었다. 바울은 약해도 기뻤고 힘들어도 기뻤고 억울해도 기뻤고 속상한 일을 겪어도 기뻤다. 바울에게는 그 어떤 환경, 그 어떤 곤경 중에서도 빼앗기지  않는 큰 기쁨이 있었다.

맞다. 성도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이미 마음 깊숙하게 간직하고 살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 어떤 형편, 그 어떤 상황, 그 어떤 지경, 그 경우를 만날지라도 큰 기쁨을 빼앗기지 않는 자로 살아가야만 한다. 

 

베토벤은 “기쁨은 고난 속에서 생겨난다”고 말했다. 우리 나라 속담 중에는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이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격언인 탈무드에는 “웃음 소리는 울음 소리보다 멀리 간다”는 교훈이 있다. 미국의 자연 정원 가꾸기로 잘 알려진 타샤 튜더 할머니는 “우울한 그 뒤 쪽에 손이 닿는 곳에 늘 기쁨이 있다”는 말을 남겼다.

 

당신은 어떤가. 기쁘기 때문에 기쁜 것은 세상 사람 그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성도된 믿음의 사람인 우리들은 그 어떤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함 중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참 기쁨, 영원한 기쁨,  그 어떤 형편 중에서도 빼앗길 수 없는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간직하고 누리며 살아갈 줄 알아야만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고 교훈하였다. 

 

사도 바울은 오뚜기와 같은 기쁨의 사람이었다. 그는 어떤 고난, 어떤 환난, 어떤 충격적인 어려움을 겪어도 기쁜 마음으로 딛고 일어났다. 고린도 후서에 보면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11:23-28)는 그의 간증과 고백 앞에 우리는 더 이상 할 말을 찾을 수 없게 되고 만다. 

 

 

약할 때 임하는 은혜.

사도 바울은 연약한 자였다. 몸도 약하고 때때로 파도처럼 밀려 드는 우울이 심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열악한 신체 조건과 정신적인 연약함을 하나님의 은혜로 이겨 나갔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 내가 겸손해야 은혜의 강수가 내 심령에 흘러 들기 시작한다. 교만하고 거만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고 만다. 겸손하게 자신의 약함을 인하여 주님의 은혜를 구하고 또 구할 때에라야만 주님이 존귀하게 사용하신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 어려운 일들을 겪을 때마다 주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구체적으로 구하였다. 10절에서 언급하는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함은 바울로 하여금 역사적인 인물 바울로 살아가게 하는 주님의 힘이었다. 바울을 지탱하는 힘은 오히려 그의 약함이었다. 하나님은 바울 사도의 그 약함을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담는 그릇처럼 사용하셨다. 10절에 보면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바울은 그것을 오히려 자랑으로 여겼다. 오직 예수만 높이고, 오직 예수만 자랑하고, 오직 예수만 말하고, 오직 예수로만 기쁨의 근원을 삼으려 하였다. 

 

F. J. 크로스비(Crosby, 1820-1915) 여사는 95년을 살았다. 그는 태어난 지 6주만에 눈병을 앓았다. 실력 없는 안과 의사에게 치료 받다가 실명하고 말았다.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그의 엄마는 생활 전선에 나섰다. 할머니가 그를 키우며 정성을 다했다. 못 보지만 보는 것 이상으로 모든 사물을 설명해 주었다. 그는 커가며 8000여곡 이상의 찬송시를 썼다. 우리 찬송가에만도 22곡이나 실려 있다. 모두가 다 애창하는 찬송들이다. 31장 “찬양하라 복되신 예수”, 40장 “찬송으로 보답할 수 없는 큰 사랑”, 144장 “예수 나를 위하여”,  176장 “주 어느 때 다시 오실는지”, 240장 “ 주가 맡긴 모든 역사”, 255장 “ 너희 죄 흉악하나”, 615장 “그 큰일을 행하신 ”등의 찬송들이다. 

 

몸이 숯처럼 타버린 몸으로 공부해서 한동대학교 교수로 활동하는 이지선 교수를 보라. 종합병원처럼 연약한 몸으로 살던 송명희 자매의 숭고하고 말고 깨끗한 영혼의 고백들을 보라. 우리는 ‘공평하신 하나님’과 같은 그의 고백에 곡을 붙인 찬양으로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고 또 받았는가. 우리가 아는 베토벤이나 반 고호 같은 인물들도 얼마나 약하고 부족한 면이 많았나.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은혜의 손길에 붙잡혀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

 

다 같이 ‘하나님의 은혜’찬양을 부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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