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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백부장의 믿음(마8:5-13) 2021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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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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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1-11-09 17:52 조회 213 댓글 0
 

                       한 백부장의 믿음(마8:5-13)           2021. 11. 7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믿음의 문제와 그 반대인 의심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예수를 십자가에 달려 죽임 당하게 했던 대 제사장 가야바나 그의 장인 안나스나 그 외의 역대 제사장들이나 서기관, 바리새인, 산헤드린 관원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믿음이 없었다. 그래서 예수를 미워했고 대적했고 죽여 없애기만 하면 자기들의 세상이 계속되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예수를 처형한 백부장과 그 곁을 지키던 자들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 과정을 지켜본 후에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27:54)라고 고백하였다. 

 

한 번은 갈릴리를 밤 중에 건너던 제자들이 깊은 밤 중에 바람과 풍랑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 전날 저녁에 벳세다 광야에서 오병 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그 밤에 있었던 일이다. 그 날 그 배에 예수는 함께 타고 있지 않았다. 예수는 따로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다. 그런데 새벽 두 세시 경에 예수께서 물 위로 걸어서 풍랑과 파도 가운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제자들 곁으로 다가 가고 계셨다. “유령인가 보다”하고 무서워하며 소리치는 제자도 있었다. 예수께서는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 말라”고 하셨다. 

 

나중에 예수이신 것을 알게 된 베드로가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요청하였다. 예수께서는 “오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예수의 말씀을 따라 물 위로 걷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잠시 후에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게 되었다. 베드로는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소리쳤다. 예수는 즉시 손을 내 밀어 베드로를 붙잡아 배에 오르게 하셨다. 그리고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책망하셨다. 예수께서 베드로를 손 잡아 배에 오르게 하시자 바람이 그쳤다.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예수께 절을 하며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로소이다.”라고 경배하였다. 이 내용은 마태복음 14장 22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골고루 기록되어 있다. 

 

영국 출신의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 선교사는 <타당한 확신>(proper confidence)이란 책을 썼다. 기독교 제자도의 믿음, 의심, 그리고 확실성을 주제로 한 책이다. 일평생 복음주의자로서 인도에서 35년간 선교 현장에서 사역한 경험을 바탕으로 서구사회의 지적이면서 문화적인 배교를 바꾸는데 깊은 관심을 지닌 책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에 대해 탐구하고 근본주의자들의 반응과 포스터모던주의자들의 급진적 허무주의 사이의 흐름을 기록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저자는 1909년 영국 뉴캐슬에서 태어났다. 평생토록 인도 선교 현장에서 은퇴한 후에는 서구 사회의 기독교 변증과 복음 전도에 힘썼다. 그는 책에서 “1. 믿음, 지식에 이르는 길 2. 의심, 확실성에 이르는 길 3. 확실성, 회의주의에 이르는 길 4. 하나님에 대한 지식 5. 오직 은혜로 6. 성경 7. 오직 믿음으로”등의 각 주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 즉 신앙적인 확신과 자기 확신과는 그 차원이 분명히 다르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의 바탕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며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인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정의의 문제이다. 그러나 세상적인 자기 확신이라 자칫 잘못하면 자기 신념의 울타리에 갇히고 말 위험이 크다. 아마도 대개의 세상 사람들은 그런 범주에서 살아갈 것이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존재를 시인하려 하지 않는 무신론자나 불신자들의 경우에는 더욱더 그러할 것이다. 이 시대의 양극화 현상 중에 주사파 논쟁이나 좌파 혹은 우파로 구분하는 이념 논쟁들이 그러한 예 중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어리석은 믿음은 자꾸만 자기를 흑암의 수렁으로 끌고 들어간다. 

 

예수께서 비유로 드신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그 적절한 예이다. 그 비유에 등장하는 어느 부자는 자기가 세상을 그럴듯하게 살고 있는 줄 알았다. 그는 대문간의 거지 나사로 정도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두 사람 다 죽었다.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 갔고 부자는 지옥에 갔다. 하나님은 나사로가 거지라서 불쌍하니까 천국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그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를 욕심 많은 부자였기 때문에 지옥에 가게 하신 것도 아니다. 천국과 지옥은 믿음의 문제이다. 

 

믿음이 무엇인가. 창세기 15장 6절에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는 말씀이 있다. 이 때는 아직 아브람에게 아들 이삭이 태어나기 전이다. 아브람은 75살에 하나님을 만났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찾아오셔서 아브람을 부르신 것이다.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하나님은 그 나이에 자식이 없던 아브람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언약해 주셨다. 아니 지금 그 나이까지 자식 한명 없는데 큰 민족을 이룬다는 말씀이 무엇인가. 그 후에 하나님은 가끔씩 나타나셔서 언약을 확증하셨다. 어느 날 하나님은 다시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셨다. 그리고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이 때에 아브람은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라고 반응하였다. 아브람은 이어서 “약속하신 씨를 주지 않으시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하나님은 “그가 네 상속자가 아니다. 네 몸에서 날자가 네 상속자가 될 것이다.”라고 대답해 주셨다. 하나님은 장막 안에 있던 아브람을 장막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다. 밤이었다.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 날 밤에 아브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 생겼다. 하나님은 그 날 밤의 그 믿음을 아브람의 의로 여기셨다. 창세기 15장 6절의 내용이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할 점이 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라는 표현은 “아브람에게 여호와께서 하시는 말씀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는 내용이다. 

 

우리는 오늘 한 백부장의 믿음에 대하여 묵상할 것이다. 마태복음 5-7장의 산상 수훈 후에 곧 이어서 나오는 유명한 일화이다. 한 백부장이 있었다. 여기 백부장이란 그 당시 로마의 군대 장교이다. 100명의 부하를 거느린 지휘관이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당시 군대의 총 책임자는 황제였다. 그러므로 백부장의 우두머리는 황제이다. 백부장이 말은 곧 황제의 말이며 백부장의 명령은 곧 황제의 명령과 같은 권위가 있었다.

 

그런 그에게 중풍병에 든 하인이 있었다. 그는 그 병든 하인의 병을 고쳐 보려고 소문에 듣고 가버나움에 들어 가신 예수를 만나러 왔다. 그는 간구하며 예수께 기도 제목을 말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여기 이 로마의 백부장이 예수께 “주여”라고 부른 것이 예사롭지 않다. 이는 예수께 대한 분명한 존경심과 예의를 갖춘 호칭이 아닌가.

 

우리는 이 장면에서 마음이 따뜻한 로마 백부장의 모습을 연상하게 된다. 그는 출세한 군인이다. 앞으로 계급이 잘 올라갈 가능성이 큰 로마의 장교이다. 그런 그가 로마 시민이 아닌 유대 갈릴리 출신의 예수 소문을 듣고 찾아 온 것이다. 그리고 정중한 예의를 갖추어서 자신의 중풍병으로 누워 고생하는 하인의 병을 고쳐 달라고 찾아 온 것이다. 그 당시에 병든 하인은 쓰다 고장난 농기구 취급을 받던 때이다. 그런데 중풍병으로 몇 년째 고생하는 지 모르겠으나 괴롭게 집에 누워 중풍병으로 투병생활하는 자기 하인을 몰라라 하고 내치지 않고 그의 병을 고쳐 보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 자체가 이 백부장은 평범한 인물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이 말씀을 들은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하고 대답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이 백부장의 예수을 향한 믿음의 면모를 보게 된다. 

 

 

말씀대로 되리라는 믿음.

이 백부장은 예수께“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와 그의 말씀”에 대한 상관 관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도대체 이 로마의 군인인 백부장은 어디서 예수께 대한 그런 믿음을 평소에 갖고 있었던 것일까 하고 질문하게 된다. 

 

요한복음 1장 14절의 말씀처럼 “예수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시던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는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계시던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러므로 예수의 영광은 아버지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었다. 예수께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우리는 예수를 직접 대면하는 시대의 사람들이 아니다. 물론 예수께서 이 땅에 와서 계시던 이천년 전에는 갈릴리 주변과 예루살렘 성민들을 비롯한 이 곳 저곳의 수 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눈으로 목격하였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예수를 보고도 그를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독생자”이신 것을 믿지 못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 중에 대표적인 이들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었다. 산헤드린 관원들이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이가 우리가 아는 사도 바울이다. 다메섹 도상의 변화를 체험하기 이전의 사울은 예수를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고 예수 믿들을 박해하고 박멸하려 하던 바리새인의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여기 등장하는 이 사람 로마의 백부장은 달랐다. 예수께서 말씀만 하시면 자기 하인이 중풍병에서 고침을 받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 믿음의 근거는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 믿음이다. 우리는 예수를 ‘주님’이라고 부른다. 여기 ‘주님’이란 표현은 상대적으로 나를 ‘종’으로 인정하는 표현이다. 종은 주인의 소유이다. 그 당시 중풍병에 든 하인이 이 백부장의 하인이었던 것처럼 이 백부장은 예수를 자신의 주님으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신앙이다. 우리 각 사람의 믿음의 정도가 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과연 예수께서 내 삶의 주님이신가?”라는 믿음에 대한 질문 앞에 대답할 말을 준비하고 살아가야 한다. 

 

아브람에게 하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믿음이 생기기 전까지는 자신의 상속자는 함께 늙어가는 종 엘리에셀이어야 한다는 자기 생각이 분명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엘리에셀에 대한 언급은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는 대답만 해 주셨다. 세월이 흘렀고 이 언약을 못 기다리던 아내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을 통해서 사라의 여종인 하갈의 몸에서 이스마엘이 태어나게 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언약의 씨로 인정하지 않으셨다. 다시 세월이 흘렀다. 아브람의 나이 100세, 사라의 나이 90세 때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의 아내 사라의 몸에서 아들 이삭이 태어나게 하셨다. 

 

이것이 믿음의 여정이다. 이것을 믿는 믿음 만이 하나님이 의(義)로 여기시는 믿음이다. 요즘 날마다 일정하게 바울 서신을 쓰면서 많은 묵상을 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 계속하여 묵상해 가는 욥기의 말씀을 통해서 구구 절절마다 깊이 있는 묵상을 다시 새롭게 계속해 가고 있다. 

 

4000년 전의 욥은 오늘날로 하면 아시아 최고의 부자인 인도 무케시 암바니(Mukesh Ambani, 1957-) 같은 인물이다. 그는 인도의 GDP의 10%를 좌지 우지하는 인물이다. 그의 기업 <릴라이언스 인더스트리>는 인도의 에너지, 통신, 유통을 장악하고 있다. 그의 선친이 1960년대에 시작한 작은 무역 회사가 그렇게 큰 것이다. 무케시 암바니는 집 값만도 우리 돈으로 2조원에 이른다. 4000년 전의 욥이 그런 재산가였다. 동방의 부자였다. 아들 일곱, 딸 셋이 화목하게 지내는 우애있는 가정이었다. 욥의 하나님을 향한 경건함은 동방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였다. 그런 대단했던 욥이 거지가 되었다. 열 자식이 한 날 한자리에서 다 죽었다. 자신의 몸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병들었다. 

 

요즘 욥을 찾아 온 세 친구와의 대화를 묵상하고 있다. 욥기는 42장이 끝이다. 그 끝에 보면 하나님은 욥의 세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을 책망하셨다. 하나님은 그 동안 욥에게 말한 그 세 친구들의 말을 못 마땅하게 여기셨고 저들 욥의 세 친구들에게 노하셨다. 반면 욥이 쏟아 놓은 그 많은 탄식과 저주와 낙담의 말들이 섞여 있는 욥의 그 모든 말들을 옳다 하셨다. 이게 무슨 말인가. 욥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였다. 자신의 감정과 표현에 숨김이 없었다. 그런 처절한 재난 가운데 쏟아 놓은 욥의 말들을 하나님은 옳다 하셨다.

 

하나님은 욥의 세 친구들에게 수소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가지고 가서 욥의 앞에서 하나님께 번제하게 하셨다. 그리고 욥으로 하여금 욥의 어리석은 세 친구를 위하여 중보하는 기도를 대신 드리게 하셨다. 하나님은 욥의 기도를 들으시고 욥의 세 친구의 우매함을 용서하셨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내 뜻대로 판단하고 내 뜻대로 결정하고 내 뜻대로 추진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믿음의 사람을 찾고 계신다. 

 

이쯤에서 자신에게 질문해 보자. “과연 나의 믿음은 매사가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라고 말이다. 이런 믿음의 주인공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칭찬 받은 믿음.

백부장의 믿음이 분명한 대답을 들으신 예수께서 이 백부장의 대답에 대하여 놀라워하셨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전능자의 아들이신 주님께서 그 정도의 말에 놀랍게 반응하신 것은 특별하다. 아니 특별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인간적이다. 맞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의 신성과 더불어 우리와 같은 몸을 입고 이 땅에 사시던 인성을 가지신 인자의 모습을 접하게 된다. 그렇다. 우리가 아는대로 예수께서는 수가 성 우물 가에서 마을 안에 음식을 구하러 들어간 제자들을 기다리시다가 낯 설은 여인에게 말을 건네며 물 한 바가지를 받아 마시는 인간적인 모습이 있으셨다. 너무 고단하니까 갈릴리 저편으로 향하는 배 안에서 뱃고물을 베고 깊은 잠이 들어 버리시기도 하셨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버니 나사로의 죽음의 소식을 접하시고는 눈물을 흘리며 우시기도 하셨다. 

 

이처럼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신 예수께서 백부장의 말을 들으시고  놀랍게 여기셨다. 그려면서 크게 칭찬해 주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오늘 날 우리 각 사람이 예수 앞에서 칭찬 받는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생각해 보라. 그렇지 않나. “내 생각, 내 주장, 내 말, 내 직업, 내 사업, 내 장사, 내가 하는 그 어떤 그 무엇이 주님께 칭찬 받을 만한 일인가 아니면 주님을 실망시켜 드릴 말과 일인가”하고 진지하게 질문해 보자. 그리고 아니라고 여겨지면 돌이켜야 할 것이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다. 성도는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이다. 코로나 19 바이러스에 감염 되면 내 몸이 바이러스로 인해서 병들 수 있다. 심각한 후유증으로 고생할 수도 있다.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이처럼 내 생각과 말과 하는 일들이 가정, 가족, 교회, 성도, 직장, 사업 현장, 사회, 국가 안에서 칭찬받을 만한가. 아니면 예수께 책망 받을 일은 아닌가. 질문하고 그 대답을 찾아가자.

 

 

누구에게나 주어진 믿음의 기회.

믿음은 혈통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극히 개인적이다. 믿음은 각자의 고백에 의한 것이다. 인종, 혈통, 혈색, 남녀 구분, 언어, 풍습, 문화, 습관, 전통, 지역, 국가, 빈부, 귀천을 초월하는 것이다. 믿음은 각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선택하는 것이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주님께서 분부하시는 사명 앞에 반응하는 것이다.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라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을 자가 있을 것이다. 반대로 아브라함의 후손의 혈통을 가진 자라도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될 자가 있을 것이다. 

 

지금은 추수의 때이다. 추수 날에 농부는 알곡은 창고에 쌓아 두고 쭉정이는 불에 태워 버릴 것이다.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말씀하셨다. “가라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그 말씀을 하시는 즉시 백부장의 하인이 깨끗하게 나았다. 

 

로마서 1장 17절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 2장 4절을 인용한다. 이것이 마틴 루터의 ‘오직 믿음으로’라는  종교개혁 5대 강령 중의 하나였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의 힘이다. 11월 마지막 주일인 28일은 성탄절을 기다리는 대강절 첫째 주일이다. 우리는 성탄절이 다가 오고 대강절 즉 강림절이 다가 오면 예수 탄생에 관한 복음서의 말씀들을 다시 펼쳐서 묵상하고는 한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의 방문 앞에 무서워하고 당황하였다. 그러나 반복되는 천사의 방문과 천사를 통해서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마리아는 나중에 믿음의 고백을 하였다. 

 

천사 가브리엘이 말하였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눅1:37) 그 때에 마리아는 대답하였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

 

주의 말씀인 성경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주인공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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